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군민장학회에 장학금 2천만 원 쾌척

 

-2009년 군민장학회에 장학금 2천만 원 쾌척
-속리산 찾는 노점상들에 국수를 제공하기도
이 사람 이옥선 할머니(보은군 속리산면 사내4구)

평범한 촌부로 살지 못하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종군위안부란 희생양이 된 여인들의 한 맺힌 운명은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일본의 인권 찬탈은 극에 달했다. 러일 전쟁, 청일 전쟁을 이유로 끝내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중국에까지 종군위안부인 정신대로 끌려갔다. 수많은 목숨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죽어갔고 그 속에서 인권 유린된 여성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들 중 한 사람인 이옥선 할머니는 억울했던 운명을 호소하며 가슴으로 위안 받고자 근검절약해 모은 2000만원을 후학양성기금으로 군민장학회에 선뜻 내놓았다. 결코 불운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고 용기와 희망으로 하루하루 이웃들과 나눔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 한 여성을 조명했다. 〈편집자 주〉

“요즘은 다리가 몹시 아파 약을 먹으며 운동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거나 하려면 전동차를 이용해야 해. 아무리 추워도 법주사에 올라가 법회참석도 하고 기도도 올리곤 해요. 이 늙은이가 한 일이 무에 있다고...”
무조건 사람을 반기며 겨우내 몹시도 추웠던 외기에 쏘여 발갛게 언 볼을 어루만지며 최근 근황에 대해 이렇게 밝히는 정무생 토끼띠인 이옥선(85) 할머니다.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인생이 행복
속리초등 인근 한 골목 안 주택가에 한 몸 의지하며 사는 그는 아픈 다리를 위해 먹는 약으로 한쪽 벽에 눈에 띄는 글루코사민, 비타민제와 운동하러 다니다 구한 약초 등을 직접 다려 먹는 민간약이 고작이다.
“요즘엔 다리가 하루하루 더 아파와 움직이기 곤란한 것이 불편이야. 그러나 나중에라도 양로원 같은 곳에는 가기 싫여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지. 이웃들과 사는 것이 내겐 행복이야.”

◇중국~신의주 거쳐 귀국 보은 정착
대구출생인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은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고 있을 16세 때였다.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무지함이 차출 원인이 되었다고 굳게 믿는 그에게는 세상 피붙이라고는 대구에서 살고 있는 여동생 하나가 있다.
“중국에서 구사일생으로 신의주를 거쳐 대구로 돌아왔을 때가 방년 19세나이 였고 따발총에 놀란 난 미친 마음으로 고향을 떠나 걸어 걸어 당도한 곳이 바로 옥천이었지. 보은에서 4~5년 살다가 속리산에 눌러 살게 된 게야. 전에 내가 배워둔 판소리 덕에 당시 사람들이 속리산에 놀러오면 장구치고 북치고 소리하는 것으로 먹고 살았어. 그 때는 잘한다는 소리를 셀 수 없이 많이 들었지. 창부타령도 하고...그렇게 더불어 살아온 것이 벌써 65년 됐어. 나에겐 이곳이 고향이야. 이곳에 들어와 마흔 세살 때 족두리를 썼지. 그 후 18년동안 일부종사했지요.”

◇이웃사랑 나눔 정신으로 보람 찾아
못 배운 한, 종군위안부로서 한 평생 가슴에 못을 박고 살아온 그의 비운마저도 이웃에 대한 나눔 정신은 늘 그의 가슴 속에 한 평생 모질게 살아가게 하는 강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끌려갈 당시 내 나이 꽃다운 16세였어. 초등학교도 못나와 가갸 뒷다리도 몰라. 그래서 일본 놈들이 무지한 동네 처녀들을 모두 붙잡아 간 게야. 배움이 있었으면 시집가서 행복하게 들 살고 있겠지. 그런 연고로 그렇게 좋아하는 두부조차 사먹지 않고 푼푼이 모은 돈이야.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내놓은 게지.”

◇국수 삶아 속리산 노점상에 대접
2년 전, 군민장학회에 장학기금으로 선뜻 내놓은 2000만원은 그에게 있어서 부자들이 내놓는 억대와도 맞먹는 귀한 것이었으리라.
손봐 줄 사람 없어 비만 오면 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방 벽이 무너질까 작년에 겨우 손질해 살고 있지만 아프고 노쇠한 육신을 제외하곤 마음만은 천생 부자(?)로 사는 그다.
“아침 일찍 속리산으로 돈 벌러 오는 노점상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국수를 삶아 한 그릇 먹게 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지. 일찍 오기 위해 아침들을 거르고 오기 십상이거든. 국수 삶아 양념장 만들어 전동차에 싣고 가 한 그릇 씩 말아주면 어찌 그렇게 꿀맛처럼 먹는지 원.”
놀러온 이웃집 할머니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친구의 선행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나눔 정신은 외롭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마르지 않는 생의 원천인 것이다.

◇사후 걱정에 잠 못 이룰 정도
“걱정이 있다면 나 죽고 나면 누가 날 장사해서 묻어 주느냐 하는 생각이 들 때야. 자다가도 이 생각에 이르면 벌떡 일어나 산소는 어디에 쓰고 제사는 누가 지내줄꼬 하는 것이...”
홀로 사는 어려운 환경의 독거노인의 공통된 걱정거리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는지 과연 의문이 드는 순간이다.
“그래도 지금은 호강이야. 나라에서 살라고 돈 주고 홀로 사는 생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행복해져. 너무나 지옥 같은 속에서 살아나왔기 때문일 거야. 자다 깨도 문득문득 난 살아있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곤 하지.”
기초수급자로 정부 지원금으로 살고 있는 그는 “당시에도 난 돈 귀한 줄 알고 넝마 옷 파는 곳에 가서 천 끊어다 옷 지어 입었어. 장구 치는 여편네가 싼 옷 입고 노래한다고 말들도 했어. 그러나 그게 무언 대수야.”라고 말한다.

◇미륵전에 호롱불 켜고 기원 기도
그는 순전한 마음으로 1년에 7만 원 정도를 보시해 법주사 미륵전에 호롱불 7개 켜고 가족과 관련된 사람들을 위해 기원하고 있단다.
“건강을 달라 하고 시형 딸(남편소생을 그렇게 말함)을 위해, 돌아간 남편을 위해...그리고”
말을 끊자, 잠시 상념에 잠기듯 기억에 남아 있는 가족을 위해 또 다른 이웃을 위해 그렇게 치성 드리는 마음으로 그는 살고 있었다.

◇평소 이웃 간 된장 간장 정 나눠
마을 이웃인 이완자 할머니는 “요즘 정말 그런 사람 없어요. 당신은 고생하면서도 그런 돈을 선뜻 내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야. 요즘 그는 노인정에도 안 나와요. 석 달 정도 되어 가나봐. 관절염도 심하고 말 한마디 잘못해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봐서라고 하네요. 거기다가 간장 된장이 없다면 전동차 타고 가서라도 갖다 주고 하는 사람이요. 동네사람들은 잘 몰라요. 왔다 갔다 하며 정을 나누지 않고는 이런 사실을 잘 모르지.”라고 한다.

◇20년 간 ‘태극기 게양’ 선도적 역할
위안부관련 방송을 보고나서 그동안 수치심으로 숨겨왔던 위안부란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민간단체와 함께 일본을 7회나 건너갈 정도로 국제적으로 알리는데 앞장섰던 그였다.
또한 20년 간 대문에 태극기를 게양해 ‘태극기 할머니’로 불려져 온 그는 주민에게 국경일 태극기 달기 운동을 선도해 오는 등 애국심을 발휘했으나 지금은 기력이 쇠약해져 방안에만 태극기를 두고 있어 아쉬워하고 있다.
부족하지만 남은여생 나눔의 실천으로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그는 오늘도 아픈 다리 이끌고 습관처럼 정 나누며 사는 일상을 꿈꾸고 있다.
/천성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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