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 들어서면 언제나 휑하니 바람만 불어댔다. 낙엽가지 쌓여 엉망이었던 마당을 정리해두기는 했지만 어수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집은 사람의 온기로 버티는 모양인지, 텅 빈 아버지 집은 조금씩 부식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마저도 정신 줄을 놓아버렸다. 아버지를 잃은 충격 때문인지 아님, 간수로써의 역할을 다한 탓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세상과 연결된 끈을 잘라 내는가 싶더니,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켜켜이 쌓아두었던 긴 세월을 하나씩하나씩 망각해가며 보내고 있는 어머니가 오히려 얼굴만큼은 천진난만해져갔다. 휴식과 평화가 비로소 찾아든 것이다. 부어오른 얼굴은 소라 빵처럼 점점 부풀어가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글쭈글해졌다. 팔과 다리마저 앙상한 나뭇가지가 되어버렸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였다.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떴다. 보린이 보낸 문자였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내목대장의 칼!’
어라? 무슨 내목대장의 칼, 생뚱맞은 표현인가. 순간, 섬광을 일으키며 눈앞에 뭔가가 휙 지나갔다. 앞이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정신을 가다듬자 그제야 희미하게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갑갑증까지 밀려들자, 목이 죄여왔다. 메케한 연기 냄새가 났다. 나는 서둘러 빛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집을 보수하기위해 견적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보린과 함께 지내기 위한 자구책을 세우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아내가 이혼만큼은 절대할 수 없다고 해서 보린에게 청혼을 할 수는 없지만 어찌되었든 우린 집이 필요해진 사이까지 왔던 것이다. 어머니가 모아두었던 비상금으로 수리를 할 계획이었다. 건축업자와 만나 아버지 집을 둘러보는데,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아버지 방으로 들어서자 유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가 정리하려다 만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옷가지 몇 벌을 태운 것 빼고는 예전 그대로였다. 마치 아버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집 안 곳곳에서 아버지 냄새가 날렸다. 아버지 유품 중에 제일 관심을 끄는 것은 오래된 책상이었다.
책상과 아버지, 아버지와 책상은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책상을 몹시 아끼셨던 탓일 수도 있었다. 밤만 되면 책상에 앉아 책을 보거나 뭔가를 열심히 쓰곤 했다.

아버지 책상은 서랍장이 여섯 칸이었다. 맨 위의 칸은 늘 굳게 잠겨 있었다. 열쇠는 책상 밑 비밀 구멍 안에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랍을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집에 가면 늘 나와 함께 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내가 잠들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때로는 아버지가 코를 훌쩍이며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마다 알 수 없는 무거운 침묵이 아버지의 어깨를 훑고 지나간다는 것을 감지하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 일기장에는 과연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

나는 건축업자를 돌려보내고 아버지 집에서 잤다. 그런데 잠결에 쇠 울음소리를 들었다. 얇은 쇠 떨림이었다. 어린 고양이 울음소리와도 같았다. 내목 대장의 칼이 주인 찾는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머리끝이 쭈뼛거리면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환청처럼 간헐적으로 들려왔던 쇠 울음소리는 점점 내 몸속으로 기어들었다. 그 소리가 달팽이관을 통과하자, 귓속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오금이 저리고 사지가 떨렸으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불을 푹 뒤집어 쓴 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칼의 울음소리는 집안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살며시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 순간, 쇠 울음소리가 뚝 하고 멎어버렸다. 소변을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슬그머니 이불 속에서 기어 나왔다. 화장실 좌변기 뚜껑을 열고 바지를 내리려는데, 쇠 울음소리가 ‘윙’ 또다시 들려왔다. 그 때, 뭔가가 뒤통수를 냅다 후리치고 달아나는 것이었다. 너무나 놀라 맨발인 채로 아버지 집을 뛰쳐나왔다.
그 뒤로 독감에 걸려 몇 날을 끙끙 앓다가 급기야 폐렴으로 번져 꼼짝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잠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고 들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젊은 혈기를 바쳤던 분이 비단 아버지 뿐만은 아니었지만 난 아버지가 몹시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조국은 분명 나에게도 조국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조국’ 이란 단어와 젊음을 바꾸어보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나오던 만주 벌판과 휘날리는 태극기 그리고 말발굽소리는 신화나 마찬가지였다.

터널 너머에서 보린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속이 바싹 타 들어갔다. 만주 벌판을 달리던 젊은 날의 아버지처럼 간절함으로 뛰어 내달렸다.
어디에선가 연기가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얼룩덜룩한 터널 벽화 속에는 눈을 부릅뜬 악마들이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사람들이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점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경찰관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터널 반대편으로 대피하시오!”
그의 목소리는 몹시 다급해져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터널 안 차량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것을 왜 이제 말하는 거요? 우리를 다 죽일 작정이요?”
“빨리 반대편으로 피하기나 하세요!”
경찰관의 호루라기 소리가 연거푸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다시 방향을 바꾸어 뛰기 시작했다.
“큰 사고라도 났나요?”
함께 뛰고 있던 경찰관에게 물었다.

“교통사고 수습하는 중에 불이 났지 뭡니까. 접촉사고라서 쉽게 처리 할 줄 알았는데, 사고 차량에서 기름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어요. 차량에서 떨어뜨린 담뱃불 때문에 불이 번졌어요. 어떤 놈인지 고의로 저지른 행동 같아요. 이곳을 빨리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연기에 질식될지도 몰라요.”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터널 안에서 화재가 발생하다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반대편 터널을 빠져나가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많은 사람이 일제히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여자와 어린이들이 몇몇 섞여 있었는데, 잔뜩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안타깝게도 나는 보린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반대편에 있던 터널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터널에 두고 온 차였다. 그때였다.
“쾅!”
굉음이 터널을 삼켜댔다. 순간 두 귀가 멍멍해지면서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주위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연쇄 폭발이 두 번 더 있었다. 머리 위로 뭔가가 날아들었다. 그 진동으로 나는 검은 승용차 옆으로 나가 떨어졌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는데 말을 듣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멎을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손만 뻗으면 터널 끝이 잡힐 것만 같은데,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 위에서 따끈한 액체가 흘러냈다. 그때부터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재킷을 벗어 코를 틀어막았다. 메케한 연기가 숨통을 조였다. 다행히 연기가 터널 천정을 타고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 바로 터널 끝이 보였다. 정신없이 터널을 따라 밖으로 향했다. 내부가 점점 환해지면서 터널 벽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 순간 발을 헛딛고 터널 벽 쪽으로 꼬꾸라졌다. 이마가 터널 벽화에 닫자, 벽화가 이마를 뚫고 들어차는지 머릿속이 울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멀리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레퀴엠처럼 장엄하기까지 했다. 경찰차와 소방차가 터널 입구 쪽으로 들어섰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나는 서둘러 터널을 빠져나갔다. 고속도로 갓길을 계속해서 뛰었다. 이마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언저리까지 여러 가닥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쓱 문질렀다. 그런데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머리를 질끈 동여맸다. 그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어댔다. 누가되었든 너무도 반가웠다. 보린의 이름이 떴다.

“보린아!”
목이 메여왔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터널에 사고가 났어.”
“몸은 괜찮으세요?”
“이마를 좀 다친 것 같아.”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어요. 중국으로 가려고요.”
“뭐라고! 중국으로 간다고?”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 아버지가 숨겨 두었던 칼을 가져갑니다. 주인은 바로 저였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어.”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와 사이렌 소리 때문에 보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아.”
“사다코를 아시죠?”
“뭐라고?”
“전, 사다코의 딸이에요. 내목대장의 후손이에요. 우리의 칼을 찾으러 한국에 왔어요. 당신 아버지한테 빼앗긴 칼을 찾으러 한국에 왔던 겁니다. 내목대장의 칼, 그 주인은 바로 나에요.”
“보린아! 기다려, 가지마!”
그 순간까지도 그녀를 붙잡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만 끊겠어요.”
“끊지 마!”

전화가 뚝 끊어졌다. 몇 번이고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다시는 연결되지 않았다. 이 무슨 날 벼락이란 말인가. 유일한 안식처라고 생각했던 보린이 갑자기 내목대장의 증손녀라고?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사다코의 딸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만난 목적이 오직 그 칼 때문이었단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보린은 아버지 집을 관찰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칼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서, 칼이 우느니 어쩌니 이상한 소리를 하는 그녀를 의심했어야 했다.
사고현장을 벗어나 아버지 집으로 가기 위해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등성이를 넘어 작은 언덕을 내려와 개울까지 건넜다. 가시덩굴이 여기저기 무더기로 뒤엉켜있었다.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도 아버지 집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인적이 끊어진 상태라서 풀들이 무성했다. 가시덩굴에 걸려 몇 번이고 넘어졌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 가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러 몇 번 와본 적 있었다. 그래서 그 길을 꿰고 있었다.

휘적대는 몸을 세워 겨우 걸었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아버지 집에 가야 했다. 그곳에 보린이 돌아와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아버지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보린이 사다코의 딸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목대장의 칼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인생을 통째로 흔들었다가 내동댕이친 그녀가 간절히 그리웠다.

그때였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땅에서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쿵쿵! 쿵쿵!”
두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 나왔다. 땅에서 울리던 그 소리가 내 심장에서 들려왔다.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칼, 아니 내목대장의 칼이 쿵쿵댔다.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아버지 집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 아버지 집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날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불빛이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 듯 점점 가까워졌다.
“쿵! 쿵!”
아버지 집이 가까워지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길을 멈추고 서서 뒤돌아봤다. 터널이 화염 속에 휩싸여 있었다.

발가락 사이에서도 핏물이 흘러나왔다. 손가락만 뻗으면 바로 아버지 집이었다.
“아버지!”
목 놓아 아버지를 불렀다.
대문을 밀고 들어서자,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아니었다. 수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든 게 잠잠해졌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쓰러지고 말았다. 하늘을 봤다. 별이 총총 떠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별 속으로 스르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눅눅한 땅기운이 손가락 사이로 번져왔다. 땅 속으로 온몸이 푹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터널 속에서 있었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터널 천정에 그려진 벽화가 쩍쩍 갈라지면서 내 몸을 뒤덮을 듯 그리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눈꺼풀이 떠지지가 않았다. 더구나 손끝을 움직여도 꼼짝하지 않았다.
가위눌림인가. 왜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아, 냄새가 익숙했다. 아버지 냄새가 분명했다. 그때, 누군가 움직이는 느낌이 전해졌다.

보린이 돌아온 것일까. 어젯밤 터널 사고가 있었고, 보린은 내목대장의 칼을 가지고 줄행랑을 친다고 전화가 왔고, 나는 미친 듯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당에 쓰러졌고, 희미해지는 의식을 손가락 끝으로 느꼈다.
누군가가 따끈한 수건으로 내 얼굴과 손 그리고 발을 닦아주었다. 풀썩 꽃 향이 날렸다. 보린에게서 나던 냄새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민도, 아내의 체취도 분명 아니었다.
“누구세요?”
“아, 깨어나셨군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요. 제가 병원에서 근무했던 적이 있어서 이마에 난 상처를 치료했어요. 피를 많이 흘리셨어요. 얼굴이 부어올라 눈이 잘 떠지지 않을 겁니다. 곧 병원으로 옮길게요.”

눈을 치켜뜨고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희끗한 귀밑머리를 쓸어 넘긴 여자, 요양원에 누워있는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이거나, 좀 아래 이거나.......그녀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작은 몸집의 그 여자는 낯익은 미소로 나에게 다가왔다. 온화한 인상 때문인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여자가 물 컵을 들어 바싹 타들어갔던 입술을 적셔주었다. 갈증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누구신가요?”
대답 대신 여자가 방긋 웃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얼굴이 맑고 고왔다. 설핏 보린의 얼굴이 겹쳐졌다. 거칠게 머리를 도리질 쳤다. 그녀는 이미 나에게서 떠난 여자이지 않은가.
“내목대장의 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지금 뭐라 하셨어요?”

내목대장의 칼이란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내목대장의 칼을 이 여자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는 당신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사다코입니다.”

여자는 품속에서 편지 한 장을 내려놓았다.
“음식을 만들 테니, 천천히 읽어보세요.”
나는 그녀가 남기고 간 편지를 주워들었다.
 

-“아들아! 오랜 세월 한 여자에게 큰 죄를 지었다. 사다코라는 일본 여성이다.

대한민국 광복이 있기 얼마 전이었다.
독립 열사에게 밀서를 전달하다가 일본군에게 총을 맞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일본 유학시절 알고 지냈던 친구 집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친구 여동생인 사다코를 만났다. 그녀는 지극정성으로 다친 내 팔을 치료해주었다.
그 집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사다코와의 사랑이 싹트게 되었는데, 결국 장래 약속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사다코 집과 우리 집 모두 반대였다. 그래서 우리는 만주로 넘어가 살기로 했다.

사다코의 집에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내목대장의 칼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목대장의 칼이 그토록 영검인지 몰랐다.
사다코는 내목대장의 칼을 집안에서 훔쳐왔단다. 그 칼을 팔아 함께 살 여비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야. 나는 사다코가 가져온 내목대장의 칼을 선뜻 받아 들었다. 그 칼을 팔기 위해 밀수업자를 찾는 동안, 그만 숙소에 숨어 있던 사다코가 집안 사람들에게 붙들려가고 말았다.

나는 내목대장의 칼을 가슴에 품고 한국으로 도망쳐 왔다. 몇 번이고 사다코를 데려올 준비를 했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단다. 집안에서 강제로 결혼을 시켰던 것이야.

그 칼을 평생 숨기며 살았다. 사다코의 집안에 쉽게 내놓을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내목대장의 칼이 울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일본인들이 집으로 닥칠 때도 울었다. 안기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을 때도 칼의 울음소리를 들었단다. 안기부 사람들인지 거간꾼인지는 몰라도 내목대장의 칼을 내 놓으라는 협박을 수없이 당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목대장의 칼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내목대장의 칼은 사다코에게 맡겨둔다.
칼이 너를 부를 것이다.
아들아, 그 칼을 꼭 지키도록 해라.

아비가-

아, 아버지 글씨체였다.

음식을 만들겠다며, 나간 그 여자가 바로 아버지 가슴에 캄캄한 감옥을 지었던 그 연인이란 말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어느새 들어온 그 여자가 몸을 부축을 해주었다.
“당신이 보린의 어머니이신가요?”
“하이.”
“어제 사고 났을 때, 보린이 칼을 가져간다고 전화가 왔어요.”
“내 딸이 가져간 것은 진품이 아니에요?”
“진품이 아니라구요?”

“하이, 모조품이에요. 몇 달 전, 그 분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들어왔어요. 그리고는 아버지 병원을 아무도 몰래 오갔지요. 가족이 없을 때는 항상 그 분 곁에 있었어요.”
“아, 그랬었군요.”
아버지는 임종 전까지 식구들이 병원에 오는 것을 금했다. 초췌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면회사절을 완강히 요구했던 것이다. 가끔 나 혼자 병원에 들러 상태를 살피고 돌아와 가족들에게 알려주곤 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도 평화로워 보였어요.”

사다코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분과의 인연은 참 길었어요.”
그녀는 슬그머니 일어나 책상 밑에서 상자를 꺼내 왔다.
“이건 진짜 내목대장의 칼이에요. 내 딸 보린이 가지고 간 칼은 가짜입니다. 그 분이 내목대장의 칼 때문에 오랫동안 곤경에 빠진 것을 알고 진품과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 집안에 두었어요. 내목대장의 칼은 그분과 나를 이어주던 정표였어요.”

“어젯밤, 칼의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맞아요. 그분이 임종을 앞두고 제게 말씀하셨어요. 칼이 새 주인을 부르는 울음소리를 낼 거라고요. 이 칼은 당신 것입니다. 당신이 지켜주셔요. 보린이 내목대장의 칼을 간절히 원했지만 주인은 아니었어요.”
내목대장의 칼을 꺼내 들었다. 햇살이 칼날에 꽂히는 순간 빛이 번뜩였다.
내목대장의 칼이었다. 코등이에 코를 들이댔다. 역시 그 냄새였다. 어렸을 때 맡아보았던 그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끝에서 날렸다.

“다행히도 병원에 가시지 않아도 될듯합니다. 주방에 음식도 해 두었어요.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돌아가야겠어요.”
“어디로 가십니까?”
“내 딸 보린에게 가야지요.”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갔다.
“예전의 집 모습은 많이 사라졌네요. 그분이 늘  이 집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주셨어요.”
그녀가 대문을 열고 총총히 걸어갔다.

 

그때였다. 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칼이 내는 울음소리였다. 퍼런 칼등에서 빛이 번쩍였다.
두 손으로 칼을 집어 들자, 새우 두 마리가 꼬리를 파닥! 파닥! 철퍼덕 방바닥을 향해 내리치더니, 하늘을 향해 힘껏 솟아올랐다.
‘내목대장의 칼이 내게로 왔다.’
내목대장의 칼,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끝>

 이경 약력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사장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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