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현스님의 스님 이야기

오래 살아도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뚜렷이 뇌리에 남아 있는 이가 있다. 또 그만그만하게 사람 좋은 이라고 평가받는 이가 있는 반면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 사람은 아주 싫어하는 이가 있다.

월해(越海)스님이 그런 분이다. 대개 누구나 좋아하는 이는 아주 뛰어나게 훌륭한 이이거나 별 일 없이 그저 그런 삶을 산 이이거나 그렇다. 그리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거나 활동적인 사람은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와 뜻을 함께하거나 도움을 받은 이는 칭찬하느라 입이 마르지만 뜻을 달리하거나 도움을 받은 기억이 없는 사람은 비판에 열을 올리기 마련이다.

종단 안에서 종무행정을 하다 보면 종도들은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하거나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규정을 들먹이며 해 주지 않거나 해야 한다고 말하고 그대로 행하면 욕을 먹기 십상이다.

그래서 대개는 자리를 피하거나 얼버무리는 경우가 많은데 월해스님은 그런 법이 없다. 딱 부러지게 된다거나 안 된다거나 하여서 반대의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은 싫어한다.

월해스님은 대전 금강정사(金剛精舍)의 주지다. 또 전북 완주 봉서사(鳳棲寺)의 주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전교구 종무원장이며 중앙종회의원이기도 하다. 종단의 유지재단으로 출발하였지만 종도들의 이해를 얻지 못한 탓에 개혁작업(?)의 일환으로 일반법인으로 바뀌어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재단법인 한국불교태고원 이사장이 되어 전임 원장의 일을 바루는데 힘쓰고 있다.

총무원 총무부장, 종무조정실장, 행정부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런 종무행정의 요충지에 있으면서 받는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이다.

월해스님을 인상 깊게 본 것은 대전 엑스포가 열렸던 93년도였다. 대전 엑스포는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총 93일 동안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 내 도룡지구에서 열린 세계적인 박람회였다.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 전문박람회로서 개발도상국에서는 처음 개최되었으며, 108개국과 33개 국제기구의 참가로 사상 최대규모를 기록했다. 주제는 '새로운 도약의 길',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 '자원의 효율적인 이용과 재활용'이었다.

외국인 67만 5,000명을 포함하여 총 1,400만 5,808명이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국민들에게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확실히 인식시키는 '교육의 장'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때 불교계에서는 불교관을 운영하면서 불교의 좋은 이미지를 보이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막상 일을 하는 데에는 이만저만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불교관을 이끌어가는 견인차 역할을 한 이가 바로 월해스님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태고종에서 엑스포를 시작하기 열흘 전이 7월27일 갑천변에서 엑스포성공기원법회를 봉행할 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가 바로 월해스님이다.

물론 대전교구의 책임을 맡아서 그런 부분도 있지만 지금 원로이신 원법(元法)스님과 함께 대전교구 종무원 소속 스님과 신도들을 5일간이나 총동원하여 행정지원과 인력 및 자금 지원 그리고 뒷수발까지 아무런 불평없이 해주어 원만하게 봉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96년도에 내가 젊은 나이로 총무부장을 맡아 종단 조직 개편과 정비사업을 벌일 때 역시 전국 시도교구 종무원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강원도의 백운(白雲)스님과 제주도의 수열(守悅)스님도 적극적이었다. 2002년에 개최한 월드컵의 유치전이 한창이었을 때가 1996년이었다.

마침 총무원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다른 부장들과 협의하여 민간차원의 지원을 하기로 하고 2002월드컵유치 성공기원법회를 한강 둔치마당을 빌려서 봉행하였다.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던 월주(月珠)스님 등 이웃 종단의 대표들과 김 종필(金 鍾必) 씨 등 많은 외부인과 태고종도들 1만여명이 동참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도 물론 월해스님이 책임을 맡고 있는 대전교구에서 인원동원과 의사결정에 적극적이었다. 그 행사는 민간단체에서 개최한 유일한 행사였다. 우리의 믿음이기는 하지만 민간단체 유일의 노력으로 월드컵을 유치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가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이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는 정부에서조차 월드컵유치 성공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을 때였기에 민간단체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월해스님은 대전불교사암연합회를 성공적으로 이끈 몇 안 되는 스님이다. 묘하게도 대전 사암연합회가 회원 서로간에 반목이 많아서 이웃 종단에서 책임을 맡으면 꼭 깨지는데 월해스님이 맡아서 아주 단합이 잘되고 그런 화합을 바탕으로 엑스포 불교관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지역사회와의 유대도 튼튼하게 강화하였다.

완주 봉서사의 주지를 맡았을 때의 일이다. 열반하신 전임 주지스님의 자제분이 스님(법원스님)인데 봉서사의 신도들과 마음이 맞지 않았는지 자격과 자질이 부족하여 절을 보호유지할 수 없다고 사찰 측 사람들이 총무원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종단에서 직영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적임자를 찾았는데 분규사찰이고 어려운 재정 형편상 모두들 가기를 꺼려하였다. 어쩔 수 없이 총무원의 결의로 당시 총무부장이던 월해스님이 주지를 맡아서 일을 처리하였다.

그런데 자신의 위치를 찾아보려는 마음에서 법원스님이 조계종 측에 줄을 대었다. 전 도선사 주지인 광복스님이 봉서사 주지를 맡았다며 사람과 돈을 동원하고 조계종의 힘을 활용하여 한 때는 조계종승려들이 월해스님 등 우리 태고종 스님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봉서사를 점령하여 몇 개월동안이나 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월해스님은 굴하지 않고 주변의 스님들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봉서사를 다시 회복하고 요즈음은 그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몰라보게 달라지도록 여러 채의 전각을 신축하거나 확장하여 대가람의 면모를 찾아가고 있다.

재판을 통해서도 봉서사는 태고종단의 사찰이며 공개념을 지닌 것이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당시 조계종측에서는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로 되어있는 봉서사의 주소를 용진면 구억리로 표기되어 있는 자료를 제시하였다가 잘못임을 알아내고 그 부분을 지워서 제출한 우스운 일도 있었다.
 
또 당시 서울 봉원사, 진안 마이산 탑사에 이어 봉서사까지 태고종에서 조계종을 상태로 승소하자 종도들의 사기가 더욱 올라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당시의 가람수호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고 불끈 의기가 솟기도 한다. 월해스님은 그 때 종단에 요청해서 봉서사 수호의지를 다지는 법회를 봉행하되 사회적 의미도 담기 위해 “온생명운동 실천 포살영산수륙법회”라는 이름으로 봉행하였다.

종단 아니 불교법회 역사상 유례없이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7천여명의 4부대중이 질서정연하게 법회를 봉행함으로써 완주와 전주지역사회에서 태고종과 봉서사를 제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봉서사를 되찾고 지켰으며 서울에서 3천불을 이운해 모셔서 삼천불전과 선방을 갖추고 축대불사를 진행해서 아주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다.

“어머니를 잘 모신 진묵(震黙)대사의 얼을 되살려 효행문화의 전승도량으로 그리고 작은 석가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수행의 도량으로, 한편으로는 중부권의 태고종 총림도량으로 가꿔갈 계획”이라는 월해스님의 원(願)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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