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동굴 속 어둠이 내리고

해인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지난 기억들이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동굴 밖을 서성거리며 서서히 어둠이 걷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새 내린 이슬로 눅눅했고, 한 치 앞도 내려다 볼 수 없을 만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손끝만 닿아도 하얀 물이 묻어날 것 같은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안개가 동굴 안으로 스며들었다. 바람도 몹시 차가웠다. 두꺼운 이불을 꺼내 어깨에 둘렀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피워둔 화로에 구멍을 열자, 불꽃이 확 타들어갔다. 팔을 괴고 앉아 얼굴을 묻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열기가 동굴 바닥의 눅눅함을 없애자, 졸음이 몰려왔다. 동굴 안쪽 바위 위에 올려둔 목각상이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뭉툭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 풍성한 수염, 그리고 세 가닥으로 갈라진 넓은 창을 쓴 목각을 보고 있으면, 착 가라앉아 있던 기분이 좋아졌다.

슬프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가득 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석굴암 본존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프리카의 목각과 석굴암 본존불이 전혀 다른 것인데도 같은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예식장 웨딩마치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피아노 소곡집은 손끝 지문에 달아 너덜거렸다. 그 힘겨움 속에서도 손가락은 희고 길게 자랐다. 피아노에 재능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등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피아노에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해인은 바싹 말라버린 미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을 떨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작은 아버지 이재선은 해인에게 느닷없이 선을 보라고 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나이도 어릴 뿐만 아니라, 공부도 계속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이웃에 살고 있는 김 사장의 아들과 약속 날짜를 잡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모두들 그 집안에 딸을 주지 못해 안달인데 너 따위가 따질 게 뭐 있느냐는 식이었다. 그 길로 자명을 찾아 나섰다.

자명을 만난 곳은, 서울 변두리에 있는 작업실이었다. 작업실은 어두컴컴한 지하였는데, 들고 나갈 때마다 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저기 살림도구가 흩어져 있어서 작업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자명이 해인을 보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 해인구나! 우리 해인이 왔구나!”
자명이 다가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미안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자명은 소파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너무 지저분하지? 선배가 운영하는 작업실이야. 이곳에 살면서 선배 일을 거들고 있어.”
천천히 주위를 자세히 훑어봤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책과 옷가지, 그리고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가 담긴 그릇들도 구석에 쌓여 있었다.
“정신없어서 청소를 못했어.”
한눈에 봐도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지?”
“아니야. 그런데 해인이 많이 자랐구나. 작년까지만 해도 꼬맹이였는데 이젠 숙녀가 다 되었네.”
“오빠를 많이 원망했어. 하지만 이렇게 만나고 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
“누나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그래서 집을 나왔어. 그래도 너와의 약속은 꼭 지킬 거야. 사실은 네가 보고 싶어서 안동에 내려갔다가 되돌아왔던 적이 있었어. 도저히 네 앞에 나타날 자신이 없었어.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거니?”
“그냥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올라왔어.”

작은 아버지가 자신을 결혼시키려고 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도 다시 밀어 넣었다. 돌연, 그가 토함산 해돋이를 보고 싶다며 경주를 가자고 했다. 해돋이 장면이 필요하다면서 카메라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일 때문에 토함산을 다녀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와 그녀가 처음 떠나는 여행이었다.

자명과 해인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어둠에 잠긴 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흔들리는 나무 사이로 새벽 별이 반짝거렸다. 기차로 대구까지 가고, 또다시 버스를 타고 경주로 가야했다. 교통이 불편했지만 자명과 해인은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았다. 하루에 몇 번 운행을 하지 않는 바람에 대합실 내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려 겨우 버스에 탈 수 있었다. 경주로 가는 버스에 올랐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버스 안 승객들은 토함산에서 신년 해돋이 기도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코를 골고 있는 사람, 기도라도 하는 듯 눈을 지긋하게 감고 있는 사람들, 부스럭대며 싸온 음식을 먹는 사람들로 버스는 꽉 차 있었다. 해인은 자명의 어깨에 기대어 창 밖 풍경을 올려다봤다.

토함산에 올라갔을 때, 이미 저녁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망 한 짐씩 등에 지고 올라왔는지 해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자명도 해를 바라보며 해인의 손을 꼭 잡았다.
가슴이 쿵쿵거렸다. 영글지 못한 풋풋한 감정이 툭! 하고 불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함성을 질러댔다. 그리고는 등에 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을 하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자명과 해인은 석굴암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땅거미가 얕게 내려앉고 있는 석굴암 경내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저녁 예불소리와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해인아, 석굴암은 통일신라 때 김대성이 창건했다고 해.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불사(石佛寺)를 지었다는 거야. 석불사는 바로 석굴암이지. 석굴암은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지. 자세히 들여다봐. 부처님 이마에 무엇이 보이니? 작은 흔적이 있지. 그곳은 많은 불자들이 정성을 모아 보석 공양을 올렸는데, 그만 감쪽같이 도둑맞은 거야.”
“누가 그런 짓을 했어?”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소문도 있지만 증명할 길은 없지.”

본존불상의 웅장한 기품이 해인의 눈 안에서 쏙 들어차기 시작했다.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의 석굴 사원을 응용해서 세워졌다는 푯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 인도의 석굴처럼 자연 암벽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화강암을 다듬어서 인공적으로 석굴을 조성했다는 점이 남달라 해인의 관심을 끌었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토함산에서 기도를 올리기 위해 올라온 일행은 더 깊은 산속으로 올라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예불 소리도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명은 흔들리는 촛불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본존불의 자비로운 미소를 찍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이윽고 석굴암 도량이 텅 비워졌다. 스님도 공양주의 그림자도 없었다.

“오빠, 얼른 산을 내려가자, 이러다가 길 잃어버리겠어.”
그런데도 자명은 셔터를 누르며 석굴암 내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석굴은 전실(前室), 비도(扉道), 굴실(窟室)로 나누어져 있는데, 무엇보다도 불상의 배치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야.”

해인은 자명의 설명을 들어가며 석굴암 내부에 조각된 불상의 조각수법을 관찰해나갔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조각 기술의 백미이며, 사실적인 표현도 경지에 이른 기법이었다. 그런데 자명은 본존불의 명칭이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아니라 석존본존불이라고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석존본존불을 석가여래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해인은 토함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누군가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해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무척 힘든가 보구나.”
“아니야. 오빠와 처음 여행하니까, 너무 좋아.”
그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안동사진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명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도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참고 지내. 그때가 되면 널 데려올 수 있을 거야.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지? 해인이가 보고 싶을 땐 언제든지 안동으로 내려갈게. 조금만 참아.”

불국사까지 걸어 내려왔을 땐, 하늘의 별이 총총히 떠 있었다. 대구까지 가는 마지막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할 수 없이 불국사 아랫마을에서 하룻밤 지내기로 했다.
“해인이 배고프겠다.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숙소를 찾도록 하자.”
늦은 저녁을 먹은 자명과 해인은 허름한 여관방에 들어와 겨우 짐을 풀었다. 그들의 얼굴은 몹시 상기되어있었다. 어린 시절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지만 성년이 되고 나서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 해인이 피곤하겠다. 어서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자도록 해.”
해인과 자명은 서로 어색해하면서도 오래전 오누이처럼 지내던 때를 떠올리며 나란히 누웠다. 작은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자명이 해인의 손을 잡았다.
“우리 이렇게 손을 잡고 함께 가도록하자.”
“..........”
해인의 두 눈에 가득 고였다. 자명이 해인의 얼굴을 보듬었다.
“울지 마. 말하지 않아도 알아. 널 이대로 보내야하는 오빠 마음 이해해줘. 길지 않을 거야.”
해인이 자명의 품으로 파고들며 흐느껴 울었다.
“우리 해인이 힘들구나.”
‘작은 아버지가 김 사장 아들과 혼인하라고 해. 오빠 난 아직 어리고 공부를 더하고 싶어. 그런데 작은 아버지의 고집을 어떻게 막아.’

해인은 목구멍까지 밀려온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다시 삼켰다. 그때였다. 자명이 해인의 입술에 입맞춤을 했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그녀의 가슴은 몹시 뛰었다. 해인은 더욱 깊게 자명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자명은 그런 해인을 자신의 깃털 속 깊이 파묻어주었다. 해인은 곧 쌔근거리고 잠이 들었고, 자명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며 잠을 설쳤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소스라치게 놀란 해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때까지도 자명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우리 해인이 나쁜 꿈을 꾸었구나.”
“아직도 자지 않았어?”
“잠이 오지 않네.”

순간, 해인은 본능적으로 자명의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자명의 입술에 깊은 입맞춤을 했다. 자명은 잠시 경직된 몸을 풀지 못하고 해인이를 밀어냈다. 그런데도 해인은 자명을 품을 헤집고 들어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보송한 피부 속 여린 솜털이 오소소 반응해왔다. 자명은 아주 조심스럽게 해인을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몸짓들이 달빛을 가득 받아 내리자, 그들은 서로의 몸을 열고 처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가냘프고 여린 해인의 몸이 몹시 뜨거워지자, 자명의 몸이 사자의 갈기처럼 힘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들은 비로소 하나가 되는 순간의 쾌감에 온몸을 맡겼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감정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보듬어 안았다.

다음날, 자명과 해인은 대구까지 가는 버스에 함께 올랐다. 그들은 내내 잡고 있던 손을 놓지 않았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가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전의 오누이 사이가 아닌 전혀 다른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구에서 내린 그들은 헤어지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고 여느 연인들처럼 변치 않을 사랑의 맹세를 눈빛으로 수없이 교환했다.
해인은 안동으로 가고 자명은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해인이 탄 버스는 뿌연 연기를 내며 황톳길을 내달렸다. 드디어 해인은 용기를 냈다. 작은 아버지에게 맞설 용기가 생겼던 것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사랑을 확인한 자명이 있다는 생각에 겁날 게 없었다.

늦은 저녁 무렵쯤이 되서야 그녀는 안동에 도착했다. 그녀가 사진관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의자에 앉아 신문을 펼쳐들고 있던 이갑수의 두 눈과 딱 마주쳤다. 이어 부챗살이 쫘르륵 펴지는 소리와 함께 둔중한 물건도 함께 날아들었다. 사진관 한쪽 벽을 장식했던 합죽선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평소 이갑수가 아끼던 합죽선이었다. 합죽선은 파닥거리며 죽어가는 늙은 나방처럼 바닥에 나뒹굴었다. 해인은 조심스럽게 합죽선을 주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날개가 모두 찢어진 상태였다.
“절대로 이사장의 아들과 결혼할 수 없어요. 저는 자명이 오빠를 사랑해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뭐라고? 자명이와 어쩐다고? 꼴도 보기 싫어. 어서 방으로 올라가!”

어쩐 일인지 작은 아버지의 얼굴이 쉽게 누그러졌다. 예전 같으면 잔뜩 화가나 으르렁거리며 몇 시간이고 잔소리를 퍼부어댔을 것이다. 갑자기 돌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합죽선이 내팽개쳐진 것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작은 아버지는 용서라는 법이 없는 사람이며,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심한 매질을 한다거나, 몸이 혹사당할 정도로 일을 시켰다.
해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은 늘 컴컴했으며 차가운 바람이 휘돌았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일일이 세지 않아도 몇 번째 계단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계단은 턱이 반쯤 무너져 내렸고, 칼날처럼 날카로웠으며, 우툴두툴 거렸다. 3층까지 오르려면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무엇보다도 마지막 계단에 오르는 순간이면 호흡이 딱 멎는 듯 심장이 당겨졌다. 갈라진 틈에서 흘러나온 곰팡이가 나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섰다. 방이 몹시 추웠다. 발이 움직일 때마다 버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뼛속까지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장롱에서 이불을 꺼내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의식이 몽롱해졌다.

그때였다. 문이 덜컹 열리면서 그녀의 작은 어머니가 들어섰다. 열린 문틈을 비집고 찬바람이 들어왔다. 푸른 광채가 작은 어머니의 눈에서 품어져 나왔다. 그녀는 몸을 바짝 움츠렸다. 심한 매질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덮고 있던 이불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작은 어머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바싹 마른 장작개비 같은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작은 어머니, 그녀의 발가락이 벌겋게 변해갔다. 방바닥이 몹시 차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던 게 아니고 그녀 대신 화를 내고 있는 듯했다.

“다 큰 너를 매질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추우니까 아래층에서 지내도록 해.”
“네?”
귀를 위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단숨에 집어 삼킬 듯 터져 나와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함빡 지어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성난 고양이의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손이 꽁꽁 얼었네.”
이불을 움켜쥐고 있던 해인의 손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작은 어머니가 다가와 해인의 손등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해인은 슬그머니 손을 뺐다.
“널, 한 번도 남의 자식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비록 내 배 아파서 낳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어서 내려가자. 감기에 걸리겠다.”

머릿속까지 얼어붙어버렸는지 전혀 감각이 없었다. 따뜻한 난로와 뜨거운 음식이 몹시 그리웠다. 아래층은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꽁꽁 언 몸속으로 낯설게 스며들었다. 작은 집 식구들이 빙 둘러 앉아 있는 식탁으로 갔다. 그녀의 사촌 동생들이 더 놀라는 기색이었다. 함께 밥을 먹었던 적이 없었기에 서로가 어색했다.
이갑수는 말없이 밥을 입으로 가져가 쩝쩝 씹어댔다. 조심스럽게 뜨거운 국물을 입안으로 떠 넣었다. 여전히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탓도 있었지만, 주눅이 들었다. 음식 씹는 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뿐이었다. 뜨거운 국물을 몇 번 떠먹었다. 그리고 수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왜, 더 먹지 않고.”
작은 어머니가 해인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는 듯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다 먹었으면 안방으로 좀 오거라.”
이갑수가 남아 있던 국물을 후루룩 들이켜더니 해인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아버지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앉아 있었다. 무릎을 꿇고 구석에 앉았다. 잘 다듬어진 과일접시를 들고 작은 어머니가 따라 들어왔다.
“편히 앉아서 과일 먹어라. 아버지가 하실 말씀이 있단다. 이번만큼은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집 나가는 습관은 버려라.”
침묵을 지키고 있던 작은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건 하회마을 뒷산 등기야. 형님이 남기고 간 재산이지만 결국 우리 집안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장의 모가지를 꽉 비틀어 죽이고 싶었다만······. 죽일 놈의 이장이 명의 이전을 끝내 해주지 않더니만, 얼마 전에 네 앞으로 명의 이전을 해 놓았지 뭐냐. 생각 같아서는 감방에 처넣고 싶었다만 그래도 좋은 게 좋다고 꾹 참았다. 너도 그러는 게 아니다. 명의 이전할 때 미리 이 애비한테 말을 했어야지. 그쪽 산 주위에 방직공장이 들어선다는구나. 하늘이 내린 기회야. 좋은 가격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네 앞으로 되어 있으니 이렇게 불렀다. 그 산을 팔면 얼마 정도 현찰을 뚝 떼어주마. 어떠냐! 네 생각은?”

그제야 작은 아버지의 속을 알아차렸다. 사실 작은 아버지의 말은 형식에 불과했다. 이장이 해인에게 인감을 떼어 달라고 해서 건넸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 빠르게 진행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방으로 돌아왔다. <계속>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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