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출처-장세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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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이를 만나고 돌아온 후,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충주 탄금대로를 향해 쿨럭대는 트럭을 몰아야 했다. 하지만 우석이 말대로 무턱대고 찾아간다는 게 옳은 일인지 잠시 망설여졌다. 더구나 그녀의 곁에 남자도 있고, 중학생쯤 되는 아들도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결정이 쉽지가 않았다.

어영부영 며칠을 흘려보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수술을 받았던 병원에 들러 정기검진하고 진통제를 수북이 타왔다. 담당 주치의는 아버지에게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진통을 좀 줄여가며 지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단번에 잘라 말했다.

‘그럴 돈도 없지만,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 병원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죽은 송장처럼 지낼 수는 없다. 예전보다 더 강한 진통제나 처방해달라.’

그 순간, 나는 딱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 보증금을 강미에게 줘버리고 빈 몸으로 나왔기에, 지갑에 든 이백만 원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겨우 병원에 들러 강력한 진통제만 받아와 하루하루를 죽음 향해 떠밀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박 씨 아저씨가 이른 새벽에 핸드폰을 걸어왔다. 직지축제 개막 전에 흥덕사지 금당 보수 작업을 마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서둘러 연장통을 챙겨 사무실로 나갔다.

아버지 병원비라도 마련할 겸, 아저씨 말에 순순히 따랐다. 금당에서의 보수 작업은 규모가 점점 커졌다. 기와를 뜯고 내부를 보자, 받치고 있던 서까래가 물에 젖어 있었다. 지붕 보수 팀이 먼저 손을 본 다음, 금당 뒤쪽 모든 면의 처마 단청과 얼룩진 아홉 번째 십우도를 복원하기로 했다. 아저씨의 얼굴에 붉은 홍조가 돌았다. 갑자기 걸음새도 빨라졌다. 70대 후반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날렵하게 사다리를 탔다.

관리자의 사무실에 임시로 짐을 풀었다. 책상에 앉아 예전에 쓰던 단청 문양 첩을 꺼내 크기와 배열에 맞게 본을 그렸다. 그 일감은 모두 내가 맡아 하기로 했다. 잡고 있던 연필 끝이 흔들리더니 살짝 빗겨나갔다. 그런데도 단청 문양을 그려 촛바늘로 필선을 따라 구멍을 뚫는 작업을 하루 걸려 모두 마쳤다. 그 문양을 본 아저씨는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감이 살아있네. 단청 문양 본뜨는 재주는 타고났다. 이래서 영갑이가 네 재주를 그토록 아까워했던 게야. 어쩌면 한을 풀고 싶었겠지.”

아저씨는 분채를 갈고 딱딱한 아교를 절구에 잘게 부수며, 스승이던 할아버지의 밑에서 겪은 견습생 시절 이야기를 영웅담처럼 털어놨다. 아웅다웅 부대껴가며 산 그 세월이 몹시 그리워지는 모양이었다.

금당 보수 작업을 시작하는 날이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단청 칠은 한 사람이 전체를 칠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장은 중요 부분을 맡아 칠하고 부단장이 그다음을 칠하고 조수는 마지막으로 빈틈 메움질을 했다. 때로는 채기에 담긴 색을 분산해서 칠을 하기도 했다. 많게는 일곱 명이 한 조가 되어 단청 칠을 하지만, 형편상 두세 명이 한 조를 이루기도 했다.

아버지가 일하지 못 하자 내가 그 자리에 투입된 것이다. 자리가 비워지면 다른 이가 그 자리를 메우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단청칠 작업은 손발이 척척 맞아야 했고, 정밀한 기술을 요구하는 일이라 쉽게 사람을 빼고 들고 하지는 않았다.

아저씨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온 사람도 많이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아저씨와 아버지, 그 세 명이 한 조로 일을 다녔다. 전국 사찰을 돌며 작업을 한 탓에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나는 우석이네 집에서 지냈다. 그 집에서 몇 달씩 생활했던 적도 있었다. 또 다른 형태의 가족으로 살았다. 우석이를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잡고 있던 촛바늘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손끝이 찌릿한 자극이 반복적으로 퍼졌다. 잡다한 생각을 털어내고 작업에만 집중해야 했다.

곧 발판 작업을 설치했다. 부연에서 맨 밑 석가래, 돌청방 그리고 모서리 기둥까지도 전부 아교를 꼼꼼하게 칠했다. 아교가 바짝 바르면, 촛바늘로 필선을 뚫어둔 도안을 부재에 고정하고 호분가루 주머니로 살살 두드리는 타분작업을 시작했다. 직접 목탄이나 연필로 문양을 부재에 직접 그려 넣지는 않았다. 자칫 문양 배열이 틀어지는 경우가 있어서였다. 그 문양 배열의 간격을 부재에 잘 뜨는 기술은 아버지가 잘했다. 아버지가 하던 일을 내가 대신하기로 했으면서도, 자칫 실수라도 저지를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오래전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기술을 배웠던 때가 떠올랐다. 붓 잡은 손이 갑자기 떨리는 경우가 많아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 경우 장척을 이용해 칠을 했다. 장척은 폭이 좁은 나무 자처럼 생긴 모양새를 하고 있다. 길이가 짧은 것은 동척으로 아주 세밀한 부분을 할 때는 지지대로 이용했다. 나는 장척을 주로 썼다.

대웅전 천장 한가운데 부처님의 불두에 그려야 하는 관세음보살상과 부처의 눈동자에 방점을 찍는 일은 단청 단장이었던 박 씨 아저씨의 주특기였다. 나는 가칠 작업과 메움질에 투입되거나 단청 초벌칠을 맡아 했을 뿐, 온전한 기술을 배우려면 갈 길이 멀었다.

단청 문양은 건축물의 부위에 따라 의미 있는 문양을 쓴다. 단청장의 기술에 따라 단청 문양이 다양하다. 아저씨는 한가운데 특징적인 그림 별지화를 그려 넣었다. 그 별지화는 식물의 덩굴이 얽히고설킨 당초 문양, 연꽃 문양, 복숭아 문양, 용 문양 그리고 부처상까지 있었다. 궁궐 단청은 주로 용과 봉황을 쌍으로 그렸다. 문양은 총 2백여 가지가 넘었다.

아저씨는 해태상을 추녀나 모서리 부분에 그려 넣는데, 매우 익살스러운 미소가 특징이었다. 양쪽으로 벌어진 입의 크기가 귀에 거릴 듯이 컸다. 해태는 귀신을 쫓아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불을 먹는 동물이라 하여 불을 방지하는 뜻을 담고 있어 사찰 건물 모서리 부분에 많이 들어갔다.

이번 금당 보수 작업에는 해태상을 그리지 않고 연꽃 문양을 추녀 끝에 그릴 예정이었다. 복원 작업이라서 처음 했던 그대로의 문양이었다.

아저씨는 오른손으로 통필을 잡았다. 외손 엄지엔 채기가 든 달루를 낀 채 사다리를 탔다. 나는 아저씨가 원하는 물감과 소도구를 찾아서 위로 올려줬다. 50여 종이 넘는 도구가 펼쳐진 작업대에서 아저씨가 찾는 순서를 생각해 미리 정리를 해뒀다. 채색을 제조할 때 각각의 색마다 아교 성분이 들어가야만 안료가 잘 섞였다. 아교는 동물의 가죽과 뼈를 고아서 만든 접착제였다. 단청 안료는 돌과 조개껍데기 가루 그리고 동굴 속과 땅속 깊이에서 묻힌 흙에서 색을 구해 썼다. 아교를 안료에 넣고 잘 풀어주는 것이 관건이었다.

통붓으로 아교와 안료를 섞자, 쩍쩍하는 소리가 났다. 아교와 안료의 비율, 아교와 안료의 밀도가 정확히 맞았다는 신호였다. 아교가 제 역할을 못 하면 나무와 물감 사이에 틈이 생겨 단청칠이 들뜨게 된다. 채색 작업이 끝나고, 각 문양의 윤곽에 먹선과 분선을 넣어 시분 작업을 했다. 그리고 강조할 부문에 금박을 붙였다.

꼬박 보름이 걸려 모든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계속>

[약력]이경 소설가

대전대 대학원문예창작학과 석사졸업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2022년 직지소설문학상 중편소설 최우수상 수상 ‘달루에 걸린 직지’

*저서: 장편소설 『는개』, 『탈의 꽃』,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 『아름다운 독』 에세이집『아난다가보내온 꽃씨』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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