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두 신부

언젠가 날 파리 한 마리가 구정물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본 적이 있다. 사람 목숨 파리 목숨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파리채 한 번 스치는 것으로도 명을 다할 수밖에 없는 파리가 어떤 연유인지 몰라도 배를 하늘에 보이고 구정물에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다해 배영을 하고 있었다. 구정물이라는 현장에서 생과 사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존재감이 ZERO 라서 파리채로 한 번 때려 죽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미물인 저 파리의 움직임에서 존재에 대한 단상에 빠져본다.

사람에게는 자기가 둘이 있다. 참된 자기와 거짓된 자기다. 욕망과 화냄과 어리석음으로 만들어진 자기는 거짓 자기다. 이 세 가지를 떠난 자기는 참 자기다. 누구나 이 거짓 자기에게 한 번 휘둘리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헤어 나올 길이 없다. 일생동안 그 늪에 빠져 온갖 고생을 다 겪는다. 거짓 자기는 불가에서 얘기하는 3독(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말한다. 비유하자면 구정물에 빠진 날 파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도 저와 같이 세 가지 구정물의 거짓 자기에 빠져 평생을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닌지?, 우리 인간의 삶이 저 미물인 날 파리의 삶과 무엇이 다를 수 있는지? 살펴 볼 일이다.

인간행동과 사회 환경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인간행동이 문제가 되어서 사회 환경이 어두울 수 있다. 또 사회 환경이 어두워서 인간행동이 그릇될 수도 있다.
사회 환경을 탓하기보다 나의 행위를 문제 삼고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이고?
참된 자아와 거짓된 자아를 구별해야 하고?
참 나를 찾기 위해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참다운 이해는 '나'로부터 자유로울 때만 생겨나는 것이다. 참다운 이해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고 있는 그대로를 볼 때 모든 것이 시원스레 화통해지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모든 사건과 사물들을 가만히 지켜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오해하는 마음속에서 불신의 씨앗이 움트고 증오와 원망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나게 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지식, 관념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사실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을 뛰어넘어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애써 외면하기도 한다. 자기 나름대로의 이상과 관념이 사실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것이 다툼, 미움, 원한, 전쟁, 살인의 범죄를 만들어 낸다.
분명히 사실과 사실에 대한 생각(관념)은 다른 것인데도 때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관념의 틀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인 왜곡된 허상일 수가 많다.

'나'라는 안경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자기중심적인 뒤틀림은 때로는 습관으로, 무의식적으로, 행해지지만 대부분은 집요하리만큼 의도적으로 계획하거나 계산되기도 한다.

내 눈썹이 내 눈 가까이 있는데도 보지 못하듯이
내 코가 내 눈 가까이 있는데도 보지 못하듯이
아주 가까이 있는데도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남들은 보는데 내가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은 바로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이다.

파리가 구정물에 빠진 것은 본능이든 욕구든 잘못된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선택에서 온 것이다.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의 원인은 대부분 나에 대한 너무나 긍정적인 평가로부터 기인한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반복해서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신앙하는 기본자세를 갖춘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워한다면 자기 관념과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난 것이다.

자기 관념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로는 나 외의 모든 사물을 왜곡할 수 있기에 자기 긍정의 효과를 바란다면 먼저 자기 성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자기모습에 행동에 말에 부끄러워 할 줄 아는 것보다 더 좋은 예의는 없다. 부끄러움은 자기 모습에 나타날 수 있는 천함을 가려주고, 자기행동에 나타날 수 있는 경거망동을 가려주고, 자기 말에 나타날 수 있는 허풍을 가려준다.

예수님께서 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 4-5)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용한 밤에 구정물에 빠진 파리를 생각하면서 상념에 든다.
밤이라서 여닫는 문소리가 크게 들린다. 옆 방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도 들리고,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도 크게 들린다. 더 조용하면 밑에 층 이야기 하는 소리도 들린다.

시끄러운 낮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조용한 밤이 되면 다 들리듯이 삶이 편해지면 별것 아닌 것들이 다 고민으로 나타난다.

내가 빠져서 허우적대는 곳들과 거기에서 안간힘을 쓰면서 날개 짓을 하는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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