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종 목사

글을 쓰면서
읽는 이와 때때로 만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며,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이 몇 분의 행복여행 동행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분들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즐겁게 읽고 있으나
그걸로 행복을 얻게 될지 자신이 없다고도 했고,
또 다른 이는 행복이라는 게 현실의 벽 앞에서
너무 무력한 희망인 것 같다고
역시 긍정적인 기대를 그다지 보이지 않는 말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분들의 분위기가,
부대끼고 물고 물리는 생존현장에서
멀찍이 물러나 앉은 사람의 팔자 좋은 독백을 듣는 것 같다는
무언의 지적도 있는 듯 보였습니다.

사실 나는 남들에게
제법 팔자 좋은 상황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 전부는 아닙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비참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 놓인 적도 있었고,
그것이 지금도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으며,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소설 같은 일을 겪은 적도 적지 않습니다.
현재의 상황 또한 전체적으로 볼 때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보았고,
그것을 꾸준히 연습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글을 쓰는 내 옆에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한 권은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진 홍자성의 『채근담』이고,
또 한 권은 갈홍이 쓴 『포박자』입니다.
지혜의 보물창고라고 하는 자성의 『채근담』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며,
때때로 살아온 길을 돌아보게 하는 훌륭한 내용을
풍부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에서도 풍기는 분위기처럼
현실을 훌쩍 떠나서 안빈락도의 삶을 살아야
비로소 될 것만 같은 현실도피적 측면이 강합니다.

그 중 한 구절을 눈에 들어오는 대로 소개해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그것이 족한 줄 아는 이에게는 무릉도원이고,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에게는
별 볼일 없는 시시한 일들이며,
일어나는 모든 세상 인연은
그것을 잘 쓰는 이에게는 삶의 기회이고,
그렇지 못한 이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말이 언뜻 보입니다.
명구이고 훌륭한 말이기는 하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부당한 상황에 놓인 이에게는
이 말이 잠꼬대처럼 들리거나
오히려 짜증을 돋구는 것일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포박자』는 조금 얘기가 다릅니다.
신선이 되는 길을 일러준다는 다분히 도교적인 이 책은
일반인이 꼭 읽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을 줄 압니다.
그런데 나는 다른 필요에 의해서 읽고 있는 중인데,
그 가운데 오늘 풀어낼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은 내용이 있어
잠시 소개를 해 볼까 합니다.

갈홍은 이 책에서 세 가지 종류의 신선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도를 깨달아 하늘로 올라가 있는 천상의 신선이고,
다른 하나는 도를 깨닫고 깊은 산중에 은거하는
세속의 번잡함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자성의 책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신선,
그리고 마지막은 도를 깨달았지만 속세에 남아
다른 이들과 어우러져 살면서 자신의 경지를 놓치지 않는 신선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신선의 존재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 고유명사를 일반명사로 바꾸어 번역합니다.
곧 신선이란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게다가 갈홍은
속세의 신선은 전쟁터에서도 역시 신선의 삶을 놓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현실의 불리한 조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묻게 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앞에서 내가 살면서 극적인 비참을 겪은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일을 들춘 데에는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렵의 경험들이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훈련기간이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칫 비관에 빠져 한탄이나 하고 지나갔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어
지금까지도 진물을 흘리며 괴로움의 늪을 헤매고 있었을 것임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의 내게 한 가지 뚜렷한 이정표가 있었고,
그것이 큰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그건 나 자신을 함부로 내동댕이쳐
시궁창에 뒹굴게 할 수 없다는 의지였습니다.
나와 내게 주어진 인생이 보물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을
그 어디에도 헐값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과감하게 거절할 수 있었고,
스스로를 천박하게 하는 그 어떤 요구에도
단호할 수 있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수없이 귓전을 간질이며 나를 홀리려 했지만,
그 때마다 그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고,
내 인생 또한 그러하다는 것만은
인정해 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켜냈습니다.
그렇게 견디며 지나가는 동안 힘이 생겼고,
그 힘으로 현실이라는 바다를 헤쳐가고 있습니다.

부당한 현실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섣부른 타협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찌보면 참 무모하고 미련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만이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재산이라고 생각하며
오늘까지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란 참으로 어지럽고 복잡한 곳이라서
부당해 보이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한 다가오기도 합니다.
도대체 사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게 하는 수많은 일들은
때로 절망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한 번 무릎을 꿇고 나면
더 큰 일에 다시 엎드리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기고,
한 번 타협했으면
다시 그보다 더 큰 것을 요구하는 곳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여러 번 그렇게 엎드리고 타협하며 살았으니
이제 이 늪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이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난번에
'지금 여기 있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행복여행이라는 말을
강조점을 찍어가며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거슬리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전에 언젠가 우리 딸아이가
'여름이 싫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파리나 모기와 같은 성가시게 하는 벌레들이 많아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받아서 내가,
그건 싫어할 일이 아니라 고마워해야 할 일이라고,
그것들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먹을 것도 자랄 수 없고,
입을 것도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그러니 그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존재가 안심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다만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런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면 되는 거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내 말을 들은 딸아이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알아듣는 딸아이가 또 다른 내 기쁨이었던 까닭입니다.

세상은 좁게 보면
결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곳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존재의 고독이고, 소외감의 근원입니다.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젓가락을 들고 살점을 뜯어먹겠다고
이빨을 드러내고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곳,
어디에도 내 편이 없는,
그래서 끊임없이 걷어채이고 짓밟히면서
안락한 쉴 곳을 바라는 희망마저도 잃어버리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모르지 않아 그게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인생이 비참하게 보이는 때는
나 또한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인데,
그럴 때는 삶이 온통 불행이고 비극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내가 먹잇감을 발견해서
그것으로 포식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가슴을 열고 크게 뜬 눈으로 보면
우주가 나를 위해 차려진 밥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일 수 있도록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을 해 나갈 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존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며,
세상은 언제나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잔치마당이라는 사실을.
다만 그 잔치에 나아가는 내가
준비할 것이 조금 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반드시 행복여행이 될 것임을 나는 자신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 들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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