6 ․ 25를 전후해서 우리 국민들은 끼니를 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매일 밥 세끼 먹는 것이 아침에 보리밥에 점심 저녁은 수제비 국이나 칼국수로 때를 에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도 저희는 아버지께서 재건조장에 근무를 하셔서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대부분은 하루 한 두끼를 거르는 것은 다반사로 밥을 제때 먹는 것이 어려울 때 이야기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낳아서 한번도 이사를 가보지 않고 살고 있는 집으로 옛날에는 초가집이었고 큰 마당에는 봄이면 분홍색으로 발갛게 화들짝 피는 커다한 살구나무가 있었고 바로 울타리 담 너머로 앞 집은 하꼬방 집이라고 해서 부엌 하나에 방 하나가 붙어 있는 이웃 집이 있었다.

우리 집은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외아들인 저하고 네 식구가 살고 있었고 앞 집에는 부모님과 아들 둘에 딸 셋 해서 일곱 식구가 살았는데 그 집의 큰 아들이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에서 동기 동창으로 지낸 친구였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거쳐 치과 의사가 되어 한 10년을 치과의 개업을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육대학을 거쳐 교직에 42년을 몸담았다가 마지막 모교인 증평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을 한 것이다. 퇴임과 동시에 고향인 증평에서 뿌리박고 70 평생을 살았기 때문인지 지역 사회단체인 주민자치위원장, 예총회장, 민주평통협의회장, 문화원장 등 굵직굵직한 단체장을 맡으면서 그것도 사회봉사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봉사하고 건강도 챙기고 하는 것이 일과였다.

그런데 지난 2017년 8월 2일 도안에서 종묘원을 하고 있는 박사장이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해서 종묘원으로 차를 몰고 가서는 그 곳에 차를 두고 박사장 차를 타고 청안 쪽에 있는 식당으로 가고 있는 중에 문화원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옛날 우리 집 앞에 살던 치과의사 하던 친구의 동생이라면서 원장을 뵙자고 찾아 왔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그 때 12시가 좀 넘는 시간이라서 오후 1시까지 점심을 먹고 갈테니 오후 1시에 그 분을 원장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는 전화를 끊고 약 20분 후에 다시 문화원으로 전화를 했다. 사실 친구의 남동생이 워낙 머리가 좋아서 약간 정신 이상이 왔다는 얘기며 그 동생이 주위의 친척들을 괴롭힌다는 얘기를 듣고 해서 혹시 그 동생이 찾아왔나 궁금하기도 해서 원장을 만나자고 한 분의 신분을 물었더니 황당하게도 여승 차림이라는 이야기였다.

점심을 먹고 다시 도안의 종묘장으로 가서는 내 차를 몰고 오후 1시가 되어 원장실에서 친구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끊은지 채 5분도 안돼서 여승이 도착했다. 원장실에서 둘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여승은 친구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어떻게 멀리서 나를 찾아 왔느냐고 조급증이 나서 물으니 그 막내동생이 사연을 이야기 하는데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50년 전 그 동생이 열 두 살때 자기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 사이에 그 옛날 못살던 시절에 자기 어머니가 오빠 대학 등록금 때문에 쌀 두 짝 값을 우리 어머니에게 꾸었다는 이야기며 그 광경을 자기는 생생하게 목격을 했다는 얘기였다. 저와 치과 친구는 전혀 몰랐던 이야기로 그 후 30년이 지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옛날 아무적께 쌀 두 짝 꾼 것을 너희가 꼭 갚아야 한다고 유언을 하였다는 얘기다.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이 더 가면서 그 막내 동생도 불가에 입적하여 강원도 원주에서 승려 생활을 하고 있는데 꿈 속에 다섯 번이나 어머님께서 나타나셔서는 그 돈 갚았느냐고 다그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빠에게 옛날 쌀 두 짝 값을 갚기 위해서 강원도에서 일부러 찾아 왔다는 사연이었다. 그러면서 봉투 두 개를 내 놓는데 한 봉투에 100만원 씩 200만원이 들어 있는 것이다.

세상에 부모가 꾸었디는 것을 알아도 자식들이 안 갚는 세상에 50년이 지난 지금 그것을 갚는다고 온 승려 동생의 갸륵한 ‘불심’에도 감동을 했지만 전혀 모르고 있던 것을 받는 다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극구 사양했으나 그 동생은 오빠가 받아야 자기가 다리를 뻗고 편히 살 수 있겠다는 간곡한 청에 그럼 받았다고 치고 불교에서 ‘보시’라고 해서 좋은 일에 쓸 수 있게 하자고 약속을 하고 서로의 온유한 정을 나누고 헤어진 사실을 밝혀 두는 것이다.

50년 전 쌀 두가마니의 값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그 후 50년 후에 돌아 온 200 만원은 가히 2천 만원 아니 2 억의 힘으로 내 가슴에 다가 와 이제 70이 넘어 증평문화원장으로서 앞으로 세상을 살면서 이런 감동이 또 올 수 있을까 하는 연민의 정을 느끼고 정말 세상에 티없이 맑게 남에게 사랑을 주고 받는 삶을 살아 가겠다고 다짐해본다.

<김장응 프로필>

등단지 : 수필문학

등단년도 : 2008년도

주소 : 충북 증평군 증평읍 삼일로 11길 8

약력

․ 1946년 증평읍 교동에서 출생

․ 1967년 청주교육대학 졸업

․ 2005년 삼보초등학교 교장

․ 2007년 증평초등학교 교장

․ 2011년 증평예총 회장

․ 2013년 증평읍주민자치위원장

․ 2014년 민주평통증평군협의회장

․ 2015년 증평문인지부장

․ 2016년 증평문화원장

이메일 : kje20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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