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양대꽃이 만발한 그곳

밤이 깊어갔다. 낮부터 켜놓은 화로의 열기가 퍼져 동굴 안은 따뜻했다. 점차 동굴 생활에 적응된 탓도 있어서인지 기운이 날마다 달라졌다. 달빛이 동굴 속으로 차고 들었고, 머릿속은 양반과 선비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 탈 마당에서는 인간의 탐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양지와 음지이며, 선과 악이 교차하는 사람의 이면의 얼굴을 체험할 수 있는 마당인 것이다. 그런 탓에 양반과 선비마당에선 두 가지의 미소가 번갈아가며 관중을 사로잡았다. 광대가 똑바로 쓰고 있는 탈은 주름이 휘감은 얼굴에 함빡 미소를 지었다. 이 모습은 의식화 된 표정을 상징했다. 하지만 땅에 뚝 떨어져 훌러덩 뒤집혀진 탈의 미소는 공포와 슬픔으로 가득하여 미소가 사라지고 없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 고통이 배어 있는 가면인 것이다.

바로 쓰고 있는 자의 가면은 삶, 가식, 탐욕, 빛을 상징하지만, 뒤집혀진 탈의 뒷모습은 죽음, 허탈, 어둠을 나타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가지의 미소를 수시로 바꾸어 가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미소가 담긴 탈········.’

그녀는 그 탈 마당에 갇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양반이 부채를 들고 정자관을 쓰고 거만하게 여덟팔자 황새걸음으로 나타났다. 선비는 유건을 쓰고 모산대를 쥐고 양반 뒤를 따랐다. 부네가 선비 뒤를 따라 나오면서 선비에게 바짝 다가섰다. 이젠 마당 가득 탈을 쓴 광대들이 모여 한바탕 어우러졌다.
이어 양반과 선비가 부네를 차지하려고 싸우다 결국 자신들의 학식과 신분 싸움으로 번지고 있엇다. 양반이 나타나 선비를 가로 막고 서서 부네를 보호하겠다고 자청했다.

“허허, 국추단풍에 지체 후 만강하옵시며, 보동댁이 감환이 들어 자동양반 문안드리오. 그곳이 하도 험악하와 보호차로 왔나이다. 수목은 울창하고 양대꽃이 만발하니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백혈을 토하고 죽어가기에 보호라도 하려고 왔나이다.”

양반이 물러나지 않고 부네의 울창한 숲, 양대꽃이 반발한 그 곳을 지키겠다고 핏대를 세웠다.
부네의 울창한 숲, 양대꽃이 반발한 그곳은 탄생의 근원지요, 탐욕의 시발인 셈이기도 했다. 양반과 선비가 앞 다투어 양대꽃 밭에 씨앗을 뿌려야 한다며 걸진 입담으로 한판승부를 걸었다.

홍기홍기 접접홍기
백옥비단 깃을달고
무자한자 고름달고
뒷집이라 놀러가니
후여훠이
군장밑에 화초밭도
잘뜯어 시집가고
앞집이라 놀러가니
앞밭에 채소밭도
날떨어 시집가고
후여훠이.

작은 아버지 이갑수에게서 벗어난 해인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눈앞이 캄캄했다. 혼자 살아가야할 일들이 겁이 났다. 자명이 있는 서울로 향하고 있었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빈 몸뚱이로 도망치듯 나왔던 것이다. 마음 좋은 트럭 운전사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서울에 도착했고, 자명이 있는 작업실에 도착했을 땐 새벽녘이었다.

작업실 안은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해인이 문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자명이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왔다.

“해인아!”
“내가 올 거라는 거 이미 알았어?”
“응. 이갑수 사장의 연락을 받았어. 어떻게 된 일이야.”
“작은 아버지가 김사장 아들과 강제로 혼인을 시키려고 안달이야. 아버지가 남겨놓았다는 그 땅을 얼마 전 내 앞으로 명의 변경 해놨거든. 병수 아버지가 많이 아프다고 해서 갑자기 옮겼던 거야.”
“그랬었구나! 앞으로 어쩔 셈이니?”
“몰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도망쳤어.”
그때 해인은 자명의 흔들리는 눈빛을 발견했다.
“오빠가 아직 힘이 없다는 거 알아. 이제 더 이상 작은아버지 하수인 노릇 하며 살진 않을 거야.”
“그럼 대학은?”
“그만 둘 생각이야. 교수님께 전화 드리고 사정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야. 그리고 서울 공방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추천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봐야지.”
“그러자, 이제부터는 함께 지내도록하자.”

울창한 숲, 과연 그 양대밭에 꽃은 피었던가. 이 무슨 음탕한 생각이란 말인가. 그녀의 젖꼭지가 오롯이 섰다. 몸피마다 반응이 일어나더니 현기증이 일어났다. 참을 수 없는 욕정이 목울대를 가로질러 올라왔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누웠다.

해인이 공방 견습생으로 가기 전까지 자명의 작업실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그때 해인의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작은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명의 작업실은 열 평 남짓한 지하방이었다. 한쪽 구석에 초록 군용침상을 들여와 해인의 잠자리를 마련했다. 빈 몸으로 도망친 해인은 갈아입을 옷마저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포가 날아들었다. 마침 자명이 취재차 출장을 간 사이였기에 해인이 소포를 풀었다. 그런데 그 소포는 다름 아닌 해인에게 보내진 옷가지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이갑수가 보낸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자명이 너의 속달편지 잘 받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가 어떻게 대학을 마칠 수 있었는가를 뼛속깊이 되새겨라. 안동 사진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준 은혜, 그리고 대학을 보내준 것 모두 말이다. 해인이 마음 돌릴 수 있도록 협조해라. 언감생심 좋아한다느니 말이 되냐. 꿈도 꾸지 마라.

넌, 해인의 아비 이재선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말하지 않은 대가로 이제껏 호강하며 살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라. 해인이의 남편감으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한 달 안에 해인이를 안동으로 내려 보내도록 해라. 그때까지 내려 보내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편지를 모두 읽은 해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편지 내용으로 친부의 죽음에 자명도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무른 척한 대가로 대학을 나올 수 있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런 그를 그녀는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자명이 낯설게 느껴졌다.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길로 해인은 자명의 작업실을 나왔다. 자명과의 이별이 또 다시 시작된 것이다.

종짓불이 너울대고

동굴 밖 어디에선가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누가 올라온 것일까? 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바로 스승과 봉예가 동굴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해인이 동굴에서 보낸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3일째 되는 날, 몸주를 모시는 의식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스승님 오셨어요?”
“며칠 전부터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네게 뭔 일이 생겼나 싶어 한달음에 왔제. 그리고 3일재 되는 날, 신탁을 받는 의식을 하기로 했다제?”
“네,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목숨 줄 끊어질 날이 오늘 내일 하제. 여기까지 오면서 봉예 양한테 대충 얘기 들었다. 우짜겠노, 세상 일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기라. 이번 참에 니도 마음 꽉 잡아묵고 강신 받아서 탈을 깎으면 안 되겠나?”
스승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네, 그럴게요.”
“마침, 오늘 밤이 길일이고 해서, 이미 준비를 해왔느니, 축시 기도를 올리도록 하제. 알겠으면 어서 몸을 정갈히 하고 준비를 하그라.”
봉예와 그녀는 가방에서 제찬과 제구를 꺼내기 시작했다. 명태와 쌀, 밤, 대추, 곶감, 술을 정성스럽게 차려놓고 종지에 참기름을 붓고 심지를 달아 불을 밝혔다. 그리고 모두들 축시가 되길 기다렸다.
“제찬이 부족하지만 마음의 정성이면 그만이제. 생물을 써야 하지만 나리 통이라서 더는 장만하지 못했구먼.”

스승은 축시가 신이 잘 지피는 시간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도 축시 일각丑時 一刻에 시작하는 게 좋다고 하였는데, 새벽 1시 15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고요하고 그윽한 시간대에 신神이 거동한다고 생각했다.
축시가 되자, 스승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해인을 제대 앞에 앉도록 했다. 그리고 초를 켜고 향을 지펴 그 연기를 타고 신이 내리도록 기다렸다.

“의식은 간소하게 하그라. 순서대로 하믄, 참신, 초헌, 독측, 아헌, 종헌, 유식, 합문이 있제. 모든 의식은 마음속 깊이 담아 두그라. 모든 제는 정성이 최고제.”
스승은 술을 술잔에 차지 않도록 조금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 잔을 들고 미리 마련한 모사 그릇에 3번으로 나누어 부은 뒤, 빈 잔을 스승에게 돌려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2번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술잔을 받아 든 스승도 제대에 그것을 올리고 두 손을 합장하고 자리에 앉았다. 스승은 곧 육십갑자 해원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 경을 읽고 있는 스승의 목소리가 동굴 가득 차는가 싶더니, 그녀의 머리 정수리 끝으로 몰려들었다.

“하회별신굿 과정에는 강신(降神), 오신(娛神), 송신(送神)이 있제. 강신은 서낭당 신내림을 받는 것이고, 영신은 신내림을 받은 신을 마을로 모시는 과정인그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을 평안히 보내는 송신이 있제. 지금 니는 강신을 몸속 가득 받는 기다. 마음 단단히 먹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봐라.”

스승의 말대로 해인은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 몸 안으로 신의 기운이 지펴지길 간절히 기다렸다.
“일월성신님전, 비옵니다. 갑자을축해중금, 병인정묘로중화, 무진기사대림목, 경오신미노방토, 임신계유금봉금, 갑술을해산두화, 병자정축간하수, 무인기묘성두토, 경진신사백락금, 임오계미양류목, 갑신을유정중수, 병술정해옥상토, 무자기축벽력화, 경인신묘송백목, 임신계사장유수, 갑오을미사중금, 병신정유산화화, 무술기해평지목, 경자신축벽상토, 임인계묘급박금, 갑진을사복등화, 병오정미천수화, 무신기유대륙토, 경술신해채천금, 임자계축상자목, 갑인을묘대계수, 병진정사사중토, 무오기미천상화, 경신신유석유목, 임술계해대해인. 이 모든 원혼들이야, 가련하고 불쌍한 적막하기 그지없는 인생입니다. 우리 같은 초로인생 이 세상에 생겨나서 유수 같이 빠른 세월 허송되지 않게 강림하여 굽어 살피소서. 뜻 모르고 무매한 이 제자, 이 제자에게 끌을 잡고 나무 깎는 재주 주사옵고, 뜻 바르고, 중심 바른 정신 건강주옵소서.”

종짓불이 너울대고 타올랐다. 스승은 소지에 불을 붙여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서서히 불타고 있는 소지는 공중을 향해 힘껏 날아올랐다. 후루룩 남은 불까지 모두 꺼져버린 소지는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해인은 합장하고 있던 두 손 위로 올려들고는 천천히 차고 드는 기운을 받아 내렸다. 점점 어깨위로 묵직한 돌덩이가 수십 개쯤 찍어 눌러대기 시작했다. 해인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던 고통이 순식간에 엄습해왔던 것이다.

무겁고 힘든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순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명이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또한 그녀를 괴롭혔던 이갑수와 그의 식구들의 모습이 연속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일렁이는 파도와 같은 영상이었다. 해인은 그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합장을 하고 있던 두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자 이제부터는 마음을 진정하고 몸주를 몸 안에 모셨으니, 새 사람을 살아갈 것이제. 어서 툭툭 털고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것들을 바라보그레이.
백겁천겁 쌓인 죄업(百劫積集罪), 한 생각에 없어져(一念頓蕩盡),마른 풀을 태우듯(如火焚枯草), 남김없이 사라지누나(滅盡無有餘) ......탈을 깎는 동안 마음 깊이 새겨놓그라.
앞으로는 다 네 할 탓이제. 네 마음에 금줄을 친 거나 진배없는 기라. 명심하그라. 절대로 금줄을 넘지 말아야 한데이. 그동안 배운 것들을 차근히 정리해 가면서 마음 굳게 묵고 탈을 깎아 보그라. 내 그만 산을 내려갈란다. 몸조심 하그라.”

스승은 축원을 끝내고 짐을 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해인은 몸이 훨씬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그 무엇도 사라지고 없었으며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마지막으로 제찬을 갱물에 말아 계곡 이곳저곳에 뿌려두었다. 혹여 배고픈 동물들을 위한 방편을 쓰는 행위였다.

“이제부터는 네 몸은 네 것이 아니제. 신에게 오롯이 맡겼으니 경고망동 행동하지 말고, 조용히 참선하면서 탈 깎는 일에 정신토록 하그라.”
“네,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어요.”
스승과 봉예가 산을 내려갈 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열리기 시작했다. 해인은 스승이 내려간 뒤에도 한동안 제대 앞에 앉아 촛불 타는 것을 응시했다.

해인은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동굴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맑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가 보였다. 그곳은 낙엽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을 깨끗이 씻으려고, 맞은편 넓적한 바위로 훌쩍 뛰었다. 순간, 몸이 기우뚱하더니, 첨벙 하고 물속으로 푹 빠져버렸다. 물이끼 때문에 바위가 미끄러웠다. 또한 수심이 깊었다. 서 있는데도 가슴까지 물이 차올랐다.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오히려 안으로 밀려들었다.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두 다리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겨우 다리를 버둥거리자, 물속에 가라앉아 있던 낙엽이 몸에 착착 감겨들었다. 해인은 팔을 힘껏 뻗어 가장자리에 있던 나뭇가지를 잡아당길 수 있었다. 그것을 붙잡고 발을 천천히 움직였다. 쌓여 있던 나뭇잎을 손으로 걷어내면서 겨우 물 밖으로 빠져 나왔다. 벌건 살갗이 아려왔다.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손등이 부어올랐다. 그런데 그녀의 머릿속이 투명한 유리창에 비친 햇살처럼 선명해지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몇 번이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일이지. 더 이상 흔들리지 말자.’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고 작업대에 앉을 수 있어야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화로불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녀는 몸이 따뜻해지자, 작업대에 놓인 끌을 잡았다. 자귀로 기초 작업을 해두었기 때문에 나무를 다듬는 작업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선 먼저 오리나무 위에 숯으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초벌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전체적인 탈의 윤곽을 스케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심선을 잡는 데 비중을 더 두었다.

정확하게 중심선을 그린 후에는 오리나무 전체를 4등분해서 둥근 네 귀퉁이를 다듬었다. 탈마다 눈의 위치가 다른 게 하회탈의 특징이었다. 제각기 다른 형태의 신비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에 스케치를 할 때마다 그녀는 늘 신경이 곤두섰다. 물론 기준점과 기울기를 정확하게 표시해 두는 것 외에 자잘한 스케치는 마음의 눈을 통해서 그렸다. 그런 방법이 처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컨디션에 따라 매번 탈의 형태가 달라져서 감정을 잘 다스려야 했다.

특히 하회탈은 제작자의 숙련된 기술과 정신의 깊이에 따라 웃고 있는 표정이 달라졌다. 어느 전수자에게 지도를 받았느냐에 따라 탈의 형태가 약간씩 달라질 수도 있었다. 대부분 탈의 형태가 엇비슷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표정들이었다. 그런 이유는 전수자마다 중심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해인의 스승은 탈의 기준을 코에 두었다. 다른 전수자는 눈이나 입에 중심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코를 기준으로 눈과 입의 기울기를 쟀다. 물론 스승이 제작한 탈과 그녀가 제작한 탈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기울기를 잰 오차 때문이기도 하지만, 탈을 제작하면서 손끝에 감겨오는 나무의 느낌과 칼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서로 달라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튕겨나가는 나무 조각의 움직임이 눈 속에 잡혔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바위에 드리워진 칼 그림자가 두려웠다. 그 칼날의 번득거림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마치 신 내림을 받는 무녀가 작두에 올라서서 춤을 추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평평한 바위에 무명천을 깔아 놓고 오리나무 열두 덩이를 쌓아두었다. 옆에는 예리한 조각도를 쓰기 편리한 순서대로 정리해 두었다. 천천히 평칼을 잡고 오리나무의 살점을 도려냈다. 이번에는 잡고 있던 평칼을 내려놓고 다음에 쓸 끌을 찾았다. 그런데 끌을 드는 순간이었다. 이런 날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칼끝이 빛났다. 한줄기 바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이 몰고 온 찬 기운이 그녀의 어깨 위에 툭툭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녀의 온몸에 감겨들었다. 그녀는 몸주의 신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동굴 밖은 저녁 햇살이 가득 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저녁 무렵에 작업을 하면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졌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저녁 햇살이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은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땅히 찾아 들어갈 집이 없는 사람처럼 가슴에서 늘 휑하니 찬바람이 불어왔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힘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시켰다. 손가락 끝이 움직일 때마다 나무 조각이 톡톡 날렸다.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하회탈을 제작하는 과정이 적혀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고려시대 중엽이었다. 안동 하회마을에 각종 질병과 재앙이 겹쳐 죽어나가는 사람이 날로 늘어났다. 여기저기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하고, 가뭄과 홍수로 마을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인심도 흉악스러워졌다. 점점 마을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났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없는 마을이 되면서 미래의 희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때, 허도령은 어떻게 하면 마을의 재앙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고 탄식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도령은 낮부터 술을 퍼마신 채 인사불성이 되어 잠들었다. 그런데 꿈에 신령이 나타나 탈의 모습을 보여주며 백일 동안 외인의 출입을 막고 탈을 만들어 그 탈을 쓰고 굿을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마을의 재앙이 물러나게 될 거라는 말도 남겼다.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어난 허도령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열두 개의 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선명했고, 절박한 음성이었다. 더구나 꿈속에서 보았던 탈의 모습은 너무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허도령은 그 길로 목욕을 하고 탈방에 금줄을 친 후, 뒤뜰에 있던 오리나무를 베어 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탈을 제작하는 동안 먹을 음식은 정혼녀가 문 밖에 가져다 놓고 갔다. 음식을 내려놓고 돌아서는 정혼녀의 마음은 허도령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결국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그만 금줄을 넘고 말았다.

금줄이 끊어지는 순간, 탁! 무엇이 정수리에 내리 꽂히고 허도령은 비틀거렸다. 마지막 이매탈의 턱을 만들려던 시간이었다. 정혼녀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 탈방 문구멍을 뚫고 안을 들여다본 것뿐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멀쩡했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번개가 쳤다. 비틀거리던 허도령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정혼녀가 금줄을 넘었기 때문에 신탁을 받고 탈을 깎던 허도령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정혼녀는 그 사실을 알고 상심한 나머지 부용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부용대에서 떨어진 정혼녀는 훗날 연꽃으로 환생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읽어봐도 하회탈이 만들어진 전설은 가슴 깊이 멍울을 만들었다. 허도령이 운명을 달리 했기 때문에 탈을 제작한 비법이 전수되지 못했고, 반면 그로 인해 신비로움을 간직한 하회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잠시, 해인은 허도령과 부용 아씨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마치 자신이 겪고 있는 사랑의 고통처럼 느껴졌다.
해인은 갈전마을 떠나, 교수가 운영하는 공방에서 일을 거들며 살았던 때를 떠올렸다. 사실 작은 아버지와 자명의 관계를 알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숨어 지냈다. 그런데 일 년 만에 자명이 해인을 용케 찾아냈다. 그 당시 자명의 얼굴이 온통 흙빛이었다.

“해인아, 나에게 시간을 좀 줘.”
“오빠하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자명은 해인에게 모든 일을 설명해야할 것 같았다. 하지만 해인이 막무가내로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명은 해인을 강제로 데리고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는 한강변에서 내려 강물에 빠져죽자고 했다. 한동안 서로 부둥켜 앉고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뿐 아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몰랐다.

“사진관으로 이재선 사장님을 찾는 사람들이 왔었지. 그때, 사장님은 하회마을 쪽에 출장이 있어 갔다고 했지. 찜찜해서 그들의 뒤를 밟았어. 자전거를 타고 그들이 가는 쪽을 갔지만 승용차를 따라잡기란 어려웠지. 그리고 사진관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오는데, 또다시 그 차를 발견하고 죽을 듯이 페달을 밟고 따라갔어. 그런데 이재선 사장과 이갑수 사장이 고갯마루에서 다투는 모습이 보였어. 그 승용차가 그들 앞에 섰지. 나무 뒤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어찌할 바 몰랐어. 이재선 사장님이 이갑수 사장의 얼굴을 몇 번 치자, 이갑수 사장이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졌어. 격분한 그들은 한동안 몸싸움을 벌였어. 그런데 이갑수 사장이 승용차에 있던 사람에게 ‘깔아뭉개!’ 라고 소리쳤어.

그러자 승용차가 급히 후진을 하더니 그대로 이재선 사장을 치어버렸어. 너무 놀란 나는 이재선 사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어. 사장님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잠시 내 손을 꽉 잡더니 숨을 거두어버렸어. 이갑수 사장과 승용차에 탔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는 와락 잡아끌더니 승용차에 태웠어. 그리고는 협박을 하기 시작했어. 입 다물지 않으면 나도 똑 같이 깔아뭉개버리겠다고 했어. 당시 열 살이란 나이에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란 너무 무서웠어. 그 뒤로 이갑수 사장이 시키는 일을 하며 숨죽이며 살 수 밖에 없었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사건의 전말을 누나에게 말했고 누나는 곧장 나를 안동 사진관에서 데리고 가버린 거야. 누나가 이갑수 사장으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받았던 것 같아. 해인아, 당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었어. 이갑수 사장의 협박이 너무 무서웠어. 늘 너에게 미안 했어.”

자명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해인은 오열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이미 공소시효가 끝나버렸어. 악마 이갑수 사장은 형을 죽이고도 무사할 수 있었지. 그리고는 너를 빨리 안동으로 보내라고 협박을 해.”
“오빠가 너무 어려서 어쩔 수 없다고 쳐. 하지만 그동안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잖아.”
“미안해, 널 지키고 싶었어. 이재선 사장이 너까지도 헤치겠다고 으름장을 놨거든.”
“오빠 앞으로 우리 모른 채 하고 살아. 더 이상 날 찾아오지도 마. 오빠를 고스란히 잊고 살아 갈 테니, 앞으로 찾아오지 마.”

해인의 얼굴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후, 자명은 수시로 해인을 찾아왔지만, 해인은 자명을 멀리했다.
차츰 자명도 지쳐갔다. 도무지 해인이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안동에서 이갑수가 자명의 작업실로 들이닥쳤다. 해인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두 명의 사내와 함께 들어온 이갑수는 작업실 내부를 모조리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해인이 고년 있는 곳을 빨리 말해?”
“저도 연락이 안돼요.”
“거짓말 하지마! 애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이갑수는 두 명의 사내에게 자명이 입을 열 때까지 두들겨 패라고 지시했다. 사내들은 자명을 사정없이 때렸다. 거의 실신상태까지 이르자 동작을 멈추었다.
“애들아, 그만해. 독한 놈!"

이갑수는 피범벅이 된 자명의 얼굴을 흠씩 갈기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자명은 겨우 일어나 물을 마셨다. 오른 쪽 다리가 부러졌는지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자명은 이갑수가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 뒤,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는 해인이가 일하는 공방으로 갔다.
해인은 피멍이 들고 잔뜩 부어오른 자명의 얼굴을 보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가 그랬어?”
“이갑수 사장이 널 데려가겠다고 안동에서 왔어.”
그때였다. 이갑수가 두 명의 사내와 함께 그들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네 이럴 줄 알았지. 자명이 너 이놈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다고 잡아떼?”
해인은 이갑수의 목소리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이런 짓까지 해요. 우리 아버지를 죽인 것도 부족한가요?”
“뭐야! 그동안 키워났더니, 도망이나 치고, 헛소리나 해? 하라는 대로 할 것이지?”
“이제 당신 마음대로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갈전마을 뒷산은 분명히 제 소유고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전 이제 성인이고 두 번 다시 살인자의 말은 듣지 않을 겁니다.”
“뭣이! 이게 죽으려고 발악을 하는구먼. 애들아 혼 좀 내줘라.”

두 명의 사내가 해인의 머리채를 잡아끌더니 땅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비명소리와 함께 해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공방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경찰을 부르라는 누군가의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자 이갑수와 두 사내가 후다닥 도망을 쳤다.

그 뒤로도 이갑수의 횡포는 계속되었지만, 해인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는 갈전마을로 내려가 공방을 열어 작업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작은 아버지 이갑수가 악랄하게 괴롭혀도 그녀는 더 이상 들무새처럼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자명과 해인은 이재선의 살인과 관련해 법에 호소를 하기 시작했다.

공소시효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사건을 마무리하고 싶었고, 이갑수가 어떤 사람인가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갑수의 배경도 만만치가 않았다. 안동 지역의 법조계에 손을 서 놓은 상태였고, 경찰에도 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이 터진 이후, 해인은 자명을 만나지 않으려고, 공방도 옮기고 살던 집도 이사해 버렸다. 정말 두 번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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