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옥

아침부터 구름사이로 들락거리던 햇살이 오후가 되자, 화사한 빛으로 한결 부드러워진 풍경 위로 내려앉고 있다.

발코니 넘어 건너편 산 능선은 비를 기다리는 것처럼 문을 열어두었던 계절이 어제께 내린 비로 성큼, 다가온 봄은 날이 갈수록 연초록의 눈빛으로 젖어들고, 산의 어께가 분홍빛으로 물이 들었다. 들쑥날쑥 변덕스런 날씨에도 수줍은 봄, 발걸음은 곳곳에 거침없이 초록의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오고 있다. 뾰족뾰족 고개를 내민 새싹들의 속삭임이 어린아이들처럼 천진스러워 보인다.

눈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풍광에 빠져 있노라니 문득, 지난주 빗길을 달려 다녀온 한국관광공사 주관 세계문화유산 ‘산사’ 교육 2박3일 과정이 떠올랐다. 교육받는 내내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옥천군의 천년 고찰 용암사로 나는 서둘러 차를 타고 향했다.

먼저 내 고장 사찰 용암사를 거론하기 전 짧은 소견과 지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조심스러운 점을 미리 밝혀둔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리 51~4 번지의 장령산자락, 연둣빛 봄이 살포시 앉아있는 용암사, 옥천의 대표적인 출사지로, 일출과 운해 (운무) 로 미국 ‘cnn go' 이 선정한 한국의 가볼 만 한 아름다운 곳 50선에 선정,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낮게 깔린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떠오르는 붉은 일출을 담기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특히 새해를 맞는 1월1일부터 설날(음력)까지는 이른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면서도 꾸준히 찾는 곳이다. 옥천군에서는 이곳을 오르는 사람들을 위해 전망대를 만들었다.

용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본사인 법주사 의 말사로 신라 552년 ( 진흥왕13) 년, 의신조사가 천추국 인도를 다녀와서 553년의 법주사보다 1년 앞서 창건한 천년고찰 이다. 창건 이후의 중수, 중건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불우(拂宇) 조나<여지도서> 의 사찰조에 용암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중기 용암사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폐허화 설도 전해지고, 한동안 복구되지 못했던 탓도 있으리라. 다만 고려양식의 석탑과 마애불이 남아있어 고려시대에 법통이 이어져 왔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건물로는 대웅전, 산신각, 용왕각, 요사채, 범종각이 있다.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용바위는 파괴되었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번 교육으로 안 사실인데 각 사찰마다 그 상황, 형편에 따라 주불과 협시불이 모셔진다고 했다.

옥천군 용암사 대웅전 안에는 1998년 11월 20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93호로 지정된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주불로 모시고,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 모셔져있다. 확실치는 않으나 (1846 ~1928) 금호당약효의 대표작 중 하나인 불모佛母, 화승의 작품인 듯한 ‘영산회상도’가 있었으며, 5종의 탱화도 보관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후불탱화(後佛竀畵)와 1877년 (고종14)에 조성된 신중탱화는 문화재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한다. 1880년 불상을 열어 보았을 때 복장 속에는‘순치8년 신묘년 (효종)2년 1651년에 만들어진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그로인하여 제작년도가 밝혀졌다. 다라니경에는 경상북도 문경의 오정사에서 만들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마당을 지나 야트막한 등성으로 올라섰다. 용암사의 볼거리, 2002년 3월 12일 대한민국 보물 1338호로 지정되었던, 동-서 삼층석탑2기가 자연암반 위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 석탑은 일반적 가람배치와 달리 사방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북쪽 낮은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다. 탑이나 건물을 세워 산천의 쇠락한 기운을 북돋아 주기위해 고려시대의 산천비보사상에 따라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석탑 앞에서 내려 보니, 산의 조망들로 겹겹이 둘러싸려 푹 꺼진 옥천군 시내가 마치 크고 작은 불럭을 모아 쌓아놓은 듯하였다. 앞이 시원하게 탁 트인 차경과 선경 앞에 사방으로 펼쳐진 조망들이 마치 장엄한 산수화가 연상되었다.

나는 등 뒤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듯 한 마음에 끌려 뒷산을 바라보았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17호 마애불을 보기위해 뒷산자락을 급한 걸음으로 올랐다.

고려중기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은 키 높이 3m. 장신의 화려한 연화대좌 위에 정면관(正面觀: 앞에서 바라본 모습)의 여래입상이 정감 있는 얼굴로 반긴다. 전체적인 체격으로 균형 잡힌 비례와 유려한 옷주름 선 그리고 고부조(高浮彫: 높은 돋을새김)에 의한 적절한 양감이 어우러진 수작이다. 불상의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정제된 상호(相好: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훌륭한 용모와 형상)에서 정감이 넘치면서도 위엄 있는 불성(佛性)을 잘 반영하고 있다.

천년도 더 된 고찰古刹 용암사

세월의 시공을 넘어 그림처럼 앉아있다

겹겹히 싸도는 신령스런 장령산자락

천년을 지켜온 산사엔 무심한 바람만이 드나들고

새소리 바람소리 고즈넉하여

처마끝 풍경소리마저 한가롭다

대웅전꽃살문양은 고색을 더해가고

아미타여래좌상 정좌로 앉아

설법해도 두개의 동서석탑

골똘한 상념에 잠겨 있다

뒷산 자락

둥실 떠 있던 마애불이 가사 폭을 펼치고

바람이 하늘을 건너

산신각 처마 끝만 바람질 하고 있다

졸시<용암사에서>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용바위에서 서라벌이 있는 남쪽 하늘을 보며 통곡했다는 설이 있다. 마이태자가 신라 멸망을 통탄하며, 유랑하던 중에 이곳에 머물면서 누이 덕주공주을 그리며 조각했다는 설도 있으며, 참고로 덕주공주가 머물렀던 체천덕주사에도 마애불이 조성되어있다. 머물던 마이태자가 떠나자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조성했다고 하여 마의태자상 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마애불은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고도 전해진다는 설이 있어 많은 신도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 마음속에는 천개의 얼굴이 있다고 했던가. 간절한 마음은 번뇌가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위안이 될지 않을까.

해그림자가 대웅전 팔작지붕 용마루 끝에 걸려있다. 줄어든 햇살이 구겨진 저녁, 며칠 동안 시원치 않았던 마음은, 연둣빛 물결의 배웅을 받으며 내려오는 동안 한결 가벼워진 듯하다.

다만, 주차장이 경내 가까이 들어와 있고, 오르는 계단 양옆으로 성벽처럼 쌓아 올린 커다란 벽돌 바위들로, 세속의 지나친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니, 천년 고찰의 고색창연함이 더해야 할 사찰은 자연의 풍치를 지니지 못함이, 못내 아쉬움을 금할 길 없었다.

배정옥

충북 옥천 출생

2011년 월간 문학저널 시 신인문학상

2014년 한국 영농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작품상

2014년 시집: 시간의 그늘,

2019년 수필집: 바람은 왜 한쪽으로만 부는가,

한국 문인협회 옥천지부 이사, (현)

옥천군 문화해설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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