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법현(無相法顯)열린선원원장

 

 

 

 

 

 

 

 

 

 

[불교공뉴스-불교] 안녕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인도 작은 나라의 왕자로서 인생에 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다가 마침내 출가하였습니다.

출가하여 여러 스승들을 찾아가서 괴로움의 묶임에서 벗어나 해탈(解脫)을 얻고자 가진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끝내 해탈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스승들에게 명상의 기본 방법인 선정삼매(禪定三昧)를 계발하는 방법을 지극히 익혀서 상당한 진척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도 근본적인 해탈은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수행법을 찾아내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 괴로움을 벗어나서 영원한 행복, 지속 가능한 행복인 열반(涅槃)을 얻은 날이 바로 성도절입니다. 싯다르타가 6년 10개월간의 수행을 마치고 스스로 붓다임을 확인하여 고요한 기쁨을 누린 날입니다.

남방불교국인 인도,미얀마,태국,스리랑카 등에서는 태어난 날도, 깨달은 날도 5월 또는 4월 보름이라고 합니다. 뒤에 전달받은 북방에서는 날짜 계산법의 차이로 태어난 날은 4월 초파일, 깨달은 날은 12월 초파일이라고 합니다. 중국 한나라 즈음에 들어갔을 때 남방의 태음력과 북방의 태음력의 차이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신앙적 사실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자그마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올해가 2603주년 부처님 되신 날이랍니다.

싯다르타가 6년이 넘는 동안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대로 선정수행과 고행을 열심히 하고 스승들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고요한 기쁨을 누리는 상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행으로 약해진 몸을 씻고 유미죽을 먹어 기운을 차린 뒤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용맹정진한 기간이 일주일이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성도일을 앞두고 일주일동안 정진하는 전통이 생겼는데 중국에서도 참선으로 정진하는 것을 선칠(禪七), 염불로 정진하는 것은 불칠(佛七)이라하여 지금도 따르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칠일간 용맹정진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우리나라의 해인사, 대만의 법고산사 등에 선칠(禪七)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으며,중국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2천여명의 불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7일간 나무아미타불 정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금강산 건봉사에 염불만일회 전통이 있었고,동산반야회라는 신행단체에서 지금 6천일 넘게 나무아미타불염불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날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경전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십시다.
“마치 큰 나무들이 빽빽한 숲 속을 헤매다가 고대인들이 다녔던 길을 발견 한 것 같았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살았던 거대한 도시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도시를 복구하여 다시 발전시키는 것과 같다. 나도 그와 같이 옛 길을 발견 한 것이다. 내가 발견한 옛 길이란 옛날에 올바른 깨달음이 얻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이었다. 그 길이 바로 팔정도이다.”

처음 깨달은 분이 석가모니부처님이어서 우리가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부처님은 옛날에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걸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옛 부처님들이 걸었던 그 길은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면 옛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새로운 옛 길”인 셈입니다. “오래된 새 길”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깨달음을 얻은 순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제 내 마음은 업 형성을 멈추었고 온갖 갈애(渴愛, tanha) 다 끝내버렸네.” 이뤄진 것,모여서 만들어지는 것,형성된 것은 다 스러지고,흩어지고,부서집니다. 그러기에 부서지지 않는 고요한 기쁨인 열반(涅槃, nibbana)을 최고의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최고의 목표인 열반을 이루면 온갖 갈애가 없어지고, 갈애를 모두 없애면 형성되지 않은 것을 이룹니다. ‘열반이란 깨달은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열반이라는 것을 보아야 깨달음’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수 없는 삶의 괴로움을 갖게 하는 윤회의 원인인 집짓기가 없어져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읊었습니다. “너는 다시는 집 짓지 못하리. 너의 모든 서까래 부서지고 마룻대 또한 부러 졌도다.”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집짓는 이를 찾아서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집을 짓는 다는 것은 바로 세상에 태어나 돌고 도는 윤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괴로움의 시작이지요.

부처님은 “오 집 짓는 이여, 드디어 너를 찾아냈도다”라고 그 첫 기쁨을 노래하셨지요. 집 짓는 이라고 비유되는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의 작용 그리고 그것들이 지어내는 여러 가지 현상과 규칙들(法, dhamma)을 잘 살펴서 알게 되면 집짓는 이가 집을 지을 수 없게 됩니다. 마치 햇살이 들어오기 전에는 곰팡이 등 균들이 살아서 여러 가지 질병을 만들어내지만 밝고 따뜻한 햇볕이 쬐면 균들이 없어지고 질병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것들이라도 생겨난 것은 변하게 마련이고 부서지게 마련입니다. 인생에 비유하면 아무리 지식과 돈과 아름다움이 흘러넘쳐도 끝내 늙고 병들고 죽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흐름에 밀려서 스스로의 의지와도 관계없이 수없는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태어남은 언제나 실로 괴로운 것”이라고 말이지요. 세상에 태어난 누가 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역사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 난 이가 그런 적이 있습니까? 오늘의 여러 곳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이들도 모두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나 찾지 못한 채 수많은 태어남의 윤회 속을 줄곧 서둘러 왔었네” 때문입니다. 바로 집짓는 이를 찾지 못해서라는 것이지요. 원인을 찾지 못하면 결과를 얻을 수 없지요. 병의 원인이 마음의 문제인지, 음식의 문제인지, 휴식의 문제인지, 과로나 부딪침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괴로운 이유, 괴로운 삶의 모습을 이어가는 이유 즉 윤회를 계속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쁨에 들끓고 슬픔에 가라앉기를 계속하는 윤회에서 벗어나 고요한 기쁨, 움직이지 않는 평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것을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들에게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석하신 대중 여러분을 비롯해 “누구나 이 법문을 듣고 올바른 믿음을 가지면 청정한 수행을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청정한 수행을 계속하면 부처님처럼 윤회에서 벗어나 고요한 기쁨, 움직이지 않는 평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냥, 대충, 아무렇게나, 조금’해도 될까요? 덮어놓고 오래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법을 제대로 익혀서 수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이 가죽과 힘줄, 뼈만 남고 피와 살은 다 말라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정등각(正等覺)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노라”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해야 합니다. 어려운 말씀이지요? 시간과 기간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한 번 시작하면 적어도 두세 시간 이상, 그리고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쓰는 필수시간을 빼고는 수행에 전념해서 그 기간이 일주일 이상이면 반드시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아! 살기가 복잡한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느냐고요? 그렇지요. 복잡하지요? 그렇다면 목표를 낮춰 잡아서 자그마한 행복을 얻으면 됩니다. 아! 지속이 가능한 참 행복을 얻고 싶으면서 일주일도 시간을 내지 못한다고요?

그럼 어떻게 하셨는가? 6년 동안 다른 이들의 가르침을 따라 함께했던 선정(禪定, samatha)을 기본으로 합니다. 먼저 모든 것이 주의를 온전히 기울여 낱 마음이 되지 않고 온 마음(專念, sati)이 되게 하여, 그 다음에 몸과 마음의 현상을 자세하게 살폈습니다. 세밀하고 자세하게 잘 살피는 것을 위빳사나(觀, vipassana)라고 합니다. 몸(身, kaya)과 감각(受, vedana)과 마음(心, citta)과 지각대상(法, dhamma)을 살피는 것이 바로 '반드시 붓다에 이르는 길(ekayana maggo.一乘道)',‘꼭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여 전생(前生)도 보고, 업(業)의 작용도 알고, 연기(緣起)를 깨달아 윤회를 벗어나는 길을 알고 고요한 기쁨, 움직이지 않는 평화를 얻으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제가 무엇으로 했고 여러분은 무엇으로 알았습니까? 말씀으로 하고 말씀을 들어서 이해하시지요? 그냥 다 이해가 바로 되시던가요? 그렇지 않지요? 우리나라 사람에게 우리말로 하는데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요? 말하는 사람의 여러 조건과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이해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요. 그 말씀에 들어있는 ‘참뜻(眞意), 본뜻(本意), 숨은 뜻(密意), 행간의 뜻(間意)’을 알아내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쉽지 않지요? 그렇습니다.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스스로도 행복하고, 관계있는 이와도 평화로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이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인 중국에서는 다른 이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오해하거나 오해받으면 삼족 아니 구족이 멸해지는 아픔을 겪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당송시대 수행자들이 말씀(話頭)을 주제로 명상하게 한 것이 간화선(看話禪)의 전통입니다. 화두의 두(頭)는 뜻이 없는 허사라 ‘말머리’가 아니라 ‘말, 말씀’의 뜻입니다. 그래서 선사들이 제자들을 지도하던 수행문답을 담아 놓은 가르침, 책들을 살펴보면 스님들에게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재가 거사들에게 더 많은 애정을 기울였음도 알 수 있습니다. 재가불자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생기는 말씀이지요?

위빳사나를 수행하든, 간화선을 수행하든 각자의 기호와 해오던 방법을 따라서 하십시오. 어느 것을 수행하든 몸과 마음의 현상 그리고 그것을 나타내는 말씀을 잘 살펴서 제대로 봅시다! 제대로 말합시다! 제대로 생활합시다! 그리고 행복을 누립시다! 쭈-욱! 고맙습니다.

무상법현(無相法顯):스님.열린선원원장,전태고종총무원부원장,불교생명윤리 협회 집행위원장,KCRP종교간대화위원장, 사찰림연구소 이사,btn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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