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들이 서로 서로 재잘 대며

교구청 앞 감나무에 연실 까치들이 시끄럽다. 매일 같이 한 번은 들르는 까치 방앗간이다.
까치들이 서로 서로 재잘 대며 익은 감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쪼아 먹고 있다.
"야 이것이 더 맛있다. 이리와 봐."
"으응 그래 이것도 맛있는데? 그게 더 맛있니?"

 

몰려다니는 것이 검은 색 정장에 흰 와이셔츠로 날쌘 조폭 같은 모습이다.
나무는 조용히 물끄러미 감내하는 듯하다.
왠지 새들은 철이 없어 보이고, 나무는 열매를 다 주고 겸허히 좌탈입망 하는 모습이다.
나무의 의연한 모습을 보면서 맹목적인 사랑에 대해서 단상에 빠져 본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순수한 행위는 맹목적이다. 맹목적인 행위만이 순수할 수 있는 것이다.
목적이 들면 이미 그것은 사랑도 우정도 아닌 것이다. 목적이 붙고, 조건이 붙고, 이해가 붙으면 사람과 사람사이의 비즈니스일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맹목적이어야 한다. 남·여 간의 사랑도, 신과의 사랑도 그렇다. 눈멀고 귀먹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맹목적(盲目的)이란 말의 盲자가 의미하는 것도 눈이 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눈이 망한 것이 망(盲)이란 뜻이다. 사랑은 맹목적일 때 이해를 따질 수 없는 가치를 만든다. 어머니의 사랑이 고귀한 것은 목적이 없을 때 빛을 더 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맹목적인 행위를 위험한 것으로 본다. 또는 금지하기도 한다.
맹목이라는 말이 무모하다는 인상을 주는 듯 여긴다. 생각 없이, 분별없이 덮어놓고 하는 행위로 부정적으로 본다.

사람에게 이성이 전부는 아니다. 이성적인 동물인 동시에 감성적인 동물이다. 직관을 중요시 하는 동양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성보다는 오히려 느낌이나 감성이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어쩌면 느낌에 대한 맹목이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한다면 그것은 순수와 통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기 때문에 오염되기 싶고, 이용당하기 싶다. 오히려 순수한 무조건적인, 맹목적인 사랑이나 가치가 거짓으로, 악용되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맹목적인 사랑,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는 우정, 어쩌면 구원을 바라는 것도 목적일 수 있다. 구원과 천당을 바라지 않는 순수 이성과 감성, 신앙으로 신을 만나는 것이 맹목이다.
사랑도 맹목이어야 하지만 종교도 맹목이어야 한다. 천당, 극락가기위해서 하는 일체의 행위는 맹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행위가 너무나 드러난 목적성이 있기에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과 고통을 걱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까를 걱정하고, 결국 더 나아가 많은 돈을 모아들이는 일과 부합된다면 이것은 맹목적인 종교 신앙이 아니고 종교 선전이 되는 것이다.

참된 이치와 진실한 목적을 잃어버린 맹목이 문제인 것이다.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내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움직이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성경에도 돈을 가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돈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섬긴다는 것은 결정권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섬기는 것이 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주객이 전도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맹목이 목적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깊이에의 추구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에 종교가 중요하고 사랑이 중요하다면 맹목적인 종교가 우리를 더 깊은 내면에로 침잠하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맹목적인 것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그 만큼 얕아졌고, 각박해졌다는 것이다. 순애보가 그리운 시대이다. 진실 된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 사건 사고 보다 인간 극장의 순수함이 보고 싶다.
우리의 삶속에 목적을 잊어버리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맹목적인 것이 내 삶에 어느 정도 있어야 참 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감나무의 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점심에 부러진 가지에 약한 모습으로 식탁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감나무의 목생(木生)이 마감하는 날이다.
부러진 가지에서만이 다시 내년에 감을 여는 감나무.
아픔까지도 참아내며 보시(普施)하며 생을 맹목으로 마감하는 감나무의 모습은
종교적이기 보다 신앙적으로 보인다.

오늘 맹목이 사라지고 나니.
가벼운 것들의 날갯짓 또한 사라졌다.

나는 맹목적으로 기쁨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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