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쉬는 날이다. 햇살에 눈이 부셔 눈을 떴다. 어느새 아침햇살이 방안 가득 들어와 여기저기 탐닉하고 있다. 그 빛과 빛 사이에 묵은 먼지들이 둥둥 떠다닌다.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뜨고 그 먼지들을 한창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아침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기분이다.

침대에 이리저리 몸 도장을 찍다가 꼭 닫치지 않고 살짝 배를 내민 옷장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문이 잘 닫히질 않았던 것 같았다. 그 생각에 게으른 기지개를 켜고 일어났다. 지긋이 옷장 문을 밀어보았지만, 닫치지 않는다. 살짝 문을 여는 순간 떠밀리듯 '와르르' 내 발등으로 무릎까지 옷들이 산사태가 나듯 흘러내렸다. 한동안 바빠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쉽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옷장 문을 열어 놓은 채 거실로 나왔다. 고요함이 놀라 햇살 속으로 숨는다.

대충 아침을 챙겨 먹고 다시 옷장으로 갔다. 재정리를 위해 주섬주섬 다시 접고 있는데 안쪽에 해묵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뚜껑에는 속내의를 입은 옛 여배우가 웃고 있었다. 열어보는 순간, 낯익은 향내가 울걱울걱 목젖까지 차오른다. 36년 전 내가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코바늘로 레이스를 떠서 만들어 혼수로 가져온 것들이었다. 책상보와 이불보 전화 받침 보에 커튼도 그 시절에는 직접 수를 놓아 만들었다. 기억의 갈피에 서려 있는 십자수 레이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아스라이 다가온다. 작은 창가에 걸려 나풀대던 하늘색 커튼과 꽃 모양 레이스의 책상보가 생각났다. 정갈한 천이 깔린 책상위에 안데르센의 동화집을 펴놓고 읽어주면 까만 눈동자를 별처럼 초롱초롱 굴리며 골똘히 듣던 아이들, 내 화장대 위에 활짝 활짝 피어나던 꽃송이들, 나의 젊은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지난 36년의 겪었던 숱한 고통이나 슬픔도 즐거웠던 기쁨도, 해가 뜨면 사라져버리는 아침이슬과도 같은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이 유연해서 좋았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이 고여 있기보다는 흐르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 누렇게 빛이 바랬다. 그 누르스름한 얼룩조차도 새삼 소중해 보였다.

요즘 같은 물질만능 시대에 돈만 있으면 예쁘고 좋은 것들로 넘쳐난다. 그렇지만 추억의 냄새가 없다. 필요에 따라 다르지만 오래된 것에는 느긋하게 발효된 세월의 흔적과 추억이 담겨있다. 오래된 것들과 이야기가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그 오래된 시간의 깊이를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손때가 묻은 것들은 조금은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한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들여다보다가 차곡차곡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넣고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놓았다. 내심 앞으로 얼마나 살아갈지 모르지만, 그것에 대한 추억을 곱씹으며 젊었을 때의 행복을 회상하리라. 그것으로 마음을 살찌우고 위안을 삼으리라. 지난 시간은 젊고 가난했지만 미숙하고 아름답고 안타까웠던 그 마음을, 그것들이 그 마음의 삼십육 년 뒤까지를 이렇게 깊이 어루만지는 감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오래되어서 소중하듯이 사람도 오래될수록 은은하게 빛이 나고 깊이가 있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쏟아져 내린 옷들을 정리하고 옷장 문을 닫으니 ‘딸깍’ 경쾌한 소리가 났다. 불룩하게 내밀었던 문이 단정하게 딱 들어맞게 닫쳤다.

거실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시고 있노라니 향내가 물씬 코끝을 스쳤다. 어느새 정원엔 노란 국화꽃이 활짝 피었다. 그 향기가 햇살에 떠밀려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배정옥>

충북 옥천 출생

2011년 월간 문학저널 시 신인문학상

2014년 한국 영농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작품상

2014년 시집: 시간의 그늘,

2019년 수필집: 바람은 왜 한쪽으로만 부는가,

2019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시 낭송 부분 금상

202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문학 부분 예술인상

한국 문인협회 옥천지부 이사, (현)

문정문학 회원,

옥천 향토사연구회 현 감사

옥천 신문, 향수신문 칼럼연재

지용 시낭송 협의회 감사 (전)

월간 문학저널 청주지부 회원

옥천군 문화해설사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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