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뜻 묵은차를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함께 차(茶)를 공부한 지인들과 지리산 부근 다원(茶園)에서 햇차를 만들었다. 솜씨는 서툴지만 스스로 차잎을 따서 덖음차를 제다했다는 뿌듯함과 햇차의 신선한 향내가 묵은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 그동안 우려 마셨던 차를 정리하려 하였더니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대만에서 보내온 우롱차는 우롱차의 사연이 있고, 대륙에서 부쳐온 무이암차나 보이차는 그들대로 많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선뜻 묵은차를 정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 손때묻은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끊을 때 끊지 못하는 나의 천성 때문인 것을 나는 안다.
 

수년 전 존경하는 노교수님댁을 문안차 찾은 적이 있다. 근검과 겸손이 몸에 벤 교수님은 특별한 취미가 없는 대신 난초에 대해서는 유난히 집착이 강하셨다. 가끔 제자들이 당신이 아끼시는 골동품 등에 눈독을 들이면 작별시에 제자가 무안하지 않게 건네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당신이 키우시는 난(蘭)은 예외였다. 교수님이 난을 좋아하시는 마음은 어려운 청탁도 희귀종 난 한 분이면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처럼 난에 지극하신 교수님께서 우연히 들른 나에게 난 한 분을 잘 기르라는 당부와 함께 건네주시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분을 받아들기는 했지만 「사람이 변하면 일이 생긴다」는 옛말이 떠올라 편치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졌다.
 

후일 어떤 자리에서 우연히 그 교수님을 뵙게 되었고 당신께서 난의 안부를 물어보시기에 나는 어물어물하다가 왜 그 아끼시는 난을 주셨느냐고 여쭈어 보았더니 교수님은 버리는 연습이라고 대답하셨다. 예견했던 일이지만 교수님께서 내게 주신 난은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다듬는 훈련이었다는 말씀에 약간은 서운하면서도 과연 교수님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그 때 교수님이 말씀하신 버리는 연습이라는 말은 나의 가슴 한자리에서 또하나의 교훈이 되어 자라기 시작했다.

비우고 버리는 것은 메우고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이다. 메우고 채우는 것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 이룰 수도 있으나 비우고 버리는 것은 노력한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선승이나 신부와 같은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비우고 버린다는 것은 일종의 고통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마음을 비우고 가진 것을 버릴 수 있을까.

그것은 아끼고 사랑하는 것부터 나누고 버리는 것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속인이 마음을 비우고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은 도사가 득도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라고들 한다.

더구나 소유의 정도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고 무소유는 곧 무능력과 같은 의미로 여기고 있는 현대에 있어서랴. 재물은 많을수록 좋고, 권세는 높을수록 좋은 세태에 가진 것, 그것도 가장 아끼는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은 일도양단의 결단만으로는 어렵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결국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나락에 빠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 가지려고 아우성대는 것이 우리들이다. 더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흔히들 행복은 재물이나 지위보다는 마음에서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버렸기 때문에 서운하고 불편하다면 버렸기 때문에 시원하고 해방되는 즐거움은 없을까. 어쩌면 인생은 지위를 높이고 재물을 모으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가진 것을 하나씩 버리는 연습일 수 있으니 제자에게 난을 주듯, 사연 있는 묵은 차를 햇차로 자리바꿈하듯, 조금씩 조금씩 버리는 연습을 해 보자. 그러면 순간은 섭섭할지라도 그것은 큰소유가 될 것이며 버리는 것에 익숙해질수록 세상은 크고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햇차의 싱그러움처럼.
 

버리는 연습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아닐까.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