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미경

오전 10시를 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잠을 털어 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누워 있다기보다는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반쯤 감긴 눈으로 방안을 살폈다.
 
언젠가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책상 위에 반듯하게 꽂혀 있는 책과 컴퓨터, 시계, 그리고 전화, 스탠드, 액자 모두가 어제와 다름없이 얌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때서야 긴 한숨이 품어져 나왔다.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보였다. 어찌나 꿈을 요란하게 꾸었던지 침대 시트가 방바닥까지 밀려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블라인드를 잡아당기려다 그만두었다. 아차, 싶었다.

지금쯤이면 머리가 희끗희끗한 김 형사가 어슬렁거리고 나타날 시간이었다. 손가락으로 블라인드를 살짝 벌려 밖의 동정을 살폈다. 아뜩하니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코카콜라 로고가 찍힌 붉은 파라솔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밖은 너무도 조용했다.

김 형사의 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웬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김 형사는 먹이를 찾아 배회하는 표범처럼 304호 그녀가 죽은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지금이 바로 그가 나타날 시간인 것이었다.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까칠한 수염이 손가락사이로 비집고 나왔다. 면도를 하지 않은 게 일주일은 되었을 성 싶다.

아, 우라질 면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궁리를 짜도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묘책? 애당초 무슨 묘책이란 말인가. 내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으면 그만이지 않는가.

하필 내가 용의자로 몰렸단 말인가. 그깟 도깨비바늘 때문에 청춘이 구만리인 내 인생을 시궁창속으로 처박을 수는 없지 않는가.

어쩌면 김 형사는 도깨비바늘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김 형사는 개 코를 가진 게 분명했다. 도깨비바늘은 도청기 이름이다. 일반 도청기에 몇 가지 보완 장치를 보충했는데, 김 형사가 바로 그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물론 김 형사는 도청기의 이름이 도깨비바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분이 더럽고, 불안한 것은 내가 304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렸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건이 어떻게 풀리고 있는지 전혀 정보를 들을 수가 없었던 터라 숨이 막힐 지경이다.

304호 그녀가 살해당하던 날이었다. 나는 그녀의 방에서 나오다가 한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있어서 그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뒷모습은 어디서 본 듯했다. 약간 휘어진 다리와 구부정한 어깨 위로 휘감아 도는 담배 연기가 분명 낯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혹 그 자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살인 누명을 쓸 것이다.

그녀가 죽던 날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누드화와 도청장치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의 초상화를 감쪽같이 치웠다. 그런데 다음 날 경찰서로 불려가 취조를 당했다.

조사를 받는 동안 나는 결코 304호 그녀를 죽이지 않았으며, 단지 신음 소리가 나서 룸으로 갔을 뿐이라고 말했다.

오히려 나를 찔러 박은 그 자가 의심스럽지 않느냐고 김 형사에게 되물었다. 그런데도 김 형사는 마치 내가 사건을 은폐하려고 말을 둘러 대고 있다는 듯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 시간에 그녀의 룸에 갔었느냐는 김 형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가 보기에는 그날 내가 304호를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살인 용의자로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증거물이 없어서 하루 만에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그렇다고 모든 의심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진범이 체포되지 않는 이상 용의자라는 더러운 혐의를 벗을 수는 없었다.

그 뒤로 김 형사는 치밀하게 내 뒷조사를 캤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숨 막히는 술래잡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대학로에서 연필 초상화를 그리는 일과 야간 업소에서 서빙을 하던 일을 그만 두었다. 오로지 룸에 쿡 처박혀 지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어젯밤에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시달리다가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런데 아주 잠깐 사이에 선명한 꿈을 꾸었다. 커다란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숲이었다. 해바라기는 벌레처럼 살아 꿈틀거렸다. 숲 한가운데 서 있었는데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길을 발견하고 숲을 헤쳐 나오다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도깨비바늘 덤불 속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순간, 관모(冠毛)를 세운 도깨비바늘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속에서 보았던 해바라기와 도깨비바늘을 떠올렸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일이 비비꼬여 살인의 누명을 쓰고 어둠 속에 갇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슴이 몹시 답답했다. 화구를 챙겨 들고 대학로에라도 나가고 싶었다. 옷장에서 재킷을 꺼내 입었다. 그러나 곧 마음이 바뀌어 걸쳐 입었던 옷을 벗어버렸다.

설령 김 형사를 피해 밖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김 형사의 끄나풀에게 감시당할지도 몰랐다.

그 때였다. 창가에 있던 벤자민이 눈에 들어왔다. 이파리가 누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온 햇살이 누런 이파리 위에 뚝뚝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벤저민을 창 모서리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화장실로 들어가 분무기를 가져왔다.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며칠 전부터 벤저민이 시들시들 죽어갔다. 이 지경에 화초 따위가 죽어 간다고 호들갑을 떨 처지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터였다. 하지만 당분간은 벤저민을 살려야 했다.
물은 고사하고 햇볕 한 번 제대로 쐬지 않았던 겨울 동안에도 잘 자라던 벤저민이 아니던가. 그런데 304호 그녀가 죽던 날부터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알을 품듯 베자민은 도깨비바늘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지 위에 화분의 흙을 쏟은 뒤, 그 속에 도청기를 묻고 다시 벤자민을 심었다. 그 사실은 나 이외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 나는 그 도깨비바늘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304호 그녀가 죽던 날 밤, 나는 모처럼 후배들을 만나 늦도록 술을 퍼 마시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옷을 입은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보통 때처럼 도청기 스위치를 열어 두지도 않았다.

아마 새벽 2시쯤이었을 것이다. 목이 너무 말라 잠에서 깬 시간이……. 나는 냉장고에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려고 하는데, 뚫린 벽 틈으로 그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몹시 어지러워서 몸이 제 멋대로 움직였다. 뚫린 벽 틈으로 눈을 바짝 들이댔다.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귀를 구멍으로 가까이 댔다. 그러자 304호 그녀의 신음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곧장 그녀의 방으로 달려 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겁 없는 행동이었다. 304호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 304호 그녀가 몹시 아파하는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녀가 남자들과 종종 폰섹스를 하면서 냈던 괴성과는 너무도 달랐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카펫 위에 쓰러져 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전라의 몸이었다. 그녀를 일으켜 세우자, 머리에서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잘못했다가는 누명을 쓸 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몇 달 전에 내가 그녀의 방에 들어가 몰래 설치했던 도청기를 모두 걷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 조심스럽게 손잡이 지문까지 닦아 냈다. 슬그머니 304호를 빠져나와 내 룸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와 부딪히고 말았다.

빌어먹을, 정말 큰일이었다. 하필 그 시간에 사람이 지나갈 게 뭐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재수가 옴 붙은 날이었다.

조사가 시작되면서 김 형사가 몇 번 내 방에 들어왔었다. 그러나 사건의 증거가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찾지 못했다. 김 형사는 노련하게 코를 벌름거렸다. 한참을 서성거리던 그는 무슨 냄새라도 맡은 모양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304호 그녀의 방에 설치된 도청기를 ‘도깨비바늘’이라고 한 것은 아주 오래 전에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있던 도깨비바늘이 생각나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오랫동안 나는 어머니와 도깨비바늘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관모를 바짝 세운 도깨비바늘이 내 살갗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만난 날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곳은 대학로였다. 그 날도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대학로에서 연필 초상화를 그렸다. 비가 오거나 몹시 바람 부는 날을 제외하고는 초상화를 그렸다.

등록비 마련이 어려워 대학을 휴학한 후, 선배가 하는 화실에서 미대 지망생을 가르쳤으나 적성에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낮에는 대학로에서 연필 초상화를 그리고, 밤에는 유흥업소에 나가서 서빙을 했다. 모자라는 학비를 마련하자면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전자 대리점을 하는 누나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경제 침체로 누나의 전자 대리점도 자금 압박을 받았다. 누나는 매형의 눈치를 보며 내게 학비를 대주고 있었던 것이다. 고심 끝에 휴학을 결정하고 말았다. 더 이상 누나에게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304호 그녀를 만났던 그날, 나는 다섯 명이나 되는 얼굴을 연거푸 그린 다음에 겨우 담배를 한 대 빼물었다. 며칠 째, 퍼마신 술 때문에 속이 쓰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나무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걸 확인 한 후에야 점심까지 걸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 짐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필통을 열어 보았다. 다듬어진 연필이 하나도 없었다. 화구를 챙기다 말고 부러진 연필부터 깎기 시작했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나는 연필통이 말끔히 정리되어야만 짐을 싸는 버릇이 있었다.

그 때였다. 핑크색 티에 흰 치마를 입은 여자가 다가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빨리 초상화 한 장을 그려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처럼 재촉하는 사람들을 싫어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완성된 초상화를 보고도 마음에 들어 않아 하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와서 그리는 게 어떻겠어요. 시간도 늦었고…….
나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런데도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눈썹조차 깜박이지 않고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나는 한 숨을 푹 쉬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할 수 없이 4B연필을 꺼내 그녀를 그리기 시작했다. 켄트지에 중심선을 표시한 다음 그녀의 얼굴선을 그려나갔다.
그녀의 얼굴선은 유난히 둥글고 부드러웠다. 미간 사이에는 작은 점이 있었는데, 너무도 뚜렷해서 그리지 않는다면 그녀의 이미지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아가씨의 얼굴에 있는 점을 그릴까요?

그런데도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알아서 하라는 눈빛이었다. 내가 그녀의 얼굴 윤곽을 잡는 동안, 마치 그녀는 딴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2B연필을 꺼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그렸다. 그런데 그녀의 머리카락에 뭔가가 매달려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것을 떼 냈다. 그런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도깨비바늘이었다.

아니 이곳에도 이런 식물이 있나요?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바닥에 떨어진 도깨비바늘을 주워들었다.
저쪽 건물 뒤편에 숲이 있는데, 그곳에 가면 이런 게 많아요. 숲에만 가면 왜 이런 게 달라붙는지 모르겠어요.

관모가 있어서 그래요. 감쪽같이 짐승들의 털이나 사람의 옷에 달라붙어 씨앗을 멀리까지 퍼뜨리는 식물이지요.

그러자 그녀는 도깨비바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릴 때 자란 곳엔 그런 식물이 많았다고 얄팍한 지식을 떠들어댔다.

도깨비바늘은 한여름에 꽃이 피었다가 가을에 열매를 맺으며,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이다. 순간, 나는 고향 이야기를 하다가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치맛단에 매달려 있던 그 놈의 도깨비바늘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다시는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얼마나 다짐했던가. 나는 이내 머리를 흔들며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뇌 속 깊숙이 구겨 넣었다.

그러고 보니 서울로 이사를 온 후, 도깨비바늘을 전혀 본 적이 없었다. 도깨비바늘이 싹을 틔울 황무지가 없었던 탓일 수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도깨비바늘이 있는 숲의 위치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초상화를 그린 후, 함께 가자고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완성된 초상화를 보고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 친구에게 선물을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였다. 내가 보기엔 그런 대로 잘 된 그림이었다. 그녀는 켄트지를 둘둘 말아 쥐더니 숲으로 가자고 했다. 그녀를 따라 숲으로 갔을 땐, 이미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정말로 도깨비바늘이 있었다. 건물 뒤로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엔 강아지풀, 패랭이, 엉겅퀴, 그리고 도깨비바늘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사람의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조심스럽게 나뭇가지를 접어 소리가 나는 쪽을 보았다. 어렴풋하게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숲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웬일인지 기분이 씁쓸했다.

그 순간 희미한 기억이 섬광처럼 빛을 냈다. 어머니와 외딴집 남자가 도깨비바늘 숲으로 걸어가던 뒷모습이 보였다. 한동안 숲에 서서 흔들리는 풀들의 몸부림을 지켜보았다. 내가 숲에서 나왔을 때, 아쉽게도 그녀는 이미 가고 없었다.

또다시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김 형사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보이지 않으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여간 궁금하지 않았다. 속이 쓰라렸다. 며칠 째, 밥을 먹지 않고 대충 인스턴트식품을 먹은 탓이었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 보았다. 먹을 것이라곤 날짜 지난 우유와 시어 터진 김치뿐이었다. 슈퍼에 들러 라면이라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킷을 걸친 나는 조심스럽게 출입문을 열었다. 304호 그녀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복도는 너무도 썰렁했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용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지만, 나는 그녀의 명복을 빌고 싶었다.

그 때였다. 303호 문이 열렸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더니 슬그머니 안에서 나왔다. 나를 보자 그는 놀라는 척 하더니 옷깃을 세웠다.

그는 커다란 가방을 왼쪽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무엇에 쫓기듯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그가 얼마 전에 303호로 이사 온 사람이라는 것은 깨달았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 자를 몰라보았다. 그가 303호 룸으로 이사 오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 그가 온갖 잡동사니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집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집주인이 고물들을 집안으로 들여놓지 못하게 하자, 그는 버럭 화를 냈다. 나는 외출하려고 나가다 그 장면을 보았는데, 할 수 없이 내가 나서서 집주인을 설득했다. 룸 식구들의 피해가 없는 한 괜찮지 않느냐고 거들었다. 얼마를 집주인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 냈는데, 그는 가볍게 눈인사를 할 뿐 더 이상의 고맙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

꼭 무슨 대가를 바라고 거든 행동은 아니었는데도 몹시 서운했다. 내가 괜한 일에 나섰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의 잡동사니 살림은 정말 특이했다. 낡은 전축과 오래된 라디오 그리고 전화기를 비롯해 유행이 지났거나 분해 된 전기 제품들 뿐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가 발명가라는 사실을 집주인에게서 들어 알았지만, 처음엔 골동품 수집광이 아닌가 했다. 그 뒤로는 그와 부딪히는 일이 없어서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다. 서둘러 그의 뒤를 뒤쫓아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벌써 자동차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급하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를 두 번째 만난 곳은 바로 이곳 원룸이었다. 원룸은 지하철 2호선을 인접하고 있고, 대학로가 가까운 탓에 늘 사람들이 들고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304호는 오래도록 비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간 업소 일을 마치고 원룸으로 들어오려는데 304호에 불이 켜져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누군가가 이사를 왔으려니 했다.

내 룸은 그녀의 바로 옆 305호였다. 베란다로 나온 나는 304호를 힐끔거리며 내부를 훔쳐보았다. 베란다가 오픈 되어 있어서 얼마든지 옆방을 넘겨다 볼 수가 있었다. 처음엔 누가 이사 왔는가 하고 호기심에서 304호를 훔쳐보았다. 집안은 이미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욕실이 열리면서 샤워를 막 끝낸 그녀가 큰 타월로 상체를 가리고 전화기 쪽으로 다가왔다.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녀가 촉촉한 머리를 끌어 넘기자, 타월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타월로 상체를 가렸을 때만 해도 그녀의 몸매가 그렇게 자극적인지 전혀 몰랐다. 학기 중에 몇 번 누드를 그려보았다. 그런데 모델들은 하나같이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

앙상한 팔과 다리 그리고 빈약한 가슴, 나는 그런 모델을 쳐다볼 때마다 약수동 산동네에서 눈을 감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그때 어머니는 앙상한 뼈마디마저 몹시 무겁다면서 힘겹게 눈을 감았다.

정말 남은 거라고는 뼈와 가죽뿐이었다. 죽음을 그토록 참혹하게 맞이한 어머니의 모습이 내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랬던 탓에 나는 비썩 마른 여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며, 누드화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304호 그녀의 몸매는 너무도 달랐다.

누드 드로잉을 하고 싶을 정도로 유연하고 풍만했다. 그녀는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가볍게 몸짓을 해 보였다. 너무 과장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나는 한동안 무엇에 홀린 것처럼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약간 핑크빛이 도는 젖가슴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살아 꿈틀거렸다. 나의 시선은 그녀의 은밀한 부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놓치지 않고 흡입하고 있었다.

그녀의 음모는 어느 마술사의 까만 망토처럼 검은빛이었다. 검은 망토를 열면 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하필 그 순간에 마술사의 망토가 생각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고 머리를 흔들었다.

얼마 후였다. 그녀는 베란다 창문이 신경 쓰였는지 커튼을 치려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나는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녀는 도깨비바늘이었다.

몇 주 전에 초상화를 그렸던 그녀가 분명했다. 나는 한 번이라도 그렸던 사람은 잘 기억해 냈다. 설령 전혀 다른 공간에서 만났더라도 말이다.

초상화를 그릴 때마다 모델의 독특한 특징을 찾아내서 그림을 그린 탓이었다. 이를테면 눈, 코, 입의 형태뿐만 아니라, 빛이 드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섬세한 표정까지도 잡아냈다.

무엇보다도 역광(逆光)이 드는 차이에 따라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져 보이는데, 같은 모델이라 하더라도 매번 같은 얼굴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은 그 빛 때문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그렸던 시간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이라서 사라지는 역광을 표현하자니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입과 눈, 코를 기준으로 기울기를 재서 적당히 역광 처리를 했던 것이다.

생각처럼 그림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엉망이지도 않았다. 뭐랄까 전체적으로 엷은 역광을 표현해 오히려 그녀의 이미지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그림을 받아 든 그녀는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자신의 얼굴을 닮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독특했다. 말이 끝날 때마다 메아리처럼 울림이 살짝 퍼지면서 공명을 일으켰다.

그녀가 커튼을 치자, 룸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뛰었다. 내 룸에는 화가 로댕의 애인이었던 까미유 끌로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얼마 전에 화방에서 사 왔으나, 시선을 끄는 그림은 아니었다.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썰렁한 분위기를 채워 주는 정도로 벽에 걸어 둔 초상화였다.

그런데 막 샤워를 끝낸 304호 그녀와 까미유 끌로델의 초상화가 합성을 일으켰다. 유선형으로 휘적거리던 시선이 어느 새 까미유 끌로델의 젖가슴에 머물렀다. 그러자 아래의 성기가 불끈 솟아올랐다.

가슴이 쿵쿵 뛰고 아래 허벅지에서부터 서서히 전율이 뻗어 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순간, 베란다를 뛰어넘어가 그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벌떡 일어나 베란다로 통하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 문을 잠그지 않는다면 정말로 그녀를 쓰러뜨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내게도 그런 원시적이고 충동적인 면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어머니의 옷에 붙어 있던 도깨비바늘을 볼 때마다 성기를 만지작거렸다. 가끔은 밤마다 소리 없이 집을 나가는 어머니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나면 그런 증상이 심해졌다. 그런데 어른 엄지손가락 만하게 자란 성기가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솟대처럼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지 않았다.

성기도 자라지 않는 것 같았다. 사춘기가 지나 대학을 갔어도 여전히 성기는 일어설 줄 몰랐다. 그 때문에 간혹 노골적으로 접근해 오는 여자가 있어도 가까이 하지 못했다. 목욕탕에 가는 일도 없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것 같은 성기를 사람들 앞에 내 보일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것도 불끈 솟은 성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나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어 성기를 씻고 자위를 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으로 성기의 길이를 쟀다. 역시 내 기대에 못 미치는 크기였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304호 그녀가 계속해서 눈앞에 어른거렸다.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책상 서랍에 있던 싸구려 양주를 꺼내 몇 모금 마셨다. 그러자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욕정도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같은 학과의 후배였다. 동아리 전시회 문제로 의논을 해 왔다. 나는 내일 만나서 의논하자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전화의 혼선이 빚어졌던 것은 그 순간이었다. 오히려 후배의 목소리보다 갑자기 끼어 든 여자의 목소리가 더 잘 들렸다. 전화 속의 여자는 까르륵거리며 누군가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문득 304호 그녀가 떠올랐다. 분명 말이 끝날 때마다 공명을 일으켰던 304호 여자가 틀림없었다.
오늘 대학로 근처에 있는 원룸으로 이사했어. 좁지만 그런 대로 자유로워. 언제 만나서 밤새 춤이나 추자.

그녀의 이야기는 시시껄렁했다. 그러나 핑크빛이 돌던 유두와 마술사의 검은 망토 빛 같았던 음모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어느 새 내 손가락은 불끈 솟아오른 성기를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전화기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또 한 번 수음을 했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 꿈을 꾸었다. 앙상하게 마른 뼈가 무겁다며 숨을 헐떡거리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검은 비로드 치마를 입고 있었다. 젊었을 때 어머니가 입었던 옷이었다.

어머니는 황톳길을 한동안 걸어가더니 도깨비바늘이 무성한 숲으로 들어갔다. 나는 계속해서 어머니 뒤를 밟았다. 숲을 헤쳐 가는데 도깨비바늘이 옷에 달라붙어 살갗이 따가웠다.

그러다가 헛발질을 했는데 그만 웅덩이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내 비명 소리에 놀란 어머니가 돌아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이 아니었다. 304호 그녀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꿈에서 깨었다.

그녀의 얼굴을 통해 젊은 날의 내 어머니를 떠올렸다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켜도 가슴은 여전히 꽉 막혀 있었다. 언제쯤 어머니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별이 없는 텅 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나와 내가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사실은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마다 늘 화제거리였다. 행사라야 봤자, 집안 제사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혈액검사에서 나는 RH-B형이라고 나왔다. 집안 혈통을 따져 보아도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었다.

빌어먹을 외딴집,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외딴집 남자와 나의 혈액형이 RH-B형이란 사실을 알았다. 외딴집 남자의 맹장이 터지는 일이 벌어졌다. 당장 수술을 해야 했는데, 피가 모자랐다.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 피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외딴집 남자와 같은 혈액을 찾는다고 마을이 훌렁 뒤집혔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 내가 외딴집 그 남자와 혈액형이 같았다. 결국 내가 병원으로 가서 수혈을 해주었다. 외딴집 남자와 나의 혈액형이 같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혈액형을 정확하게 몰랐으니까 그나마 우연이란 말이 성립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후부터 외딴집 남자와 내가 길에서 마주치면, 그의 눈빛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아니 외딴집 남자는 내가 사라질 때까지 말뚝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런 외딴집 남자의 엉거주춤한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싫었다.

아버지가 눈을 감고 난 뒤, 정확하게 나는 열한 달 만에 태어났다. 출산일보다 늦게 태어난 것이다. 어머니가 달을 잘못 쳤는지, 아니면 도깨비바늘 숲에서 만든 아이였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유복자로 태어난 나를 집안에서 반겼다는 게 천만 다행한 일이었다. 4대 독자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혈액형이 식구들과 왜 다르냐고 어머니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어머니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래지더니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치맛자락엔 도깨비바늘이 더 이상 매달려 있지 않았다.

또한 외딴집 남자가 그 곳을 떠나버렸다. 외딴집 남자가 왜 그곳을 떠났는지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룸을 빠져 나와 슈퍼를 향해 걸어갔다. 조금만 건드려도 몸을 동그랗게 말아버리는 쥐며느리가 된 기분이었다. 음지를 좋아하는 쥐며느리는 쉴 새 없이 발을 옴지락거린다. 어쩌면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쥐며느리처럼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원룸 앞을 서성거리던 김 형사가 보이지 않자, 동그랗게 말았던 몸을 풀고 밖으로 나온 내가 정말 우스웠다. 내 등에 쥐며느리처럼 딱딱한 껍질이 생긴 것은 아닌가 하고 등을 긁어 보았다.

정말 딱딱한 게 느껴졌다. 쇼윈도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았다. 역시 쥐며느리처럼 등이 구부정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얼굴은 누렇게 떠 있었다.

그녀의 집에 설치했던 도청기는 도깨비바늘 모형이었다. 도깨비바늘 모형에다 집게발을 부착했던 것이다. 처음 그 도청장치를 세운상가에서 발견했을 때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붙어 있던 도깨비바늘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도깨비바늘을 닮은 도청기를 구입했다. 도청기는 3센티미터 정도의 크기였다.

그녀가 없는 틈을 타 몰래 문을 열고 들어가 전화기 뒤에 꽂아 두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보다 성능이 떨어졌다. 우연히 전화선을 통해 엿들었던 그녀의 목소리와 전혀 달랐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에 가려 이야기를 정확하게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하면 한 시간은 기본이었다. 어떤 날은 새벽까지 통화했다.

그녀가 내 손아귀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묘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물론 그녀에게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해서 떳떳하게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자를 만나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내 성기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 앞에 나서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녀를 훔쳐보는 것에 더 희열을 느꼈다.

나는 도청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위행위를 했다. 그러고 나면, 그녀를 소유했다는 기분에 젖어 들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날마다 그녀를 껴안았던 것이다.

그녀가 사귀고 있는 남자는 셋이었다. 처음에는 옥외단자함에 도청기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세 명의 남자와 전화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었다.

쉽지가 않았을 텐데, 그녀는 세 명의 남자에게 제각기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종종 남자들에게 폰섹스를 하자고 졸라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화 속의 남자가 되어 그녀와 폰섹스를 했다.
 
나는 그녀의 네 번째 남자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녀의 사생활을 엿들으면서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점점 그 생활에 빠져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실내 도청 장치 이외에 옥외전화단자함에 도청기를 부착했다. 설명서만 봐도 도청기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졌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도청 장비는 보청기와 원리가 똑같았다. 도청기의 내부 구조는 소리를 잡아내는 집음기(集音器)와 이를 증폭시키는 앰프, 잡은 소리를 전송하는 송신 장치로 이루어져 있었다.

간단한 전자 상식만 있으면 얼마든지 도청기를 만들 수 있었다. 심지어는 몰래 카메라가 부착된 수천 만 원대의 최첨단 고성능 도청기가 비밀리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마이크로웨이브 송신기와 몰래 카메라가 부착된 휴대폰 영상 겸용 도청기를 일부 심부름센터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판매업자에게서 들었을 땐, 오히려 밀려오던 죄책감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전혀 색다른 전율을 느끼며 자위행위를 즐길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런데 일이 그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어찌어찌하다가 304호 그녀의 나체를 훔쳐보고 난 뒤에 자위행위를 하게 된 것쯤으로 생각했었다. 일시적인 관음증이라고 여겼다. 아니 그녀 때문에 남자가 되었다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동안 성기가 발기되지 않아 여자들을 사귀어 보지도 못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나에게 특별한 여자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그녀의 남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늘 옥외단자함에 설치된 도청 스위치를 열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규칙을 세워 놓고 남자를 사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세 남자 중 두 명은 유부남이었고, 한 명은 같은 과 남학생이었다.

그녀는 연극 영화학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가는 날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두 명의 유부남과는 드러내놓고 만나지 않았다. 그들과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다는 전제로 미팅을 가졌다.

가볍게 즐기다가 헤어지려는 태도를 보였다. 일명 원조교제 형태였다. 그녀가 사귀고 있는 남자들과 금전이 오고 가는 것을 알았을 때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거센 질투심이 타올랐다.
 
나 혼자만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 설령 그녀가 여러 남자와 섹스를 했더라도 오직 나만의 여자이길 바랐다. 좀 더 정확하게 내 기분을 말한다면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원조 교제를 해서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304호 그녀가 그런 여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녀의 남자들에게 번호를 매긴 것도 도청기를 통해 남자들의 나이를 안 뒤부터였다. 그녀는 언제나 첫 번째 남자에게는 어린 딸처럼 굴었다.

나 벌써 떠돌이 집시가 된 거 알죠? 옷도 한 벌 사고 싶고…….
그녀는 노골적으로 돈을 달라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미팅을 갖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남자는 그녀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그 곳으로 7시까지 나와 있어. 물론 후문을 이용하도록 하고.
늘 그는 그런 식이었다. 두 명의 유부남과는 달리 세 번째 남자와 전화를 할 때면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너는 세상을 좀 리얼하게 살 필요가 있어. 그렇게 결벽증 환자처럼 행동하면 끝낼 수밖에 없어. 나를 구속하려 들지 마.
그녀의 말을 듣자, 나는 코웃음이 나왔다.
나쁜 계집애, 아주 사람들을 가지고 놀고 있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어 벽을 향해 내리쳤다. 그러자 쿵하고 벽이 울렸다. 그녀도 틀림없이 벽이 뒤흔들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벽이 두껍지가 않았다.

작은 벽돌 한 장 이외에 다른 자재를 쓴 것 같지가 않았다. 날림 공사였다. 순간, 나는 벽을 뚫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날마다 그녀를 관찰하고 도청한다는 게 우스웠다.

직접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분명 나는 그녀의 네 번째 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그녀보다 일찍 원룸으로 들어와 벽에다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그녀가 깊이 잠들었을 때라든가, 샤워를 하는 시간이면 조심스럽게 십자드라이버로 벽을 긁어냈다. 그 때마다 나는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약수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외딴집 남자가 떠나고, 도깨비바늘이 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다음 해였다.

어머니는 약수동으로 이사 와서 얼마동안 누군가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어머니가 외딴집 남자를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외딴집 남자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몇 년 후, 고향에 내려갔던 어머니는 외딴집 남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갖고 올라왔다. 나는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
다보며 도깨비바늘 따위는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약수동 산동네의 낡은 지붕은 밤마다 생쥐들이 득실거렸다. 어떤 날은 벌건 쥐새끼가 벌어진 천장 틈에서 뚝 떨어지는 바람에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매일 이불을 뒤집어써야만 안심하고 잠을 잤다.

그곳은 재개발이다 해서 늘 시끄러웠다. 산동네에서 기세가 등등한 것은 오직 쥐새끼들 뿐이었다. 허구한 날 흘레를 하는지 쥐들은 천정을 우르르 몰려다녔다.

참지 못한 나는 씨팔눔의 쥐새끼들이란 소리를 내지르며, 빗자루를 들어 쥐새끼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사정없이 쳤다. 집안이 쿵하고 흔들리자, 머리가 멍해졌다.

그런 뒤엔 한동안 정적이 휩싸이는가 싶었다. 그러나 또다시 쥐새끼들이 모여들었다. 지독한 놈들이었다. 그 놈들은 이미 산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재개발 딱지를 받으려고 악을 써대는 산동네 뜨내기들이 곧 그곳을 떠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쥐새끼처럼 벽을 뚫고 있는 내 자신이 혐오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십자드라이버로 벽을 파고 있으면 온갖 잡념들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샤워하는 소리는 물론, 일정한 간격으로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와 그릇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까지도 벽을 타고 흘러들었다.

조금씩 벽이 뚫리기 시작하면서 어찌나 긴장을 했던지 겨드랑이에서 땀이 흠씬 배어나왔다. 나는 쉬지 않고 쥐새끼의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십자드라이버를 바짝 세워 벽을 후볐다.

드릴로 단숨에 벽을 뚫어버릴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건물 주인이 여간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벽에다 못을 치는 것조차 간섭했다.

그래서 드릴로 벽을 뚫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드디어 그녀의 방으로 통하는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러나 304호 내부를 전부 볼 수는 없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침대가 2센티미터의 구멍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빨간 전화기가 놓여 있는 이태리 풍의 테이블과 붉은 카펫이었다. 그녀가 자주 앉는 자리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날로부터 나는 어머니가 도깨비바늘을 치맛자락에 매달고 몰래 집안으로 들어섰던 것처럼 그녀의 방을 수시로 들락거렸다. 물론 직접 들어갔다는 게 아니라 작은 구멍을 통해 들락거렸던 것이다.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구멍을 통해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스릴이 느껴졌다.

아직 김 형사는 그 구멍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그 구멍이 발견된다면 나는 꼼짝없이 304호의 그녀를 죽인 범인으로 몰릴 게 뻔한 일이었다.

나는 라면과 빵이 든 검은 봉지를 들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내 발소리조차 위압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건물은 조용했다.

304호 원룸은 그녀의 마지막 연극 무대였던 것 같았다. 이태리 풍의 테이블과 붉은 카펫은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소품이었다.

한 달 남짓, 그녀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속 울음소리까지도 도청기를 통해 들었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녀도 나처럼 병적인 외로움에 시달렸던 것도 같았다. 그래서 어둡고 텅 비어 있는 가슴을 채우기 위해 여러 남자들을 만나 몸부림쳤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연극 무대를 떠나지 못한 채 죽어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3층 계단을 올라서자, 김 형사가 언제 왔는지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쿵하고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김 형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어디를 다녀오세요.
먹을 걸 좀 사러요.
김 형사의 말에 대꾸를 했지만 조바심이 났다. 담배를 꺼내 불을 댕긴 김 형사는 다짜고짜 어디 가서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 형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범인이 잡혔어요. 그 동안 헛수고를 했지 뭐요. 어제부터 이곳을 후배가 잠복했는데, 물증을 없애려 했던 용의자를 뒤쫓아 가서 잡았어요. 이제 나도 옷을 벗을 때가 되었는지, 헛 다리를 짚었지 뭡니까. 어찌되었든 그 동안 고생 많았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아냈다. 눈물이 고여 있는 두 눈을 깜박거렸다. 그동안 용의자로 몰린 게 여간 고통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누가 범인인지 궁금하지 않아요?

대답 대신 나는 옷소매로 그렁그렁하게 맺혀있던 눈물을 닦아냈다.
범인은 바로 303호였소. 도청장치 장비와 피 묻은 망치를 은닉하려다가 덜미를 잡혔어요. 여자를 훔쳐보면서 그 짓거리를 했다지 뭐요.

예전에 관음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몇 번 받았다는군요. 304호 여자가 여러 남자들과 놀아나는 게 미워서 죽였다지 뭡니까. 어쨌거나……. 그자는 여자를 훔쳐보는 상습범이었소. 몹쓸 놈, 그렇다고 사람은 왜 죽여.

나는 앞서 계단을 내려가는 김 형사의 뒤를 따라 가다가 그만 헛발질을 했다. 그 바람에 계단을 한 바퀴 굴렀다. 라면과 빵이 들어 있는 검은 봉지가 밑바닥 계단까지 나뒹굴었다.

나는 얼른 일어나 검은 봉지를 주워들었다. 얼굴이 몹시 화끈거렸다. 주워 든 검은 봉지에서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어쩌면 내 가슴에서 나는 소리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아닌 내가 또 있었다니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약력)
이미경
본적: 충북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867-44
최종학력: 2006년 대전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현주소; 충북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 317-1 시와추억
연락처: 017-471-1125

1994년, 명지대학교 창조문학 수필부문 신인 작품상
‘사랑의 울타리’수상
1996년, 농협 하나로 대전 문예대전 수필부분 우수상 수상 ‘창을 열고 눕는 밤’당선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오라의 땅’
당선으로 문단에 나옴.
2002년, 동서커피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청수동이의 꿈’ 당선
2003년, 장편소설 ‘는개’ 출간. 미국 하버드대학 도서관 서장
2006년, 대전대학교 대학원 석사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문 ‘윤후명 소 설에 나타난 모티브연구’
2005, 윤후명 소설가에게 사사를 받음.
2007년,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출간
2008년, 향수아카데미에서 향수해설사과정 이수 및 우수상 받음.
2009년, 향수해설사로써, 정지용과 관련 가이드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음.
2009년, 향토음식 별난먹거리 ‘옻돈까스’를 연구 개발하고 있으며,
전원 레스토랑 ‘시와추억,을 운영하고 있음.
2008년부터, 옥천민예총 문학분과 총무 역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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