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디 흰 연꽃들이 줄지어 늘어서 자태를 뽐내는 하소 백련지!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대청리에 있다.

아름다운 연녹색이 깃든 백련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연밭이 바로 하소 백련지다.
하소(蝦沼)는 바로 새우못이라는 뜻이다.

새우(蝦)가 알을 품은 듯이 보이는 못(沼)이다.
그냥 흰 것이 아니라 신선들이나 입었음직한 연녹색 모시도포색이 깃든 백련(白蓮)이 얼마쯤이나 있었을까?

그곳에 1920년대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도량이 있었으니 그곳이 청운사(靑雲寺)다.
청운사의 주지로 살면서 신도들의 불전수입으로 사찰을 운영하지 않았다.

생산적인 것을 만들어서 안정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생각으로
연꽃을 많이 심어 특별한 것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아니 사찰을 운영하는 재정 기반 뿐 아니라 지역경제의 후원자가 되겠다는 마음을 냈다.
아예 하소백련단지를 조성하고 같은 이름의 영농조합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는 보기 드문 수행자다.
그가 청운사 주지 청운당(靑雲堂) 도원(道源)스님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도 왕성한 활동력으로 자신의 사찰 뿐 아니라
전국의 인연 있는 사찰의 탱화와 단청을 도맡아 하는고 있다.

탱화단청의 전라북도 인간문화재라면 특별한 기능이 있으므로
그것에만 매달려 다른 것은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불법에 목말라 있는 시민들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전법포교사이다.

정확한 교리체계와 수행 그리고 사회활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승려와 불자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역설한다.

그리고 FTA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농촌지역들을 보고 그들을 돕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청운사가 들어있는 청하면 대청리 사람들이 일찌감치 특성 있고 경쟁력 있는 생산품인
하소백련을 활용한 각종 차와 음식 등을 개발 생산하게했다.

그 결과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만든 지역사회발전의 지도자 스님이다.
그의 얼굴을 보면 지금도 내 나이또래로 보일만큼 동안이다.

하지만 연배는 십년을 보태야 같아질 만큼이다.
그가 그렇게 젊어 보이는 것은 그의 수행의 내공이 있어서라는 이유와 함께
늘 이웃에게 나눠주려는 마음이 넘쳐서 그럴 것이다.

그는 할아버지도 스님이고 아버지도 스님인 3대에 걸쳐 내려오는 내력이 있는 스님 집안 출신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이력을 다 밟고 곳곳의 포교원에서 불교학생회를 이끌며 포교에 앞장섰다.

그러면서 당시나 지금의 불교가 불교의 교학과 사상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사찰에 들어가 보면 법당에 모신 주불과 좌우의 협시불이 교학과는 틀리게 봉안되어 있거나,

후불탱화가 주불과는 다른 것을 모셔 놓기도 한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당의 앞이나 뒤 벽면에 그림을 그려놓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도 몰라 설명해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런 것을 바로잡아야 의식이 바로서는 불교를 실천할 수 있다고 보고 불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스승이시며 현재 전북교구종무원장인 도광(道光)스님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전주 승암사(僧岩寺) 만응(萬應)스님 밑에서 불화를 공부했다.
수없이 많은 밑그림을 따라서 그리는 초(草)작업을 할 때는
검지 끝에 못이 배일만큼 많이 하고 그리고 또 그렸다.

여러 경전에서 장난으로 그림을 그리더라도 결국 부처님이 되는 인연이라고 한 가르침을 생각하고
실제로 불보살님이 나타나신다는 생각으로 그렸다.
뿐만 아니라 승암사 강원에서 경론을 배우고 그림을 배우면서 의식(儀式)을 익히는 한편,

묵담(黙潭)스님께 계율과 수행을 배우면서 그 어느 곳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묵담스님은 태고종과 조계종에서 통틀어 대율사(大律師),대선사(大禪師)로 추앙받는 분이었다.

고불총림을 조성한 만암스님의 후예로서 백양사 뿐 아니라 호남 일대 더 나아가
제주도지역까지 그의 덕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 신심과 노력이 인정되어 2002년도에 전라북도 지정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태고종스님으로서 만봉(萬奉)스님께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전통문화 재현의 기술을 이어받아
명실공이 단청장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그는 이론가나 예술가들이 가지기 쉬운 교학적 배경에 관한 이해부족이나
불교수행에 관한 경험부족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매우 커다란 노력을 하였다.

이론으로도 실제 그림으로도 그리고 염불이나 참선 등의 불교수행법에 관해서도
일가를 이룬 수행자요, 예술가요, 산업가이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도이니 20여년이 지난 인연이다.
종단에서 주최한 연수교육 장소에서였다.

연수교육이니 특정강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기도 하지만
태고종도들이 가지고 있는 종단발전에 관한 의견과 방법론들을 모으기 위한
토론회를 개최하여 밤늦도록 토론을 하였다.

1백여 명의 참석스님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이미지를 선보였다.
단아한 용모와 분명한 말투 소신 있는 발표로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대학생들을 지도하는 젊은 스님의 이미지가 강했고 정연한 이론으로 주장하는 모습이
그저 내 또래의 뜻 맞는 스님으로 보였다.

그래서 종단의 부장 소임을 놓고 있으면서 예 추억이 떠올라
관악산 자운암 신도들을 데리고 성지순례를 청운사로 향했다.
가기 전에 전화를 넣었더니 바쁜 가운데도 어디 나가지 않고
나와 신도들을 맞이해 좋은 법문을 들려주었다.

우선 나의 신도들이니 서울에서
가장 활동 잘하는 스님이고 꼭 함께하고 싶은 놈이라고 추어주었다.

그리고 생산불교 이야기를 하는데 그의 눈과 입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뜨거운 그의 가슴이 느껴져서 모두들 감동의 도가니로 들어갔다.
그리고 더욱 좋은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청운사의 대웅전은 어느 고을 동헌을 옮겨지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고
선대의 불사였지만 무량광전(無量光殿)은
도원스님이 직접 구상하고 건물을 짓고 불화단청을 그려 넣은 전각이다.

그런데 우선 전각의 이름이 특이하다.
전각의 주불은 아미타불이므로 대개의 절에서는 미타전(彌陀殿)이라 하거나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 한다.

아미타불의 이름은 인도어에서 왔고 그것을 풀이하면 무량수, 무량광이지만
부석사 등 모든 절에서 무량수만을 쓰지 무량광전을 쓰지 않는데 그는 무량광전을 쓴 것이다.

홍천의 운곡(芸谷)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안양암의 법당이 역시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데
아미타전(阿彌陀佛殿)이라 하고 있는 것도 다른 절과는 색다르다.
청운사 무량광전의 색다른 점은 또 있었다.

아미타불의 정토인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수행법인 16관법(觀法)을
경전의 설명을 근거로 해서 직접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그래서 불자들이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수행을 따라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정말 이해하기 쉬운 그림에 그 옆에다 한글로 간단한 해석을 써 놓았다.
불자들에게는 정말 좋는 교육불화이다.

불교의 사상과 불화단청을 제대로 접목하고 생산불교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그가 한 노력은 또 있다.

청운사 주변의 농부들에게 연꽃을 심도록 하여 소득을 크게 늘려주었고
청운사의 신도들이 오더라도 직접 수행하고 기도하도록 하였다.

더욱 독특한 것은 신도카드를 없애고 부처님오신날이 되어도 하루등 ,1년등이라는 이름의 연등을 모연하지 않고 있다.

너무 혁명적인 일이라 일반 스님들이 그의 사상을 따르기 어렵더라도 의미 있는 일이라 아니하지 않을 수 없다.

단아한 그의 이미지, 조용한 그의 걸음걸이 그 어디를 보아도
그렇게 날선 개혁의 이미지를 찾을 수 없는 데
어디서 그런 강인한 정진과 개혁, 참여의 힘이 솟아나는 것일까?
도원스님은 종단의 선배스님으로 가까이 닮고 싶은 스님이다.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