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 막. 검은 터널이 보이기 시작하자, 발끝 신경세포를 지긋하게 눌러 액셀을 밟았다.
턱! 뒷덜미 위로 뭔가 떨어졌다. 짜르륵! 심장 깊은 곳에서 심한 통증이 한 바퀴 선회하다가 돌아 나갔다. 헉! 핸들을 잡고 있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건 뭐지? 심장에 고장이라도?’
숨을 크게 들어 마시고 내뱉기를 수회 반복하자, 뻐근했던 가슴이 풀어졌다. 겨우 오십을 넘겼는데, 그럴 나이는 아니지 않는가. 신체적 나이를 본다면 장담하건데, 구운몽에 나오는 양소유가 두 처와 여섯 첩을 희롱했던 딱 그 나이지 않는가.

'그럼 그렇지. 난 아직 멀었다. 순간, 통증이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내 몸이 잠시 오작동을 한 모양이야.'
보린의 작업실을 가기 위해서는 고속도로 경부선 일곱 개의 터널을 통과해야했다.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 또한 일곱 개의 터널을 통과해야했다. 모두 같은 방향인 것이다. 오늘은 아버지 집이 아닌 칼 그림에 빠져 있는 보린의 작업실로 향하고 있다.

세 달 전, 아버지는 고향 유배지에서 풀려나 하늘로 승천했다. 어쩌면 지금 쯤 아버지가 긴 꿈에서 깨어나 세상사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었다며, 활활 타고 있는 아랫도리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는 풋풋한 녀석들에게 당신 자신의 영웅담이라도 풀고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배지! 그곳은 구름도 힘겹게 넘어야한다는 높디높은 고개였다. 지금은 고속도로 뿐 만 아니라, 고속철도가 쫙쫙 빠져나갈 만큼 높디높았다던 그 고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양지바른 곳, 오종종 가옥이 똬리를 뜬 지역에 아버지의 오래된 집도 웅크리고 있다. 아버지는 살아생전 그곳을 유배지, 또는 감호소라며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했다. 그렇다면 간수는 당연히 어머니였을 것이다.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완성해낸 어머니, 홀연 아버지를 하늘로 보내고는 지난날의 기억이 어찌나 무거운지 하나하나 지워내고 있다.
아버지가 살았던 집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텅 비어버린 집은 거미가 지붕을, 개미가 방안에 알을 까고 진을 쳤다. 겨우 세달 만에 벌어진 일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것이라곤 다 쓰러져가는 고향집과 치매에 걸린 어머니뿐이었다.

온기가 싹 빠져나간 아버지의 집은 선뜩해 도저히 안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유품조차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다. 거미와 개미 때문만은 분명 아니었다. 집안에 들어서면 안 좋은 기운이 느껴졌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신호 같은 것이 감지됐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직 자신의 짐을 정리하지 말라는 계시처럼 느껴져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아, 아버지의 칼? 그 칼은 어떻게 되었지?’
갑자기 아버지 칼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칼이 보이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그 칼은 일본 장수 내목대장의 칼이었다. 하얀 비단에 잘 싸매져있던 그 칼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사실 중학교 다닐 때 몇 번 본 것이 전부였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알아서 잘 처리 했겠지. 이제 와서 그 칼을 떠올리다니......’
시야가 흐릿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코브라의 목선처럼 둥근 터널 지붕을 보았다. 다시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두 번째 터널이다. 아, 터널 안 각도가 휘어져 보였다. 속까지 울렁거리고 몹시 메스꺼웠다. 점점 붉은 양탄자처럼 생긴 터널 벽이 돌돌 말리가 싶더니, 머릿속에 남아있던 보린의 얼굴까지도 돌돌 그 속으로 딸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 터널 천장 위를 올려다봤다. 빗물 자국이 여기저기에 얼룩져 있었다. 막, 허물을 벗고 있는 뱀들이 휘젓고 다녔다. 앞서가는 차 뒤꽁무니에서 밀려난 불빛이 확 눈 안으로 밀려든다.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아, 내 몸이 왜 이러지?......”
두 번째 터널을 반쯤이나 통과했을까? 갈 때마다 터널은 몹시 길다고 느꼈었는데, 오늘따라 더욱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는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나 같은 놈이, 무슨 뜬금없는 효자 질이란 말인가. 며칠 전부터 몹시 어머니가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절벽처럼 말라붙어버린 어머니의 젖가슴보단 도도하게 출렁대는 보린의 품에 얼굴을 묻는 게 더 모성애를 자극했다.

풍성한 여자의 살 냄새를 통해 주구장창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다는 욕망! 나는 그 누구보다 여자의 살 냄새에 발광했다. 그러고 보면 젊은 어머니의 풋풋하면서도 달달한 그 살 냄새를 몹시 그리워했을 수도 있다.  말라비틀어진 어머니의 젖가슴을 진저리치도록 외면하는 것은, 이제는 풋풋하면서도 달달한 냄새가 더 이상 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너나 할 것 없이 영원히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 일수도 있었을 테다. 유치하게도 죽음을 두려워하다니........ 하여, 계속해서 젊은 여자의 풍성한 가슴을, 절대로 말라붙지 않을 그런 가슴을 상상하며 보린의 육체를 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계속>

 

 이경 약력

대전문인협회 회원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03년, 첫 장편소설 ‘는개’ 출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소장(2003)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 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12년, 장편소설 ‘탈’출간
2012년, 제4회 김호연재 여성백일장 대상, 여성가족부장관상 수상
현재, 불교공뉴스 편집 이사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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