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작업대에 앉아 천천히 끌을 잡았다. 쇠붙이의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훑고 지나간다. 준비한 탈 모형을 작업대에 올려놓고 여러 위치에서 각도를 쟀다. 하회탈 중에 떡다리탈, 별채탈, 총각탈은 복원하지 못하고 있는 탈이다. 복원을 시도 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에서도 그 원형을 찾을 수가 없으며 자료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게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스승의 말에 의하면 소실된 세 개의 탈은 신탁을 받은 사람만이, 마음의 눈으로 복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마음의 눈이라는 게 좀처럼 가슴에 와 닿는 말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만이 조각할 수 있다는 것인데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나는 세 개의 탈을 복원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떡다리탈, 별채탈, 총각탈을 복원하기 위해 문헌을 조사하고 스승이 남긴 자료를 연구해나갔다. 그러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탈 마당의 연극 대사와 문헌을 조합해서 겨우 모형을 이리저리 꿰 맞춰봤다. 하지만 여전히 미완성이었다. 여러 학자들의 자료와 채록된 내용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스케치를 한 결과 소실된 세 개의 탈의 형상을 어느 정도는 재현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상상이 가미된 형상인 것이다. 세 개의 탈을 복원하기 위해 나무를 뭉툭하게 잘라놓았다. 세 개의 탈은 머리 쪽이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중심점을 따라 눈과 코 그리고 입술 위치를 연필로 찍어 두었다. 웬일인지 손끝이 파르르 떨었다. 아직도 마음이 홍어처럼 곰삭지 못함인 듯하다.
목이 바싹 타 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몸 안에 있던 물기가 모두 빠져나가버리기라도 한 듯 퍼석거린다.
작업실을 오픈하던 날, 자명과 함께 뒷산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몸이 퍼석거리고 목이 탔다. 그가 두 손으로 계곡물을 떠다 먹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 고인 물을 핥아먹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자명에게 몇 번이고 계곡물을 먹고 싶다고 투정을 부렸다. 자명은 그런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또 다시 계곡물은 두 손을 모아 떠왔다. 손가락 사이로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난 늘 목이 말라.”
“정에 굶주려서 그럴 거야. 텅 빈 가슴을 다 채우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넌 다른 여자들과 달라. 가슴 속에 늘 불이 타고 있어. 꺼지지 않는 불 말이야. 그래서 늘 목말라하고 있는 거야.”
그의 말처럼 내 가슴에 항상 불이 훨훨 타고 있는지도 모른다. 벽난로처럼 수시로 장작을 던져주어야 하고, 불소시게로 숨구멍을 파 주어야하는 것이다. 자명이 굳이 불을 운운하지 않았어도, 작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사진관에서 허드렛일을 도와주었을 때부터 그 사실을 알았다. 카메라에 찍힌 내 모습은 늘 흐릿했다. 조절나사를 아무리 정교하게 맞춘다 해도 사진은 타버린 것처럼 뿌옇게 나왔다. 처음에는 카메라에 이상이 생겼거니 했다. 하지만 전문 사진작가의 대형카메라로 찍어봤을 때 여전히 뿌옇게 나왔다.
처음부터 그렇게 목말라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핏덩이를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 때까지는 작은 아버지를 친부로 알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의 싸늘한 눈빛을 두려워했으면서도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네 아이들의 따돌림으로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가족이란 소속감에서 떨려 나간다는 게 몹시 두려웠다. 그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몹시 목이 마르고 몸 안에 뭔가가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명과도 목이 마르도록 갈증 나는 관계로 변해갔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우리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 집이란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기 전이며, 어머니와 신접 살림을 하 무렵이었다.
이라크 건설 현장에 가있던 자명의 친부가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자, 아버지는 자명을 양자로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다. 자명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누구하나 자명을 키우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없이 태어난 나, 아버지가 없는 그는 남매처럼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전문 포토그래프였다. 바그다드로 떠나기 얼마 전까지 잡지사 사진을 찍었지만 생활이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의 사진 만큼은 다른 작가들과 다른 변별력을 갖고 있었다. 탈방에 자명의 작품이 한 점 걸려있다. 여성 모델이 얇은 속옷을 걸친 채 바위 위에 모로 누워 있는 작품이다. 사실에 가까울 만큼 선명하게 컷을 잡은 것은 아니며, 흐르는 물과 바위 그리고 중심인물 모두 같은 색감이라서,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명은 자신이 하고 있는 사진 작업을 어떤 형식의 틀에 끼워 넣으려 하지 않았다. 나와는 전혀 다른 작업인 셈이었다. 내가 하는 작업은 탈을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일이었다. 그 어디에도 흔적이 남아 있지 않는 세 개의 탈을 재발견해서 현존해 있는 탈과 함께 나란히 전시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문화재 복원과 창작은 엄연히 다르지만 유실 된 것을 재조명 한다는 의미에서는 창작과 다름없는 예술인 것이었다.
그가 세계의 탈 전시회 티켓을 구했다고 해서 서울에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가 탈에 대해 전문적인 관심을 보인 것은 무척 놀라운 변화였다. 그 중에서도 일본 탈에 대해 매우 관심을 보였다. 인사동에 있는 작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세계의 탈 전시회였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그날 자명은 중형 카메라를 매고 왔다. 소형 35밀리 카메라가 훨씬 편리할 텐데 습관처럼 중형 카메라를 들고 온 것이다. 자명은 일본 탈이 전시되어 있는 코너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일본 탈에 관심이 많아진 것 같아. 그러고 보니 탈 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문화까지도 말이야.”
“지리적,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이 긴밀하게 얽혀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일본에 출장을 갔을 때, 일본문화 속에서 한국의 뿌리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도 모르게 일본 문화에 서서히 빠져들었어. 여기 이 사진을 좀 봐. 어쩌면 코가 이토록 해학적이니? 세상에 이렇게 큰 코를 가진 사람은 없을 거야.”
그가 보고 있는 탈은 코가 엄청 큰 사내의 탈이었다. 불쑥 솟아 있는 코는 강한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듯했다.
“한국의 탈만 예술적 조형미가 나타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일본 탈도 섬뜩하면서도 해학적인 요소와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거야.”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내 생각을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객관적 입장에서 봐도 하회탈은 정말 우수해. 몹시 해학적이기도 하고. 하회탈을 이해하려면 관상학적 정보가 필요해. 당시의 신분적 특성도 알아야하고. 하회탈은 양반과 평민은 물론 하층민까지 모두 하나가 되는 신분을 초월한 특수 문화였거든.”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이럴 때 보면 무슨 학술 발표회라도 나온 사람들 같아.”
“자기 문화에만 너무 빠져 있는 것 같아. 내가 하는 일은 시큰둥해 하고.”
“해인이가 너무 탈에 빠져 있으니까 그렇지?”
토라진 자명은 얼굴을 옆으로 휙 돌렸다.

 <이경 장편소설 『 탈 』는 불교공뉴스 창간기념 작품으로 2012년 봄날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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