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대보름을 막 지나고,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에 있는 괘방령(掛榜嶺)의 과거급제 길과 박이룡 장군의 충절이 깃든 황의사를 방문했다.

‘정월대보름에는 개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풍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정월대보름에 개에게 음식을 주면 힘이 솟구쳐 달을 잡아먹는다는 재미난 속담은, 여성을 상징하는 달 때문인 듯하다. 달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린 수많은 어머니와 아내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서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及第)를 알리는 방(榜)이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괘방령에는, 정월대보름이면 휘영청 둥근달을 바라보며 치성을 드리는 어미의 조각상이 허리를 구부린 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어서 시선을 끌었다. 괘방령 초입부터 다양한 조형물을 만들어 놓아 방문객들에게 역사의 쉼터를 만든 섬세함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아들의 과거급제를 염원하는 어미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돌탑 위에 떠돌다가 둥근 달 속으로 스며들 것 같아, 같은 마음으로 허리를 구부린 채 아들의 기도를 올렸다.

수많은 수험생의 합격과 가족들의 안녕을 비는 소원지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는 듯 입춘을 알리는 바람에 나부꼈다.

괘방령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허리에 올라섰다. 경상도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의 경계를 알리는 이정표를 내려다 봤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갈리는 지형이었다.

영동군 매곡면을 잇는 고갯길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는 괘방령으로 산경표(山徑表)에서는 괘방산(桂榜山)으로 기록하고 있다. 추풍령이 주로 관로(管路)라고 하면 괘방령은 상로(商路)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추풍령으로 가지 않고 괘방령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돌아간 것은 추풍령 지명 때문이었다. 추풍령 길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는 속설 때문에 먼 길을 돌아 괘방령을 넘은 것이고, 그래서 많은 전설이 그곳에 서려 있었다.

괘방령에는 박이룡 장군의 충정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황의사는 학촌 박이룡(朴以龍) 장군의 충절과 그 뜻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황의사는 괘방령에서 매곡면 쪽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도로에서도 보일 정도로 양지바른 위치에 있다.

학촌 박이룡(朴以龍) 장군(1533~1595)은 충주인으로, 1533년에 출생하여 선조 10년(1577년) 승문원 정자로 처음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해서(현재 황해도) 순찰사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스스로 황의장이 되어 1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괘방령을 근거지로 삼아 김천, 지례, 개령, 선산 등지에서 200여 회에 걸쳐 수많은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능선 현령(전라도 화순)을 제수받았고, 1595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봉해졌으나, 왜란 때의 부상이 재발하여 그해 4월 6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순조 12년(1812) 이조 참의로 증직 되었다. 현재 사당은 1998년 4원 완공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기와집이다.

괘방령은 해발 300m의 낮은 고개, 하지만 민족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의 정기가 뻗어 있다. 그 기운이 황학산으로 힘차게 뻗어 오르다가 금강과 낙동강에 다다르면 그 기개가 분수령을 이룬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괘방령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충신이 나오고 학자가 나오고 선지자가 나오는 그런 장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괘방령: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황의사(영동군 향토유적 제61호)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산 284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