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또다시 잃어버린 탈

해인은 봉예와 병수가 올라올 때까지 계곡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달리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얼마 후, 봉예와 병수가 올라왔다. 그리고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탈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탈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허탈하기만 했다. 해인은 문득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명도 사라지고, 복원한 세 개의 탈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탈만 가지고 내려가자. 병수씨, 나머지 짐은 부탁해.”
갑자기 봉예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거니?”
“오빠의 카메라가 발견되었어요.”
“그 사람의 카메라가?”
“오빠의 것이라고 추정된 손가락과 카메라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뭐라고? 그럼 그가 죽었단 말이야.”
상상이 가지 않았다. 발견된 필름이 훼손되지 않아서 자명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손가락은 보관되어 있으며, 카메라와 필름은 유가족에게 전달될 거라고 했다.

아, 끝 간 데 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의 얼굴, 그의 머리카락, 그의 팔과 다리, 그 모든 것들이 모래무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온종일 라디오는 저 홀로 돌아갔다. 해인은 동굴에서 내려온 후, 탈방에 틀어 박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누워있다. 그때였다. 남자 성우가 전쟁 통에서 발견된 편지를 한 통 읽어주는 것이었다.

어머니,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어버렸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귓속에는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니,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죽음을 기다리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니,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물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저는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내가 빨아 입은 내복을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왜 壽衣(수의)를 생각해냈는지는 모릅니다.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 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켜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포항 전투에서 전사한 학도병 이우근 호주머니에서 나온 편지라고 했다.
해인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학도병의 편지를 듣고 몹시 떨었다.
포항전투가 끝난 후 여군 장교가 전장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병사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편지였던 것이다.

며칠이 또 지나갔다. 한반도에 휴전협정이라는 말이 오고갔다. 한반도는 온통 폐허가 되었고,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들의 울부짖음과 전쟁 중에 폭격으로 팔 다리가 달려 나가고, 마음의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남쪽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안동하회마을은 전쟁의 피해가 전혀 없었다. 해인의 작업실이 있던 갈전마을도 그랬다. 미리 걱정되어 부산으로 피난을 가는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농사짓고 살았다.
강기자가 자명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여전히 생사를 알 수가 없었다.

해인은 몸은 갈수록 탈진 상태에 빠져들었다. 움푹 꺼진 두 눈은 마르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젠 목이 쉬어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별게 아니었다.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과 살기 위해 음식을 넘기고 잠을 자야 한다는 건, 그녀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바싹 타들어갔다. 작업실 한쪽에서 탈을 다듬고 있는 봉예의 얼굴 위로 뽀얀 분진이 날렸다. 해인은 좀처럼 탈을 다듬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지나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갔다는 보도가 날아들었다. 라디오에서는 국민을 안정시키는 음악과 힘찬 성우의 목소리가 날마다 쏟아졌다. 해인은 전화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전혀 이상이 없었다. 자명의 누나가 전화를 하겠다는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한 가닥 희망을 거는 것은, 타다만 그의 손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단지 그의 카메라와 손가락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그의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해인은 작업대로 다가가 탈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각시탈을 꺼내들고 거친 부분을 갈아냈다. 뽀얀 오리나무의 속살이 드러났다. 봉예는 그 위에 칠을 하려고 옻 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옻칠도 나뭇결과 탈의 미소의 흐름에 맞춰 칠을 해야 했다.

‘그래, 다시 일을 하자. 전쟁 한가운데 서 있는 자명을 생각하며 남아 있는 탈에 혼을 심도록 하자.’
해인은 붓을 손질하기 위해 잘 보관해두었던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꺼냈다. 붓은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으로 사용하면 색이 골고루 먹혔다. 해인의 옻칠 붓을 여자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 쓰면 좋다. 해인의 어머니가 오래전에 자른 머리카락을 보내온 것이다. 해인은 어머니의 머리카락을 펼쳐보는 동안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한다고 여겼다. 생모의 머리카락을 잘 씻어 그늘에 말려둔 것을 10센티미터 크기로 잘라 붓대 사이에 키웠더니 꼭 맞아 떨어졌다.
사람의 얼굴 위에 분칠을 하듯 붓을 놀렸다. 어머니의 머리카락 붓으로 옻칠하는 방법은 같았다. 처음부터 옻의 양을 많이 바르다 보면 뭉치고 들떠버린다. 붓에 옻을 소량을 먹인 다음 여러 번에 나누어 칠을 해야 했다.

 

옻나무는 강한 독성을 갖고 있는데, 천연 방부제와 살충제 효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옻칠을 한 문화재는 수천 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다. 탈도 마찬가지였다. 우루시올이라는 성분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지금껏 보관 되고 있는 것이다.
해인이 사용하는 옻은 갈전마을에서 채취한 생칠이며, 약초와 안료를 섞어 썼다. 원래는 원주산 옻이 유명한데, 전쟁 중이라서 새로 구입할 수는 없고, 예전이 구입해둔 옻을 사용할 셈이다.
옻의 중요한 성분인 우루시올이 갈전마을 우수했다. 국산 옻은 강한 독성을 갖고 있으며, 방부성이 뛰어났다. 해인이 국내산 옻을 고집하게 된 것도 모두 이런 요소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해 채취한 생칠은 막걸리 색을 띠었는데, 그곳에 경면주사를 넣으면 붉은색을 띠며, 녹이 슬지 않은 못을 담가두면 검은색으로 변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분채나 석채를 옻물에 섞거나, 화학 물감을 섞어 나름대로 색을 만들어 썼다.

옻칠에서 초벌칠은 아무래도 병충해 피해를 막는 데 효과적이다. 봉예의 손놀림도 이젠 제법 능숙했다. 곱게 옻칠이 먹지 않은 부위는 표면을 갈아낸 뒤 한지를 입혔다. 그 다음의 공정은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손끝 감각으로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색을 입힐 차례였다. 해인은 물감 통을 하나 꺼내 들었다. 탈에 안료를 입힐 때는 옻칠할 때보다 더욱 신중해야 했다. 한지에 물감이 얼룩지지 않게 하려면 적당한 양의 물감을 따로 그릇에 담아 풀어 두었다가 사용하는데, 붓에 물감을 듬뿍 적시면 양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썼다.
물감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면 수건으로 붓을 닦아냈다. 한꺼번에 색을 많이 먹이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색을 입혔다.
탈마다 색이 잘 입혀졌다. 미세하게 손끝이 흔들렸기에 색이 얼룩질 것 같아 염려가 되었는데 일단 순조로웠다.

탈마다에 입혀진 안료의 색이 제각기 달랐다. 각시탈과 부네탈은 뽀얀 흰색을 띠었고, 선비탈, 중탈, 백정탈, 할미탈, 초랭이탈, 이매탈은 은은한 암자색을 나타냈다. 양반탈과 선비탈은 붉은 빛이 도는 주홍빛이 났다. 대부분 안료는 들이나 산에 있는 풀과 약초를 채취해서 만든 것이라서 깊고 자연스러운 색을 띠고 있었다.
그 다음 작업으로 옻칠을 두 번 더 칠해야 했다. 광택제를 바른 탈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번들거리는 탈의 얼굴에서는 섬세한 감정표현을 찾기 힘들기 때문에 무광기법을 선택했다.
탈에 색을 입히는 작업은 붓 칠 횟수에 따라 색의 농도가 달라졌다. 붓질 방향에 따라 탈의 미소와 주름살이 다른 형태를 보이기 때문에 매번 할 때마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색이 엷어져야 할 부분과 짙게 나타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처음에는 매끈하게 기계로 분사한 것처럼 색을 입히는 게 좋은 줄 알았다. 그런데 골고루 색이 입혀지면서도 음각이 잘 나타나는 채색법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손목에 힘을 빼야 했다. 손목에 힘이 많이 들어가면 안료가 뭉쳤다. 손목에 힘을 빼고 아기의 살결을 어루만지듯 칠했더니 색이 말갛게 되살아났다.

더러는 콩을 찧어 자루에 담아낸 것을 칠하기도 하고, 황토를 풀어 칠하기도 했다. 치자 물감에 약초를 희석해서 칠하는 방법도 있는데, 그것은 벌레의 침입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색의 깊이가 느껴지지만 보관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 다음 작업으로 옻칠을 두 번 더 했다. 끝으로 칠이 묻어 있는 뒤쪽을 마무리한 다음, 턱이 분리된 탈은 턱을 달고 귀 끈과 보자기를 달았다. 말갛게 색을 뒤집어 쓴 탈이 몹시 위압적으로 보였다.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창밖은 이미 검푸르게 변했다.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조차 이젠 힘겨웠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강 기자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눈이 따갑고 피곤이 몰려왔다. 잃어버린 세 개의 탈을 새로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비슷하게 흉내 낼지는 몰라도 똑같이 조각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세 개의 탈이 계곡에 빠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해인은 아랫배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느꼈다. 설핏 뭔가가 꿈틀거렸다는 예감, 바닷가 몽돌이 부딪치는 소리 같은 게 들려왔던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달거리를 하지 않은 게 꽤나 오래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깊게 숨을 몰아쉬고, 창문에 기대고 섰다. 활짝 열린 창으로 들어서는 공기가 몹시 차가웠다. 얼룩진 유리창에 비친 얼굴은 물기조차 말라버린 듯 부스스했다.
그녀의 볼이 훅 달아올랐다. 서둘러 달거리를 살펴봤다. 아뿔싸! 그녀의 몸 안에 생명이 자라고 있었단 말인가.
“어머니!”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온 첫마디가 어머니라는 단어였다. 어머니가 너무나 그리웠다.

‘아, 잿빛 구름 받아 내려서 흐르고 있는 작은 개울물소리가 누구의 소리인지 알고 있니? 하얀 포말이 둥둥 떠내려가다가 돌부리에 부딪쳐 쏴 하고 흩어지는 물방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는 이미 알고 있었구나! 아가야! 너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내게로 온 거구나!’
생명의 꿈틀거림이 점점 커졌다. 태아가 해인의 말의 뜻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발길 짓을 했다. 태동이 분명했다. 어머니가 그녀를 가졌던 그 순간도 이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해인은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단 생각이 물밀듯이 몰아쳤다.

그때였다. 전화가 울렸다.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아, 강 기자의 음성이었다. 강기자의 굵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멎어버리는 듯했다.
“강 기자입니다. 기쁜 소식이 있어요. 그건 자명이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동양인의 것이 아니라 흑인이었어요. 아마 누군가에게 카메라를 빼앗긴 게 틀림없어요. 평양 외곽 지역에 있는 병원에 동양인 환자 네 명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아직 정확하게 신원을 알 수는 없어요. 아직 그 지역은 통제되는 곳이라서요. 내일 그곳으로 가서 확인한 다음 전화할 게요.”
“그 사람이 살아만 있다면 더 무엇을 바라겠어요.”
“그가 쉽게 세상을 버릴 사람인가요? 힘들어도 조금만 기다리세요. 통신 장비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아 전화하는 게 어려워요.”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다가, 작업대 위에 건조시키고 있는 아홉 개의 탈을 바라보았다.

해인은 창문을 활짝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은 검고 부드러웠다. 천천히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아무도 몰래 생명의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뭔가 가득 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가슴 가득 퍼졌다.
그녀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작업대 의자에 앉았다. 탈마다 제각기 알맞은 턱을 달고, 귀 끈을 묶은 뒤 보자기를 달았다.
멀리 광대의 춤사위가 나비처럼 너울댔다. 한껏 신명을 풀어헤쳐보고 싶은 광대들의 외침도 사방에서 들려왔다. 밀치고, 싸우고, 죽고, 태어나고, 웃고, 우는 그런 탈 마당을 벌일 셈이었다.

 

달강달강 왈강왈강
워리달강
한양 가서 밤을 한 되
얻어다가
독안에다 넣었더니
머리 까문 새양쥐가
들랑달랑 다 까먹고
한쪼가리 남았구나
번이길랑 할아비주고
뼈다귀랑 아비주고
정살일랑
너캉 내캉 노나먹자.

오리나무의 웃음, 아버지의 환한 웃음일 수도 있는 탈이 원을 그려가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순간, 붉게 익은 석류가 놓인 테이블 위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어댔다. 꿈틀거림, 배를 움켜쥐자. 손가락 사이로 온기가 느껴졌다.
수화기를 들자. 잠시 기다리라는 안내양의 음성이 짧게 이어졌다.
“여보세요?”
“후후!”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 안으로 밀려들었다. 이어 쏴! 하고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수화기를 귀에 바짝 들이댔다. 무섭도록 차가운 전율이 온몸 가득 퍼졌다.
“해인아!”
자명의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녀의 자궁 안에서 싹을 틔우고 있는 생명의 소리였던 것도 같았다. 생명의 소리를 좇아 그가 왔다는 생각이 든 찰나, 테이블 위에 놓인 잘 익은 석류가 먹고 싶었다.
손을 뻗어 석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석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내 목소리 들리니?”
아, 그가 돌아온 게 분명했다.

해인은 붉은 씨 한 톨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의 아픔들이 빼꼭히 들어차 있던 석류를 우적거리고 씹었다. 그리고 모든 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해인은 금방 알아챘다.
“오빠! 오빠 맞지?” (끝) 
 
*이경의 장편소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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