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대한불교조계종 심곡사(주지 지문 화평)에서는 4월 21일(토) 오후 3시, 산사 내 정정열 명창 득음기념 공연장에서 “제1회 심곡사 떡목 음악회”를 개최한다.

판소리 명창 정정렬(丁貞烈)은 19세기 말. ‘조선적’인 판소리 시대가 서서히 끝나갈 무렵에 태어나 오랜 수련을 통해, 훗날 평자들에게 ‘근세(近世) 오명창(五名唱)’의 하나로 꼽힌 세기의 명창이다.

하지만 이러한 명창에게도 시련이 있었으니, 소리꾼으로 대성하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조건인 ‘떡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떡목’ 이란 고음부의 음역이 좋지 않아 자유로운 소리 표현이 잘 안되고 소리가 심하게 거친 목을 칭하는 표현이다.

정정렬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고장인 익산 미륵산의 심곡사 등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견디며 소리에 매진하는데, 그의 소리연마는 다른 이들의 몇 곱절이나 되었다. 인고의 열매는 달다는 것을 실제로 확인시켜준 대표적인 명창이 곧 정정렬 이다.

이에 이 고장을 빛낸 국창 정정렬 선생을 추모하며 익산시의 지원을 받아 정정렬 명창 득음기념 떡목 공연장을 건립하였고, 대한불교조계종 심곡사에서는 떡목공연장 개관을 기념하고자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익산국악진흥원과 함께 금년을 시작으로 지역 내 정기 공연으로 자리 메김하고 주 5일제를 맞아 온 가족이 함께 조용한 산사에서 여유롭게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문화아이콘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제 목 : 제1회 심곡사 떡목 음악회
일 시 : 2012년 4월 21일(토) 15:00
셔틀버스 운행 미륵사지 주차장 -> 심곡사 (오후 1시 ~2:30분)
장 소 : 정정렬 명창 득음기념 떡목공연장(미륵산 심곡사 내)
사회자 : 박범수(개그맨) 

떡목이란?
판소리에서는 고음부의 음역이 좋지 않아 자유로운 소리 표현이 잘 안되고, 소리가 심하게 거친 목을 ‘떡목’이라고 하는데 소리꾼으로 대성하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악조건을 오랜 공력으로 다듬어 내면 거칠면서도 힘이 있고, 소리의 극적인 면을 살려낼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시켜준 대표적인 명창이 곧 정정렬이다.

정정렬의 생애와 소리 입문
판소리 명창 정정렬(丁貞烈)은 19세기 말. ‘조선적’인 판소리 시대가 서서히 끝나갈 무렵에 태어나 오랜 수련을 통해 ‘일류 명창,’ ‘국창(國唱)’의 칭호를 받았고, 훗날 평자들에게 ‘근세(近世) 오명창(五名唱)’의 하나로 꼽힌 세기의 명창이다.
정정렬은 1876년 5월 21일 전북 익산군 망성면 내촌리1)에서 태어났다. 정정렬의 선대는 세습 광대였으며, 정정렬의 첫 번째 스승 정창업도 집안의 일족(一族)이었다. 또 아우 정원섭(丁元燮:1878- ?)은 고수로 이름을 날려 세간에서는 ‘형은 노래의 신선(歌仙), 아우는 북의 신선(鼓仙)’이라 평하기도 했다.
정정렬은 일곱 살 되던 1882년에 부모의 뜻에 따라 소리를 배우는데 첫번째 스승은 서편제의 대가 정창업(丁昌業:1847-1889)이었다. 그러나 스승 정창업은 정정렬이 소리의 체계를 완전하게 익히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이후 이날치(李捺致: 1820-1892) 명창의 문하에 들었으나 입문한지 세 해만인 1892년에 역시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만나고 만다. 그러자 정정렬은 새로운 스승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독공으로 소리를 연마하려는 뜻을 품고 노래 외에는 모든 것을 잊은 채 미친 듯이 소리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 마을 인근의 익산 미륵산의 심곡사, 부여 만수산의 무량사, 공주 계룡산의 갑사 등지를 돌아다니며 죽을 것 같은 육신의 고통을 견디며 소리에 매진하는데, 정정렬의 이러한 소리연마는 다른 이들의 몇 곱절이나 되었다.
훗날 정정렬의 소리에 대한 여러 평가를 참조해보면 정정렬이 이렇게 소리에 매진한 것은 자신의 소리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던 듯 하다. 『조선창극사』의 저자 정노식이
“정정렬은 그 천자(天資)는 와력(瓦礫)인데 수련의 적공(積功)으로 성공한 명창이다. 공부하는 도중 성음이 탁하고 성량이 부족함을 한하여 지살(至殺)하기를 비일비재하였다”
고 말한 것처럼 정정렬은 타고난 목이 좋지 않아 음색이 탁하고, 성량도 부족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난히 긴 학습기를 보냈던 것이다. 이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적공(積功)’의 명창 정정렬은 전 생애를 걸쳐 ‘독공’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작고하기 한해 전에도 여름 한 철을 절에서 독공으로 보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정정렬의 음악활동
정정렬은 1930년대에 방송과 공연활동, 음반 취입으로 가장 유명한 스타 명창이 되었다. 50대가 넘어 뒤늦게 서울의 중앙 무대로 진출해 작고하기 전까지 10년동안 정정렬은 후배 판소리 명창과 청중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다. 김여란, 박녹주, 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여류명창과 박동진, 김연수 등의 남자명창들이 줄지어 그의 문하에 들었으며, <조선성악연구회>에서는 가장 제자가 많은 스승이었다. 그리고 판소리 명창으로서는 JODK 방송에 가장 많이 출연하였고, 빅터와 폴리돌 등의 음반회사의 초청으로 음반사에 기리 남을 대규모 전집 음반을 녹음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정정렬은 소리를 창극 식으로 구성하여 녹음하는 방식을 생각하여 <춘향전>, <심청전>, <화용도> 등의 전집을 냈는데, 그가 소리를 창극식으로 부르고, 기악 반주를 붙여 녹음한 기획은 여러모로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정정렬은 1936년 무렵 창극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902년 원각사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창극은 비록 무대에서 연극식으로 소리하는 공연으로 자리를 잡아갔지만,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리의 배역을 나눠 부르는 식의 ‘분창(分唱)’ 형식의 공연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하나의 줄거리가 있는 창극을 여러 날에 걸쳐 연속해서 공연하는 식의 ‘연쇄(連鎖) 창극’ 도 시도되었는데, 처음에는 청중들의 흥미를 끌었으나 점차 관심이 저조해지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 정정렬은 창극의 연출을 맡아 창극의 소리와 대사는 전통성을 살려 품위와 격조를 더하고, 극적으로는 하루 공연에서 기승전결의 구조가 완결되도록 구성하며, 소리꾼들이 직접 연기를 하면서 소리를 불러 소리와 극이 겉돌지 않고 조화롭게 표현된 신 형식의 창극을 선보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공연장인 동양극장에는 연일 관람객이 넘쳤고, <춘향전>이 큰 성공을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흥보가> 등의 후속프로그램을 속속 발표함으로써 1936년은 그야말로 창극사에 신기원을 마련하였다. 그가 시도한 창극은 오늘날까지 창극의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정정렬의 이러한 노력에 주목한 판소리 학자 중에는 그를 ‘현대 창극의 아버지’라는 말로 그의 공로를 평가하기도 하였다.

정정렬이 완성한 소리예술의 세계
정정렬은 남다른 소리해석과 창극 연출 등으로 누구보다 창의적이고 새로운 판소리를 한 이로 평가받고 있다. 정정렬이 활동할 무렵 세간에서는 그의 소리를 ‘신식 판소리’라 하며 크게 환영하였다. 정정렬은 비록 목이 좋지 않아 ‘성음’으로 소리의 미학을 만족스럽게 표출하지 못하는 대신, 다양한 음악의 변용으로 그 이상의 예술미를 완성한 것이다. 판소리는 성음과 장단, 다양한 조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면서 사설의 극적 구성을 다이나믹하게 표현하는 음악인데, 정정렬은 성음에서 부족한 부분을 장단의 부침새를 변화무쌍하고 정교하게 구성하는 동시에 조(調)와 음질(音質)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살려내었다. 정정렬은 판소리 사설을 노래하면서 장단을 정격대로 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본래의 장단 보다 길게 늘이거나, 또는 앞당겨 붙이는 등 ‘엇붙이는 방법’을 구사함으로써 음악적 재미를 극대화했다. 그의 변화무쌍한 소리 장단 구사는 웬만한 고수들이 소리를 맞추기 어려운 정도였는데,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이후 판소리와 기타 민속음악 및 춤의 리듬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 청중들은 소리꾼과 고수가 절묘하게 맞춰나가는 조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더욱 정정렬제 소리를 즐기게 되었다.

‘정정렬제 춘향가’의 탄생
여러 가지 판소리 중에서 정정렬은 특히 <춘향가>의 판을 아주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정정렬은 <춘향가>를 새롭게 짜면서 소리뿐 만 아니라 극적 구성과 사설의 표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춘향과 이도령이 먼저 춘향모의 허락을 받은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첫날밤을 지낸 후에야 춘향모에게 사실을 알린다든지, 사랑의 표현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묘사된다든지, 이별 대목에서도 오리정에서 작별하는 장면을 더 넣어 슬픈 소리를 길게 부르도록 한 것이다. 정정렬이 짠 <춘향가>의 전편 구성을 보면 그가 소리꾼으로써 문학적 소양도 매우 잘 갖추고 있다는 평에 공감하게 된다. 특히 춘향이 멀리 떠나는 이도령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볼 때 가는 대로 적게 뵌다. 달만큼 보이다가 별만큼 보이다가 나비만큼 불티만큼, 막상 고개 넘어가니 아주 깜박 그림자도 못 보겠구나’ 라고 한 대목은 이별가의 명 대목으로 꼽힌다.

정정렬 명창의 음악유산
정정렬은 1930년대에 서울을 근거로 공연과 음반취입, 방송출연, 제자 양성, 새로운 창극형식 정착 등의 많은 일을 열정적으로 추진하던 중 1938년 3월 21일 서울 종로 판철정 128번지에서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위암이었다고 한다. 정정렬의 장례식은 3월 23일 정오 종로 익선정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진행되었는데 천여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지심지우(至心知友)로 일생을 함께 지내던 이동백, 송만갑 원로와 남녀제자들이 복을 입고 영결하였다고 한다. 장지는 미아리로 결정되었다. 이처럼 남다른 열정과 노력으로 명창이 되어 방송활동과 음반취입, 공연, 창극연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정정렬은 오늘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특별한 음악 유산을 남겨주었다. 첫째, 정정렬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소리명창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가 값지다. 판소리에서는 고음부의 음역이 좋지 않아 자유로운 소리 표현이 잘 안되고, 소리가 심하게 거친 목을 ‘떡목’이라고 하는데 소리꾼으로 대성하기에는 아주 치명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악조건을 오랜 공력으로 다듬어 내면 거칠면서도 힘이 있고, 소리의 극적인 면을 살려낼 수 있는데,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시켜준 대표적인 명창이 곧 정정렬이라는 점이다. 정정렬 명창의 두 번째 음악유산은 ‘정정렬제 소리 세계’이다. 그는 전(前)에도 없었고, 남과도 다른 독자적인 판소리 세계를 이룩하여 ‘정정렬 제 판소리’를 남겼다. 특히 ‘정정렬 제 소리’ 중 춘향가는 그 독자적인 해석이 더욱 독보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정정렬이라는 이름은 판소리 명창과 애호가들 사이에서 ‘정정렬 나고 <춘향가> 다시 났다’라는 말과도 통할 만큼 그의 춘향가는 남달랐으니 그야말로 ‘창의적인 소리세계를 이룩한 명창’으로 오래 오래 기억될 것이다.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