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가 오거들랑 연꽃 따서 덮어주고

 

[불교공뉴스-문화] 가랑비가 오거들랑 연꽃 따서 덮어주고

그때 어디선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웅얼거리는 소리라기보다는 누군가 그녀의 귓가에다 대고 낮은 음성으로 조근거리는 듯했다.
‘핏물이 목구멍에서 치고 올라와. 그런데도 아무런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 난 이미 할 일을 다 했어. 아, 가슴이 갑갑해.’
저 당방울 소리. 도대체 저 소리는 무슨 의미의 소리일까? 그녀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답답 내 신세야
이구 답답 내 팔자야
돈이 그리워 죽었거든 돈을 보고 일어나소
임이 그리워 죽었거든 나를 보고 일어나소
돈도 임도 다 싫고 북망산천이나 가고 싶어
앞산에도 묻지 말고 뒷산에도 묻지 마라
연당이라 한가운데 이내 몸이나 묻어주소
가랑비가 오거들랑 연꽃 따서 덮어주고
굵은 비가 오거들랑 연밥 따서 덮어주소
장대비가 오거들랑 연잎 따서 덮어주소.

달빛이 동굴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뭇가지 그림자가 동굴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었다. 도깨비 서너 마리가 엉켜들며 안으로 몰려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와글와글! 점점 괴기한 웃음소리까지 들려왔다. 해인은 허깨비가 보이기 시작하자, 눈을 꼭 감고 한동안 앉아있었다. 마음의 중심이 흔들리는 현상이었던 것이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동굴 밖 산등성이마다 달빛이 내려앉고 있을 뿐 바람 한 점 없었다. 해인은 조각도를 내려놓고 미완성인 총각탈을 들여다봤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빛. 눈가에 물기가 아른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점점 귓가에 당방울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휴!’
그 소리는 총각탈이 내 뿜는 숨소리가 분명했다. 총각탈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해인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총각탈의 얼굴에 미소가 설핏 돌았다. 분명 총각탈이 살아 움직였다. 그녀는 몹시 흥분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 겪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해인은 얼마동안 동굴 안을 서성거렸다. 총각탈을 완성하기 위해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총각턱을 분리한다면 힘이 넘치는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 될 것 같았고, 분리시키지 않는다면 얼굴형의 균형이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단숨에 톱을 들어 찰나에 턱을 도려내 버릴까도 싶었다. 손끝이 와들와들 떨었다. 턱을 분리하기에 앞서 먼저 양볼 하단에 두 개의 구멍을 뚫었다. 일단 턱을 분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작은 톱날이 오리나무와 맞물리자 천천히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다. 톱날 뒤꽁무니에서 톱밥이 툭 툭 튕겨져 나왔다. 소복하게 쌓인 톱밥을 손으로 쓸어냈다. 당당한 젊은이의 미소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작업을 서둘렀다. 톱을 쥐고 있던 손바닥은 땀으로 끈적거렸다. 그때였다.

 

“선생님, 어디 계세요?”
동굴 안을 향해 누군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동굴 입구에 친 금줄 너머로 봉예와 병수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봉예아! 어찌 된 일이야?
“.금줄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올라왔어요. 저기요? 큰일났어요. 자명오빠가 행방불명이래요”
“납치라도 당했다는 말이야.”
들고 있던 톱을 내동댕이친 해인은 서둘러 금줄을 걷어버렸다.
“진정하세요.”
그리고는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봉예는 그동안의 소식을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명은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전세가 최악의 상태로 빠져들면서 팀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중공군이 대거 평양으로 진격을 가하는 바람에 모든 통신 수단이 끊어지고, 자명의 행방도 묘연해졌다는 것이다.

 

평양 접경지역으로 가는 교통편은 이미 끊긴 뒤라고 했다. 경로를 우회해서 평양 근처까지 들어간다 해도 자명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곳은 무법천지가 되어버렸다.
“빨리 내려가. 혹여 강 기자에게 전보라도 오면 빨리 연락해줘. 내일 오전 짐 정리한 후 산을 내려갈게. 오후에 짐을 가지러 올라와. 강기자님 소식은 있니?”
“강기자님은 개성에 있나봐요.”
봉예와 병수는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지 통신이 두절된 것인지, 아니면 사진을 찍겠다고 욕심을 부리다 잡혀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동굴입구 금줄을 걷어낸 탓인지 조금 전 탈을 깎았던 기운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해인은 더 이상 탈을 깎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예가 두고 간 신문에는 유엔군의 가세해 곧 아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그녀가 자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속만 태우는 게 고작이었다.
해인은 동굴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기운이 옷섶으로 파고들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듯 이마에서 약간의 미열마저 느껴졌다. 숄을 어깨에 두르고 바위에 기대고 섰다. 꽉 차오른 달이 하늘에 둥실 떠올랐다. 달이 너무 밝아 산 아래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모든 게 고요했다.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는 벌써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버렸다. 전세가 그만큼 급변했던 것이다. 유엔군의 합류로 아군이 북쪽으로 전세를 몰아갔고, 한반도는 다시 하나가 될 거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공군이 북측을 지원을 하기 시작해, 전세가 아래로 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줄을 걷어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은 허도령의 손이라도 되어버린 듯 조각칼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다시 그런 감정에 몰입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해인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평생을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군가와 나누어 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사는 게 참 고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욕심 내지 않을 거야.”

 

몇 번이고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가슴에 차 있던 집착이 만들어낸 욕심일 수도 있었다. 그녀 안에 부유물처럼 떠올라 있는 집착을 걷어내야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기온이 점점 뚝뚝 떨어졌다. 오한이 나고 구토 증세까지 일어났다. 며칠째 먹은 게 없어서 물만 토했다. 뜨거운 녹차를 달여 마시자,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인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도구를 끌어 모았다. 그만 정리를 해야 할 듯싶었다.

달빛을 끌어 모아

해인의 손끝이 미세하게 저려왔다. 깍지를 끼고 반복해서 손마디를 풀었다. 잠시 탈위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시선을 옮겨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동굴 속이 아니었다. 그녀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마당 넓은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회마을에서 봤던 허름한 고택이었다. 곳곳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어서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물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손에는 탈이 들려 있었는데, 처음 보는 탈이었지만 낯이 익었다. 사내가 탈을 쓰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검은 한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섬뜩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탈은 사내의 얼굴에 꼭 맞는지 흔들거리지 않았다. 어깨의 들썩거림, 허공을 향해 휘젓는 팔의 동작은 예사롭지 않았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다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넘쳤다. 점점 사내의 동작이 빨라졌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흩어진 달빛을 끌어 모아 탈을 깎아라!’

 

그녀는 누가 시키기라도 하는 듯 주섬주섬 옆에 있던 칼과 나무망치를 집어 들고 탈을 깎기 시작했다. 사내는 여전히 춤을 추었다. 그 탈의 모양이 하나하나씩 옮겨졌다. 볼과 이마, 그리고 눈썹까지도 새겨 넣었다. 그 사내가 쓰고 있는 탈은 턱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꽉 다문 입술은 얇지 않고 두툼했으며,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는 듯 입가에는 주름을 몇 가닥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까지 잘 견뎌냈구나. 삶이란 구름 한 점 일어남과 같으며, 죽음이란 구름 한 점 흩어짐과 같구나!”
“아, 당신은 누구세요?”
“바로 너의 간절한 그리움이 만든 사람이제.”
“그럼 아버지세요?”
“그렇구먼.”
돌연, 사내가 돌아서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화촉병풍 좌우에
드러스고
아종배종 객지블라
자기한몸 반갑이면
칠덕칠덕 원앙금침
잡기전에
내리내리 놓여있고
샛별같은 논여광택
발치마다 늘어스고.

어깨의 들썩임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형체가 흐릿해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백사장 모래밭에 고여 있던 물이 빠지듯 사내의 몸도 빠져나가고 없었다. 그녀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꿈이었다. 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조각도를 들었다. 아버지가 쓰고 있던 탈을 떠올려봤다.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잔상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평소에 상상했던 총각탈 모습과 흡사했다. 턱이 분리되지 않은 젊은 사내였으며, 입가에 주름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넒은 이마와 오롯하게 선 콧등이 반듯하게 알파벳 티자 형을 이루고 있었다. 오른쪽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어 있던 칼을 장지로 지긋하게 눌렀다. 왼쪽 손등으로 오른손을 받쳐 들었다. 깊지 않은 주름을 파내려갔다. 코의 기울기와 눈의 간격을 몇 번이고 재어가며, 처진 눈꼬리와 볼의 각도를 연결시켰다.
그 찰나, 왼쪽 검지 위에 날이 퍼런 조각도가 휙 스쳤다. 무척 따가웠다. 상처가 깊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해인은 한숨이 나왔다. 붉은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더니 탈위로 뚝뚝 떨어졌다. 핏방울이 동글동글하게 오리나무에 맺혀졌다. 칼날을 날카롭게 갈아 두었기에 조금만 엇나가도 손을 다칠 수 있었다. 손가락을 지압한 다음 붕대로 칭칭 동여맸다.

꿈속에 환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그 탈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다친 손가락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서두르면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스승의 말이 퍼뜩 떠올랐다.
탈의 완성을 앞두고 피를 보았으니 혹시라도 부정을 탄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작업을 하다보면 조각도에 손을 베는 일은 허다했다. 탈 위에 한지를 붙이고 옻칠을 입히다 보면 혈흔이 보이지 않을 테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총각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웃고 있었다. 그러더니 해인의 친부 얼굴과 겹쳐졌다.

‘이 탈은 총각탈이자, 아버지의 얼굴일 수도 있어. 억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 믿어.’
사실 그렇게 믿고 싶은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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