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회상의 화려한 재현

[불교공뉴스-불교]한국불교유산 중 가장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영산재는 범패로 시작해서 범패로 마감을 한다. 속되지 않고 마음 속 번뇌를 다 씻기는 듯하다. 청량한 소리로 부처님께 바치는 소리 공양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이 범패를 가장 정확하게 듣고 볼 수 있는 의식이 바로 영산대재다. 영산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영취산에 법화경을 설할 당시의 모습을 오늘날 다시 재현한 하나의 의식이며 퍼포먼스이다.

범패의 출현은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의 범패 역사는 신라 경덕왕 19년인 서기 760년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4월 초하룻날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떠서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으니 임금은 월명대사를 불러 범패로 다스리기를 원하나, 대사는 자신이 아는 것은 향가뿐이며 범패는 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에 신라에서는 범패를 하는 스님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이다.

범패의 본격적인 기록은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 대공탑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치원이 기록한 이 비문에서는 서기 830년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진감국사는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 범패를 이야기 할 때 위에 서술한 역사의 두 기록은 언제나 빠지지 않는 머리글처럼 등장한다. 이는 이 기록들이 사가들이나 학자들에 의해 인용된다는 의미는 그만큼 중요하고 사료적인 가치로 공인되었음을 의미한다.

해방 이후, 한국 범패를 이야기 할 때 위의 기록만큼이나 빠지지 않는 스님이 있다. 송암 스님의 이야기는 근현대사 한국 범패의 기록에서 하나의 온전한 역사이고 흐름이며 맥이기 때문이다.

송암(松岩)스님의 본명은 박희덕 이다.
1915년 10월 태어난 스님은 당시의 역사기록을 돌아보게 한다.
1880년대 우리는 몇 가지 커다란 사건을 만나게 되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이 1884년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은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파의 거두들이 우정국 낙성식을 기화로 일으킨 정변이었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나기는 했지만 당시의 어지러운 우리 역사의 괘를 그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철종의 사위로 금릉위에 봉해졌고 수신사로 일찍이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 박영효는 이 일로 일본으로 망명을 하게 되었고, 박영효의 아내는 강화도로 귀향 가는 도중 갑곶진 나루터에서 자살을 하고 만다. 바로 이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가 오늘날 범패의 명인으로 이야기되며, 범패와 하나의 단어가 된 송암 스님의 조부, 즉 할아버지가 된다. 갑신정병으로 풍비박산인 난 박영효는 자신의 아들을 남의 집에 맡긴 채 부자의 연을 끊게 된다.

 

박영효의 아들, 다시 말하면 송암 스님의 부친이기도 한 박춘서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몇 가지의 물건들만 간직한 채 남의 집 살 이를 전전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열다섯 해 황해도 장단의 심복사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운허(雲虛)라는 법명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운허 스님은 부친인 박영효가 일본 땅에서 쓸쓸히 죽어갔다는 소리를 듣는다. 운허 스님은 당시에 끝내 자신을 찾지 않은 부친을 원망했고, 이국땅에서 쓸쓸히 죽어간 부친을 잊기로 마음먹는다.

이상 송암 스님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스님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어쩌면 음산하기까지 했던 개화기 시절의 어두운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송암 스님의 숙명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송암 스님의 속명은 박희덕이다. 부친이 스님이었기에 큰 걱정 없이 자랐을 거라는 대부분의 추측과는 달리, 그는 무척이나 고생을 하며 자랐다고 한다.
그가 열한 살 때 부친은 산림벌채에 손을 댔으나 돈을 몽땅 떼이게 되었고, 거기에 사기까지 당해 거의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어린 박희덕은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됐다. 열세 살 무렵 어린 박희덕은 봉원사 앞에다 간이 이발소를 차리고 스님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을 한다. 부친인 운허 스님이 봉원사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봉원사 스님들은 모두 어린 박희덕에게 이발하기를 희망했고 덕분에 생활도 안정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박희덕은 문득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에서 한문공부만 해오던 터라 신식공부에 대한 열망이 생겼던 것이다. ‘신식공부하면 사람 버린다’는 어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희보명학교를 2학년에 입학해서 졸업하고 이어 ‘경성상업실천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유난히 총명했던 박희덕은 2년여 만에 학교를 그만 두고 만다.

상업부기니 하는 회계법을 이미 다 떼어버린 터고, 한문 같은 교육과정은 선생님이 오히려 그에게 묻는 실정이었고 무엇보다도 학교에서 매일 같이 실시하는 근로봉사는 그를 지겹게 만들었던 것이다.

경성상업실천학교를 그만 둔 박희덕은 당시에 명동입구에 있던 경성호텔 사무원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호텔이라는 곳이 박희덕의 정서와 어울리기 만무했다.
보름여 만에 그만 둔 그는 무역회사에 취직한다.

그러나 이곳 역시 한 달여 만에 그만둔다. 속세의 생리가 맞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취직한 곳은 바로 머리를 깎는 일이었다.

세간을 건너 출세간으로 들어서기 위해 박희덕이 아닌 박송암 스님은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아홉 나던 해 11월에 출가한다.

입산하자 송암 스님은 범패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절밥’을 먹고 자란 터였고, 등 너머로 보고 귀로 익힌 것이나 진배없었던 것이 범패이고 보면, 송암 스님에게는 그 일이 가장 쉬운 것일 수도 있었다.

오히려 스승을 재촉하여 하루에 두어 곡씩을 뗄 정도로 천재성을 보였던 송암스님은 월하(月河) 스님과 그의 제자 벽해 스님 등, 여러 스승을 섭렵하면서 범패를 습득한다. 송암 스님이 본격적으로 범패승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출가한지 2년여 정도 지난 스물한 살 무렵이었다.

하루 종일 재를 올리는데 한 스님이 소리를 잘못하여 스승에게 꾸지람을 받고 쫓겨난 자리를 스님이 채우면서였다. 30여분 동안 틀린 스님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자 어장스님이 송암 스님을 칭찬하며 범패스님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후 송암스님은 봉원사의 모든 재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사찰로부터 재를 요청 받을 때마다 뛰어가야 했고,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스님의 독특한 이력 중에 알려지지 않은 행정이 하나 있다.

바로 서른 살 무렵에 일 년여 정도 관여했던 ‘극단 청춘극장’에서의 활동이었다. ‘극단 청춘극장’은 당시의 신파극과 같은 연극을 올리곤 하였는데, 여기에서 송암 스님은 주로 스님 배역을 도맡곤 하였다.

청춘극장 시절의 송암 스님의 인기는 웬만한 배우를 뺨칠 정도였다고 전한다.
기생들이 인력거나 택시를 보내 다른 절에서 그를 찾는 것처럼 하고 납치를 도모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송암스님은 지난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50호 범패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의 스승인 이월하 스님에게서 범패를 배운지 40여년만의 일이다. 당시 스님과 함께 범패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은 벽응 스님이었다.

벽응 스님은 송암 스님에 비해 나이는 연상이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함께 범패를 부르며 자웅을 겨루던 명인이기도 했다. 두 스님들의 혼이 담긴 소리는 아직도 봉원사의 사찰을 감싸며 영산대재 발표회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청량하고 화려한 성음을 지녔다고 평가받고 있는 송암 스님의 범패 인생은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평탄한 길을 걸어온 셈이다. 더군다나 일제 강점기 사찰령에 의해 범패가 금지되고, 또한 해방이후 대처승들에 대한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스님은 봉원사에서 수행하면서 부처님 찬탄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송암 스님은 범패가 구전심수(口傳心受)의 묘미를 갖고 있다고 하여 평소에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범패의 신묘한 성음(聖音)을 기록할 수는 없다. 오로지 입으로 소리를 전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근래 오선지에 범패를 채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것으로 범패의 제 맛을 살릴 수는 없고 단지 범패의 뼈대만을 기록할 뿐이다. 그나마 범패를 현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린다는 점에서 고마울 따름이”라고 하였다.

범패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약에 송암 스님이 없었더라면 우리나라 범패의 역사는 그 명맥이 거의 끊겼을 것이라고 평한다. 그 어렵고 힘든 역사의 굴곡 속에서도 오직 부처님 찬탄의 길을 걸어오면서 제자들에게 범패를 온전히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닌 듯싶다.

송암 스님은 그의 스승 월하 스님에게서 범패의 전 과정을 가장 충실하게 전수받은 수제자이다. 현재 남아있는 범패의 15가지 짓소리는 물론이고 안채비, 바깥채비, 홑소리 등 일체를 모두 기억하고 구전심수로 전해오는 과정을 통해 자칫 사라질 뻔 했던 영산재 대부분의 과정을 재현해냈다.

또한 송암 스님은 봉원사에 영산재 보존회를 설립하고 부설로 범음대학을 개설하여 범패의 보존과 학술적 계승을 위해 여생을 바쳤다.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제자들에게 호된 질책과 세심한 가르침으로 존경을 받았던 범패어장 송암 스님. 열반 직전까지도 해마다 열리는 영산재를 이끄셨으며, 제자들에게 영산재의 짓소리와 안채비 등을 몸소 가르쳐왔다. 스님은 당대 최고의 어장이며 우리 시대 범패의 증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송암스님
- 1915년 서울 출생
- 1933년 영진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수료 및 경성상업학교 졸업
- 1934년 박운허스님을 은사로 봉원사서 득도
- 1934년 월하스님으로부터 범패전수
- 1969년 옥천범음회 설립
- 1973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50호 영산재 기능보유자 지정
- 1987년 영산재보존회 총재
- 1994년 영산재보존회 부설 범음대학 학장
- 1994년 옥관문화훈장 수상
- 1998년 한국불교태고종 승정에 추대
- 1999년 한국불교 태고종 대종사에 추대
- 2000년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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