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을 때 일본은 남경학살과 만주침략에 대하여 중국 측에 용서를 구하며 수억 달러의 보상을 제의했다.

어렵사리 대륙을 통일한 중국 측은 몇 천 달러라는 외화가 필요한 시기였으므로 그렇게 큰돈을 보상하겠다는 일본 총리의 제안은 가뭄의 단비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측은 이를 정중히 거절하면서 일본에 대해 “옛일은 용서한다. 그러나 잊지는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용서하는 것과 잊지 못하는 것은 상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 가운데는 용서한다면 조건 없이 잊어주어야지 잊지 못하겠다는 것은 또 무슨 얘기냐 하며 중국인들의 알 수 없는 마음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은 가난하지만 구걸하지 않고 용서하되 잊지는 않겠다는 비수보다 더 무서운 뜻이 담겨있고,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던 일본은 이 말의 속뜻에 부끄러움과 섬뜩함을 동시에 느꼈을 것이다.

인간을 흔히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소한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우리를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만한 것은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우리들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의 이해에 직접 관계가 없으면 잊어버리는 습성이 생겼다. 때문에 일본 식민지라는 민족적 부끄러움도, 6․25의 비극적 역사도, 대한항공 사건이나 아웅산 테러도 나와 내 가족이 희생되지 않았다면 남의 일처럼 잊어버린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살기가 고달프고 최저 생계비를 벌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IMF는 옛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은 잊어버리는 것이 백 번 좋다. 그러나 잊으라고 해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 기억의 묶음이 바로 역사이며 이 역사는 미래의 지침이 된다.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 분이 남북화해에 앞서 그 동안 있었던 북쪽에 의해 주도된 잘못된 행위에 대해 먼저 관련자의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

가끔 돌출적인 말로 세인의 화제가 되기도 하는 분이기에 ‘좀 점잖게 계시지’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말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그 다듬지 않은 거친 말속에는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이 평양에서, 국방장관들이 제주도에서 만나 두 손을 잡고 웃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 국가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것이 사실인 것도 같다.

화해와 협조, 나아가 그 언젠가 이루어질 통일의 꿈을 꾸면서 수백만의 부모 형제의 목숨을 빼앗아 간 비극의 전쟁이나 사건들을 잊어버린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이왕에 트인 남북의 물꼬는 넓혀가고 그 동안 쌓였던 감정적인 앙금은 모두 다 용서하자.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꼭 기억하여 우리의 후손에게 그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자. 그것이 화해에 앞서 기억해야할 일들이다.

사단법인 한국차문화협회 충북지부장 / 사단법인 충북전통문화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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