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종 목사

모든 존재에게 있어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상황이라는 '현재'는
바로 직전까지 진행된 과거의 결과입니다.
지난날의 조건과 상황, 그리고 그런 삶의 환경에서
자신이 어떻게 대응하며 지냈느냐 하는 것이
바로 오늘이라는 나 자신을 낳게 되었고,
그렇게 보면 오늘에 대하여 신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얼핏 생각하면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과거'를
잘 갈무리하는 일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한 사람은
과거 또한 그렇게 별로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괜찮은 날이 많았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어떤 비틀린 사건이나 사고를 겪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오늘의 상황이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은
과거가 비록 어려움이 많았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어떤 계기에 삶의 태도와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을 경험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과거란 이미 일어났다가 지나간 일입니다.
때로 영화나 만화 같은 데서는
과거나 미래를 자유롭게 여행하는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물리학의 이론으로는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
적어도 현재까지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에
그 과거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은
전혀 생산적인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그것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심리적인 면에서나 정서적인 면에서 볼 때
과거는 단지 지나가고 만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현재가 단순히 현재가 아니라
과거가 현재 안에 뒤섞이기도 하고 교차하기도 하면서
그 현재를 엮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과거가 지나간 시간 속에
영원히 묻힌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결국 과거의 일이나 문제를
현재의 시점으로 끌고 올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여전히 갖가지 모양의 힘으로 작용하는
묘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임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해 가을,
청주의 공예박람회에 갔다가
우연히 한 스님과 만나
짧은 시간 동안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스님이 한 말 가운데
'소화되지 않은 과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짧은 만남이고 그리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지만,
그 자리에서 들은 그 한 마디는
나를 정리하는 데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소화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음식이라 하더라도
결국 몹시 위험한 독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과거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볼 때
이미 먹어치운 음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소화되지 못했을 때에는
아주 많은 과거의 일이나 말, 그리고 관계들이
현재에 독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는 착각은
과거는 현재의 자리에서 전혀 손 쓸 길이 없다는 생각인데
이 인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합니다.
되돌려 그 자리로 가서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으나
현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음,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화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는 겁니다.

과거가 아무리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결국
그것이 불행이나 비극의 씨앗일 수밖에 없음은
맛난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이빨 새에 끼었을 때 일어나는 일과 아주 비슷합니다.
비슷하긴 하지만 그 위험의 정도는 결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소화가 제대로 되어 있다면
그 과거가 아무리 불리하다 하더라도
현재가 홀가분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열리는 미래는
반드시 하늘에는 무지개가 걸려 있는
꽃길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삶이 행복을 향하고 있느냐,
불행을 향하고 있느냐 하는 갈림길은
과거의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소화시켰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삶이
과거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란 정치적인 것이나 사회구조적인 것이기 이전에
개인의 자아 안에서 먼저 실현되어야 할 가치라는 것도
이쯤에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가 단지 지나가 버리고 만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나 행동에
끊임없이 역할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현재라는 사실을
충분히 새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단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영향력은 현저하게 약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마술이라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갖가지 마술적 효과를 지닙니다.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과거와의 연관 속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삶으로 확인하는 일은 이만저만한 기쁨이 아닙니다.

사람이 과거에 매달려 있으면
현재 자기 앞에 있는 미래의 문을 그 스스로 열지 못하고,
절로 열려 있는 문에 떠밀려 들어간다는 것을
이쯤에서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의 지배를 받으며 거기 끌려다니고,
과거라는 이름의 망령이 시키는 대로 놀아나는 동안은
행복의 전령이 아무리 가까이 다가와도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할 만큼 불교에 대한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짧은 내 생각으로 볼 때 불교의 '업'이라는 것이야말로
'소화되지 않은 과거'를 가리키는 말은 아닌가 싶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개념이
'깔끔하게 정리된 과거로 인해 열리는 새로운 세계'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소화라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현재의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불명확한 가능성이 아니라
실현될 것이 분명한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소화는 그래서
역동적인 삶의 힘을 낳는 '역량의 샘줄기를 터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샘에서 길어올리는 것은
희망으로 열리는 미래라는 사실도 여기서 분명해집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과거는 단순히 지나가 버린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끊임없이 작용하는
또 다른 형태의 현재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인해서
현재에 얽혀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나 관계들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현재를 비극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미래에까지도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기도 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가닥잡아 하나씩 소화시켜 나가다 보면
그런 현실적인 문제들도 차츰
녹을 것은 녹고, 풀릴 것은 풀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글에서 나는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내가 그런 경험을 했다는 정도의
좀 막연한 말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차근차근 해 나가게 될 것이고,
이야기를 듣고 삶의 걸음을 여기에 맞춘다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날이 머잖아 올 것입니다.

이제 다음에는
좀 더 구체적인 과거로의 여행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글을 읽고 염두에 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앞날에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만한 일은
짓지 말자는 다짐입니다.
살면서 실수는 할 수 있지만
실패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 필요합니다.

될 수 있으면 큰 거울 앞에 서 보시기 바랍니다.
두 발에 고르게 몸무게를 싣고
다리는 곧게 펴고,
등은 반듯하게 한 다음 어깨에 힘을 뺍니다.
눈길은 콧등을 지나 자연스럽게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아주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겁니다.

'자, 지금이 시작이다.'

그렇습니다. 어둠은 걷히고 이제 행복여행을 하는 당신의 날씨는 산뜻한 맑음입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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