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종 목사

아주 복잡한 사람의 심리작용 가운데
본인도 힘들면서 남도 괴롭히는
자극에 대한 반응양식이 있습니다.
고집이라든가, 턱도 없는 자존심,
피해의식이나 수치심,
이기적이지만 결국은 손해를 보게 되는 것,
까닭도 알 수 없는 두려움,
대부분의 폭력적인 성향들이 나오는 자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표면적 반응의 문을 열고
거의 존재의 심연에 가까이 있는
동굴 속을 여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서 마침내 그 뿌리를 찾아내고,
조심스럽게 그걸 뽑아낸다면
오늘의 여행은 거의 신비에 가까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에둘러 말할 것도 없이 본론부터 말한다면,
우리가 찾아가는 곳에 있는 녀석의 뿌리는
바로 열등감입니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까지 괴로움에 빠뜨리는
이 녀석의 짓거리는 그야말로
심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의 심리현상이
이 녀석의 장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이걸 그냥 두고는 행복은 까마득한 남의 노래일 수밖에 없습니다.

글 몇 줄로 이 깊은 뿌리를
뽑을 수 있느냐고 묻는 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실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등감이 나오는 자리를 알고,
그 놈에게 놀아나던 지난 날의 방식을 내려놓기만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먼저 열등감이 나오는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좀 더 말랑말랑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엊그제의 내 일상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나를 괜찮게 봐 주시는 이들이 없지 않고,
그것은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만,
나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있는 자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월요일 저녁
가까이 지내는 이가 모친상을 당해서 거길 갔는데,
마침 낯익은 이가 거의 없어서
처음 보는 이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저녁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시덥잖은 존재였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나름대로
한 가락씩 하는 이들이었고,
그런 그들이 보기에 나는
뭐 아무 데도 볼품 없는 꼬질꼬질한 중늙은이였음이
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나 태도에
그것이 그대로 나타남을 볼 수 있었는데,
그 자리는 내게 참 편안했습니다.
굳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음식에 성실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키도 작고, 가진 것도 없고,
언뜻 봐서 눈에 띄지도 않는 행색의 초라해 보임을
마음껏 즐긴 한 때였습니다.

만일 그 때 내가 그들에게 돋보이고 싶어했더라면
그 자리는 아주 불편했을 것이고,
나는 이런 저런 섣부른 몸짓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몸짓이 먹혔다면 재미도 났겠지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면
비참해져서 두고두고 가슴을 치는,
그리하여 씻어내고 싶지만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또 하나의 상처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몸짓이 성공이었다 하더라도
좀 시간이 지난 뒤에 멀찍이 떨어져서 보게 된다면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을 터이고 말입니다.

지금 나는 열등감의 뿌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뿌리는 바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지니고 있는
결함입니다.
자칫 잘못 생각하면
이 결함이야말로 존재의 한계이고,
모든 불행의 원천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인류사의 갈피를 헤쳐 보면 그렇게 인식한 것들이
때로 종교적 입장이 되어 포교의 수단이 되기도 하고,
철학적 기본개념이 되어
인간에 대한 물음의 출발점으로 본 경우도 있고,
문화나 문명 또한
이런 내용들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부작용이 가장 두드러진 것을 꼽는다면
서양철학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데아라는 개념을 내세운 플라톤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존재의 결함을 극복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 플라톤 철학이
어떻게 현대사회와 현대문명까지 이어져 왔는지를
낱낱이 설명할 만한 주변머리도 없고,
그러기에는 지면의 한계도 너무 뚜렷합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플라톤의 철학을 바탕에 두고 전개되어
여기까지 이른 현대문명은
인간을 모든 존재의 윗자리에 올려놓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결국 이제 그 존재 자체가
심각한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 내용은 생략을 하기로 합니다.

다만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은,
비극은 결함이 있다는 것이나,
또는 결함이 극복되지 않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결함을 자기 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결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드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아무리 다른 것들에서 성공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인생은 결국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 세상에 흠없이 완전무결한 상태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아니 그 존재의 기반이라고 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조차도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존재의 결함이나 한계는
그 실상을 이해하고 보면
그것 자체가 아름다움이고,
존재의 신비 또한 거기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지도 거기에서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자리도 거기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사 모든 깊고 그윽한 맛이
또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것을 미워하여 쳐부수려고 할 일이 아니라,
끌어안고 사랑해야 옳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당연히 있는 한 부분인 까닭입니다.

열등감이란 존재의 결함을 극복하고자 하는데,
결국은 극복되지 않는다는 것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열등감은
갖가지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부끄러워하는 것에 닿아 있고,
열등감이 정신적 문제까지 일으킨 경우는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것까지도
부끄러워하면서 감추거나
꾸며서 왜곡시키려고 하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이 올 때마다 다양한 반응을 하고,
그럴 때마다 자신은 수치심으로 거듭 위축되고,
상대는 그 때문에 또한 불편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낳게 되며,
이것이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 때문에 결함을 감추려고 갖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럴수록 존재의 근원이 계속해서 초라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때때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들 앞에서
일시적인 만족을 얻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 또한 결국은 자기 감정을 가지고
그 감정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 맨 마지막은 또한 자신의 위축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혐오와 연관되어 있고,
스스로를 포기하고 다른 무엇을 꿈꾸지만
자신이 포기된 현실은
결코 가능한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열등감을 끌어안고는
비극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짧은 삶을 마감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운명처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
안타까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열등감의 해소를 위해 해야 할 일은
결함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추고 위장할 일이 아니라,
자신있게 공개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함의 공개,
그것이 바로 행복의 문을 여는 비결입니다.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부끄러워 차마 못하겠다는 마음이 한쪽에서 거듭 꿈틀거린다는 것,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들여다보도록 합니다.
남성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은 여성입니다.
그래서 남성은 자연스럽게 여성에게 끌리게 됩니다.
내 결함의 대극을 만나는 것,
그게 바로 생명이 지향하는 완전함에의 접근방식이고,
거기서 생명력이 나오게 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결함이야말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적인 존재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함을 포장하지 않는 겁니다.
또한 공개했을 때 거기서 사랑이 일어나야지,
그걸 일으키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공개된 결함을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이해하는 이들 앞에서는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주의해야 할 일입니다.
감추는 것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입니다.

사슴은 사슴 앞에서 결함을 공개하는 거지,
사자나 늑대 앞에서는
그걸 공개하지 않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고 보면 동물들의 발정기에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들이
자신의 결함을 공개하는 현란한 언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진다는 것은
경제적 조건이 전보다 나아진다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충분합니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서 서로의 존재 의미를 이해하고,
더불어 사랑하며 노래하고 춤추는 방식을 찾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조건이 아무리 훌륭해도
결코 행복은 오지 않는 법입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결함을 공개하면서
사랑을 통해 기쁨을 얻고,
그런 분위기가 자꾸만 펼쳐지는 곳,
그래서 생명이 생명으로 꽃피고 열매맺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역할을 마친 생명이 죽는
일련의 모든 과정들이 축제가 되는 것,
그런 마당이 넓어지는 것이야말로
세상이 좋아진다고 할 수 있는 결정적인 현상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이제까지 노출을 꺼려서 겪어야 했던
갖가지 행동양식이 익숙해져서,
때때로 그것이 튀어나오려 할 터인데,
그걸 하나씩 고쳐가는 겁니다.
습관을 고치면 운명이 바뀐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바로 이런 습관들을 내려놓는 겁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이제 불필요한 시달림은 차츰 줄어들 것이고,
그것이 쌓이다 보면
지난 날 불행의 씨앗이 싹트던 자리에서
행복의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도둑놈이 와서 심어놓고 간
열등감이라는 나무의 그늘 탓에 싹트지 못했던
태어날 때부터 받아가지고 온
그 행복의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겁니다.

겨울이라고는 하지만 이제 곧봄입니다.
햇살이 나날이 포근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볕바른 곳에서는 새싹이 돋고,
시냇가에는 버들강아지들이 눈을 뜨고 있습니다.

이 봄바람이 우리 행복여행 길벗들의 삶 속에도 불어서
버들강아지보다 더 부드러운 행복을 맛볼 수 있는 일이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것이길 바라며
두 손을 모읍니다.

날마다 좋은 날!!!
- 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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