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일(慧日)스님은 제주도 서귀포시 정방폭포 위에 있는 정방사(正方寺)의 주지스님이다.
늘 미소를 머금고 공부(工夫)에 열심인 스님이다. 일찍이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경성(京城)포교당인 불이성(不二城) 법륜사(法輪寺)의 주지와 조실 그리고 태고종의 전신인 불교조계종종무총장(총무원장)과 승정 및 종정을 역임하신 덕암(德菴)스님 문하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법륜사는 본디 석왕사의 포교당이었으나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아 1929년 유점사 승려인 대륜(大輪)스님에게 운영권이 넘어가 유점사의 서울포교당이 되었다. 대륜스님은 덕암스님의 스승으로 태고종의 종정을 역임하신 스님이다.

대륜스님은 법륜사를 금강산 유점사와 둘이 아니며 인도의 부처님 성지인 영취산과 둘이 아니며 중생들이 사는 세속과 불보살님이 머무시는 정토(淨土)가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불이(不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대개의 사찰이 평지에 세웠을 지라도 삼각산(山)이라며 산 이름을 붙인 것은 출발당시에는 5교 9산(五敎九山)에서 비롯된 선문(禪門)의 종파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그냥 산(山) 이름을 따는 것으로 변했다. 하지만 성(城)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근대 도심포교의 선두사찰답게 민중들과 가까이 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아무튼 뒷날 한국불교의 정통교단인 불교조계종의 법맥을 흐리게 하는 사건이 정부와 조직을 등에 업은 자들의 소행으로 벌어졌을 때 정통법맥을 올곧게 이으려는 스님들의 총본산(總本山)의 역할을 충실히 한 도량이다.

일제에 의해 우리의 법맥이 흐려지게 되었을 때는 만해(萬海)를 비롯한 선학원(禪學院)을 중심으로 한 스님들이 바로잡는데 신명을 바쳤고, 정권의 이익에 맞춰 불교의 흐름을 흐리게 한 이들이 선학원을 본거지로 했을 때는 법륜사를 중심으로 한 스님들이 신명을 바쳤다.

혜일스님은 대륜스님-덕암스님으로 이어진 유점사와 법륜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스님이다.
법륜사에서 동국대교수를 역임한 변 설호(雪湖)스님에게 스님들의 편지글 모음이며 큰스님들이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보낸 편지글이어서 어려운 한자인 난자(難字),벽자(僻字)가 많아서 배우다가 지치지 일쑤이며, 배우기만 배우면 다른 글이나 경전 보기가 쉬워지는 치문(緇門)과 사집(四集)과정을 이수하였다.

이어 전남 순천에 있는 조계산 선암사(仙巖寺)에 설치된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에서 4교(四敎)와 대교(大敎)과정을 배웠다. 당시는 조계종과의 분규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모두들 공부보다는 조계종스님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몸을 던지던 시절이었으나 선암사를 지키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세상과 만나는 불교공부를 하기 위해서 대한불교진흥원을 설립하는데 재산을 출연한 대원(大圓) 장 경호거사의 원력으로 남산 언덕에 세운 대원불교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은사이신 덕암스님의 허락과 추천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대정(大正)대학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유학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말도 그렇고 유학비용도 그렇고 어려움이 않았다. 혜일스님은 이 때 관세음보살님께 지성으로 기도하고 교포불자들을 중심으로 기도와 불공 그리고 천

도재를 한국불교식으로 지내는 자그마한 인법당 포교원인 관음사(觀音寺)에서 법회를 보아주고 장학금을 얻어썼다. 이 때 평생의 도반을 만나 사회복지에 관한 꿈도 함께하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스승이신 덕암스님을 모시고 법륜사에 살면서 주지까지 역임하였다. 종단 안에서는 태고종 총무원의 재무부장과 교류협력실장을 역임하였다.

제주에 내려가서는 제주교구사정원장을 역임하였다. 태고종의 활동가 그룹인 보현도량의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내가 태고종 총무부장을 하던 시절인 1996년도에 재무부장으로 함께 하였다. 함께하던 총무원 부장을 놓아버린 뒤 혜일스님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말하기를

“우리 법륜사를 중심으로 태고종과 한국불교를 새롭게 하는 일을 해 보지 않겠소? 스님도 유점사 문중이니 법륜사에 들어와 소임을 살면서 나도 돕고 큰스님도 도와서 수십 명의 스님이 대중으로 살면서 서울의 많은 신도를 교화했던 포교 1번지도량 역할을 했던 옛 모습을 찾아보세.”하였다.

그리고 법륜사 교무소임을 맡아달라고 하였다. 내가 대학 다니면서 불교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 차를 타고 가다가 난사진관 골목에 현수막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살며시 웃었던 적이 있다. 현수막에는 크리스마스축하글이 붙어있었는데 “어린양 아기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노라”라고 되어있었다.

축하의 글이지만 예절로는 문제가 있었고, 그럼에도 80년도에 그런 축하현수막을 붙인 사찰이 바로 법륜사이다. 단, 조건이 하나 있는데 덕암큰스님의 점검을 받아야 하니 법륜사의 양력 초하루법회에 와서 법문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하룻날 법상에 올랐는데 깜짝 놀랐다.

막 법문을 시작하려는데 종정이신 덕암 큰스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이 아닌가? 불교텔레비전의 “인연”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덕암스님을 추모하는 말을 할 때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무척 놀랐고 속으로는 떨렸다.

그래서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신도들을 향해 횡야설수야설(橫也說垂也說) 준설비한 법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며칠 뒤 큰스님께서 허락하셨다며 혜일스님이 교무로 들어오라고 연락을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제의였고 내 법문을 점검하신 큰스님의 허락까지 받았는데 먼저 받은 안성에 있는 고심사 권 오현법사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해 혜일스님과 덕암큰스님께 죄를 지었다. 결국 고심사에서도 두 달밖에 머무르지 못했지만...

혜일스님은 법륜사 주지를 그만 두고 1997년 제주도 서귀포시 정방폭포 뒤에서 폭포의 수원이 되는 동홍천의 맨 끝 하류 옆에 있는 정방사(正方寺)의 주지를 맡았다.

그러더니 1998년 입춘(立春)법회에 법문 좀 하라고 연락해서 다녀왔다. 법문을 마쳤는데 서울의 불교계 기자들이 급히 올라왔으면 한다고 연락이 왔다. 김 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2중과세(過歲)가 바람직하지 않다며 공청회를 통해 국민의 뜻을 모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양력이 좋다고 하는 바람에 전통성이 사라지고 국민을 다시 양분할지 모르는 공청회가 열리니 내가 꼭 올라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법회 뒤 이야기 나눔도 줄이고 급히 서울로 날아와 공청회에 참석해서 우리 얼을 살리려면 우리 설을 쇠어야지 양설을 쇠면 안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음력설을 지금까지 쇠게 하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그런데 올라오기 전에 스님이 조용히 부탁하는 말이 있었다. 정방사가 사실은 조계종과 소유권 다툼이 있는 사찰인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정방사는 1702년 제주목사였던 이 형상의 훼불이 있었을 정도로 오래된 역사가 있는 사찰이었다.

본디 두타사(頭陀寺)라는 이름의 절이었는데 1930년까지는 서귀포시 상효동에 있는 선돌유적 근처에 있었다.

그 때에 장성 백양사의 제주포교원으로 지정하면서 쌍계사라고 불렀다가 1938년도에 현 위치로 이전해 오면서 정방사(正方寺)라고 하였다. 그래서 백양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본디 태고종의 전신이었던 불교조계종의 종정을 역임하신 만암종헌(曼庵宗憲·1876~1956)스님과 묵담스님(黙潭:1896~1982)스님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 제주도이며 두 분스님이 모두 백양사스님이어서 백양사의 흔적이 많았다.

그래서 관계자인 백양사스님을 만나고 일을 해결하는데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여 만남을 주선하였고 헤일스님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결국 해결하였다.

정방사 주지를 맡아 지장회, 관음회, 합창단, 거사림을 창립하고 활성화 해서 서귀포불교 연합활동의 선두주자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제 때 지어진 대웅전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으나 전통방식을 재현하기 위해서 대웅전불사를 진행하기 위해 1000일 기도을 봉행하면서 힘을 다하고 있다.
대웅전은 올해 안에 요사채는 내년에 완공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숙종 28년인 1702년 수일(守日)대사가 조성하였으며 복장에서 발원문과 다라니 수십개 그리고 후령통이 발견되어 학술적 가치 뿐 아니라 신앙적 의미가 강한 석조여래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요 유일한 부처님인 비사부불(毘舍浮佛)인 것으로 학자들의 노력과 복장유물에 의해 밝혀졌다. 비사부불은 과거칠불 가운데 장엄겁(莊嚴劫)의 제3부처님이다.

우리나라에서 탱화로 조성된 것은 있으나 불상으로 조성된 것은 정방사의 비사부불이 유일하다. 혜일스님은 이렇게 공부하는 스님으로서의 모습을 명확히 하여 불사를 해도 기록과 교리에 맞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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