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법현(스님.열린선원 원장, 태고종 전 부원장)

 

[불교공뉴스-불교]현재 한국 불교계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수행(修行)과 관련한 문제는 성불확신(確信)과 방편회통(會通)의 부재라 할 것이다. 이는 여러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종교 가운데 수행을 가장 중요시 하는 종교가 불교인데 수행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듣고 읽었던 중국과 한국의 큰스님들의 수행법에 관한 법문은 참 묘하다. 인류의 큰 스승이며 불교의 교주인 붓다의 수행법인 그침(samatha.止)과 살핌(vipasana.觀)을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데 조사선(祖師禪)의 아래에 배치하고 혹은 외도선(外道禪)이라고까지 하였다. 활구(活口)를 참구하는 수행자의 입장을 강조하다보니 화두(話頭)를 부정하고 고요한 가운데 현상(phenomena)과 법칙(law)을 살피는 초기적 방법의 묵조(黙照)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물론, 당시 조동종(曹洞宗)의 지도자들과 관련한 것이기는 하다. 또,

얼마 전 있었던 어느 모임에서 ‘수행의 이력과 인격이 비례하지 않는다’라고 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불교 수행은 어느 방법을 택하든 수행을 진행해 감에 따라 내 속에 있던 오염원(汚染源) 즉 나를 부처되게 하지 못하고 중생되게 하는 요인을 없애가는 것이다.

그것은 스승의 인가도 가능하지만 스스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십 년 수행을 했는데도 인격의 향상을 경험하거나 보여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단지 앉아 있었던 것이지 수행을 한 것이 아니다.

이는 성불확신의 부재로 이어진다. 문제의 원인은 간화선 수행자나 지도자들의 전통인 입실면수(入室面授),거량(擧量), 조참석취(朝參夕趣)등의 과정을 통해 행해졌던 수행자에 대한 지도와 점검 및 인가(認可)하는 전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기불교의 사마타나 위빳사나 수행자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자기 단체의 수행법을 제외한 곳의 수행은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다며 물었을 때 ‘그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지속하지 않겠는가?’라고 답해주었지만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들은 붓다의 말씀을 담은 경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청정도론을 나름대로 활용한다고 한다. 더 나아가 대승불교와 간화선(看話禪)은 불교가 아니라고 한다.

나(我)와 내 것(我所)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시간 따라 변하는 것이기에 일정한 정체성도 없다. 그래서 나라고 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내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사상이다.
 
제 뜻은 존재 없음(無所有 즉 無有)에서 출발한 비아(非我)가 맞다. 이 붓다의 가르침이 중국의 도교사상과 어울려 무아(無我)로 옮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대승에서 참나(眞我),불성(佛性) 등을 강조한다고 해서 불교가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붓다의 가르침도 원음 그대로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드물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필요하다는 것은 부족하다는 의미도 된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 어느 수행법이 일어나고 흥하고 쇠하고 없어지는 것은 모두 그 시대와 장소의 필요에 따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절대적인 것을 강조할 때 붓다의 가르침과는 어긋난다.

이러한 혼란과 대립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먼저 붓다의 가르침을 시대적으로 활용한 가르침들이 붓다의 길로 인도한다는 성불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처님의 위대한 점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으며,이미 부처임을 확인하고 선언하였으며, 그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노력한 데 있다. 이는 달마(達摩)대사도 ,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한 혜능(慧能)대사나 ,‘평상의 마음이 바로 깨달음(平常心是道)’라고 한 마조(馬祖)대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해골 물을 마시고도 깨달았다는 원효대사나, 염불하면서도 마음만 챙기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한 태고(太古)대사, 마음이 자유로워야 출가이지 머리만 깎는다고 출가가 아니라 한 서산(西山)대사도 또한 같다. 지극한 사랑이 곧 진리라고 읊은 만해(萬海)대사 등 모든 본분납자의 가르침에서 일상생활을 떠난 진리는 없다는 것이 공통된 주장이다. 남방의 초기불교에 입각한 사마타, 위빳사나 수행지도자들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회통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며,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잘 알아서 성불을 위한 수행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서로 회통하도록 평생 노력하며 남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교단을 중심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無相法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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