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판소리 유파는 동편제(東便制)와 서편제(西便制), 그리고 중고제(中高制)로 나뉜다. 그중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발전된 것이 중고제이다. 중고제의 시조가 바로 염계달이다.

염계달은 조선후기 8명창중의 한 사람이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고 소리공부를 위해 충주로 가던중 장끼전을 줍게 되어 충북 음성에 있는 벽절(가섭사추정, 벽암이 중건)이라는 가섭산으로 들어가 10여년간 공부 끝에 득음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염계달은 밤에 소리를 연습할 때면 졸음을 쫓기 위해서 상투에 끈을 연결해 천장에 매달아서 잠을 깨우며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런 정진 끝에 춘향가와 흥부가의 연마는 물론 장끼전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득음(得音)을 이루었다.

음성 벽절에서 공부를 마친 염계달이 세상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으나 입고 나설 옷이 없어 고민하던 어느 날 법당에 거물급 손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보가중에서 가난타령을 불렀는데 그 처절하고 슬픈 소리가 절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져 불공을 마친 부인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그 부인은 충주부사의 수청 기생 ‘보영’이었는데 염계달의 딱한 사정을 듣고 옷과 돈 20냥을 내 놓았으며 며칠 후 충주관아에서 소리를 할 수 있도록 주선까지 해주었다. 거기서 염계달은 장끼전을 불렀고 뒷날 염계달은 헌종의 총애를 입어 동지벼슬을 제수 받고 어전 광대가 된다.

한때 벽절의 위치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여주에 위치한 신륵사가 예로부터 벽절이라 불렸기에 염계달이 득음한 장소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신륵사의 명칭이 벽절일수 있으나 염계달이 득음한 벽절의 장소는 조선창극사를 보더라도 음성 벽절이라 기재되어있고 또한 그의 행적을 볼 때 집에서 가까운 여주라면 10여년이나 귀거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충주관기 보영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유례를 보더라도 교통이 불편했던 시기를 생각한다면 명칭의 유사함으로 인한 근거없는 주장 일뿐이다. 가섭산에 위치한 가섭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벽암이 중건해 조선후기부터 벽절이라 불리기도 했다.

충북 음성 가섭산에는 공민왕시기 나옹(懶翁)이 창건한 가섭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을 벽암(碧巖)이 중건하여 벽절이라 불리웠고 일제강점기에는 응진암(應眞庵)이라 불렀다. 일원에는 염씨 집성촌이 위치하고 있다.

이렇듯 여주·이천과 충주·제천의 월악산을 잇는 엣 음성 생극과 충주 주덕읍·신니면으로 오르던 음성 가섭산 봉화터길은 군부대 형성으로 인해 가로막혀있으나 이제 문화로 벽을 허물어 통합을 이끌어 내야하는 중요 문화요충지이다. 이러한 문제에 다소 미온적인 음성군과 음성군의회의 적극적인 열정과 참여가 있어야한다.

가섭산의 막연히 오르는 길 걷는 길이 아닌 잊혀진 옛길에 염계달이라는 역사와 문화라는 풍류의 근사한 생명을 불어넣어 생극 국악동요학교등과 연계한 악가무 전통 연희단의 신설 및 영입은 지역을 알리는 좋은 문화관광 자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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