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팔경중 8경인 노성산성을 찾았다. 비가 자주 내려 며칠을 벼르고 벌려서 찾아 왔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 네비게이션에 노성산성을 치고 시키는대로 왔더니 노성면 가곡리 맨 윗집에서 안내가 끝난다. 그집 할머니께 여쭈었더니 도로 나가서 큰길에서 더 올라 가면 가는 길이 있다고 알려 주신다.

도로 나와 큰길에서 한 오리쯤가니 노성산성 팻말이 보인다. 그길은 임도로서 포장도 안돼 있고 겨우 한 대 다닐만한 길이었다. 워낙 산 길을 많이 다녀 본 터라 무작정 들어 선다. 그렇게 한참을 갔는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안내판도 없고 길은 묵묵부답이다. 또 한 오리 쯤 갔을까 넓은 공터와 이것 저것 안내 팻말이 서있는 사거리가 나온다. 차를 세우고 내려 서보니 산성입구가 맞다. 사람도 또 다른 길로 올라오고 내려 가고 하는 것을 보니 올라 오는 길이 따로 있었나 보다. 올라 오는 사람에게 물으니 한 15분 올라 가면 된다고 한다.

올라 가는 길은 충분히 차가 올라 갈 수 있을 만큼 넓다. 제일먼저 눈에 띄는것이 시화판이다. 이 시화 판은 올라 가면 서 계속있었다. 하나하나 읽으며 올라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또하나 특징은 선돌이 많다. 크지는 않아도 서있는 바위들이 많다. 많은 소원을 품은 첫번째 선돌이다

시화판을 읽고 계속 찍으며 올라 간다.

또 선돌이 있다.

논산 사람들은 문학을 좋아하는가 보다. 수준이 높은 곳인가 보다.

갈래길이다. 큰길은 돌아서 편하게 가는 길이고 계단길은 가파르게 바로 올라 가는 길인 것 같다. 계단길을 택한다.

조금 오르니 옛날에 축성한 그대로의 모습인양 성곽이 보인다.

산길을 가면 흔하게 만나는 돌무더기. 어려서 서낭당 고개를 넘을 때 돌을 주워서 던지고 소원을 빌고 깨금발을 뛰어서 지나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길을 갈 때 돌이 많으면 걸려 넘어질까봐 한 개씩 주워다 한군데 쌓아 놓으므로서 안전을 도모한 선조들의 지혜라고 생각했었다. 

길이 생각한 것 보다 가파르다. 그러나 지나온 원형성벽외에 성이 보이지 않는다.

올라 오면서 보니까 산불이 언제 났었나 보다. 나무들이 그을려 있고 죽은 나무도 많다.

수풀 사이로 계룡산의 웅장함과 상월벌판이 시원하게 보인다

한참 올라 왔는데 또 올라 가야 한다. 숨은 턱에 닫고 성벽은 안보이고

정자가 보이는 것을 보니 정상이 가까웠나보다

운동기구도 있다. 힘들게 올라 왔는데 운동을 또 하라고? 나는 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안 생긴다.

계단을 오르려니 막아 놨다.

돌아서 올라 가려니 시 한 수 읊고 가란다

드디어 정상이다. 겨우 348m밖에 안 되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산에 올라 보면 쉽게 오르는 산이 있는 가 하면 힘들게 오르는 산이 있다.
아마 힘들게 올라 가지는 산은 나와 안 맞는 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정상에 올라 또 시 한수 읊는다.

정자도 못들어 가게 막아 놨다. 안내문을 보니 낡아 있다 그만큼 오랜 날들을 막아 놓고 수리를 안했다고 알려 주는 것 같다.
만드는 것보다 관리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많은 시설물들이 만들 때는 요란을 떨지만, 그 뒤로는 나 몰라라 하는 것을 많이 본다.
관심이 없는 건지 예산이 없는 것인지 방치 되어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여기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도 들어가서 계룡산을 한 컷 찍었다. 정상에서 얼핏 둘러 보아도 성벽은 안 보인다.
성을 찾아 와서 정상에 오를 때 까지 성을 못 보기는 처음이다.
마침 올라온 사람이 있어 물어 보니 올라온 길 반대 쪽으로 내려 가면 있다고한다.

조금 내려오니 짦은 바윗길이 나타난다. 여기도 뾰족뾰족 서있다.

더 내려 오니 웬 고래등 같은 기와지붕이 가로 막는다. 모 종교단체의 노성본원이란다

여기에는 선돌이 많다. 삼성암,칠성암이라 새겨져 있다. 옆에 비석은 노성산성 표지석이다. 글 형식으로 보아 대한민국 초기 쯤에 세운 것 같다

아직도 산성은 안 보인다. 아까 갈래길에서 큰길로 오면 이곳으로 오게 되나보다.

또 시 한 수 읊고 하산길에 들어 선다

조금 내려 오니 신식 노성산성 안내판이 서 있다.

담쟁이에 점령당한 나무도 힘자랑을 한다.

산성에 와서 처음 놀란 것은 정상에 올라가도 산성이 안보인다는 것과,
들째는 산성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고래등 같이 큰 기와집과 산소가 있는 것,
세번째가 이 집이다. 민가인듯한데 거기다 빈집인것 같은데 성안에 있으니 말이다.
이것도 산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데 다 쓰러져가는 집이 왜 새로 복원한 성곽 바로 위에 떡하니 있어야하나?

드디어 산성을 보았다. 길 양쪽에 있다. 이것이 마주봤을 때 왼쪽에 있는 산성 모습이다

이것은 오른쪽의 산성이다.

한쪽에 100여m 정도씩 복구되어 있다.

마치 산성을 뚝 잘라 그 허물어진 돌을 깔아 길을 낸것 같다.
논산시에서 발행한 팜플렛에 보니 지금 17%정도 정비 보수가 되었고
앞으로도 학술조사를 바탕으로 정비. 보수할 계획이라고 한다.
빨리 복원되어 옛모습을 다시 찾아 산성으로서 품위가 살아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올라 왔던 길이 아닌 사람들이 다니는 다른길로 내려오니 바로 명재 고택이 있다.
명재는 조선 후기 소론의 영수인 윤증의 호이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윤증고택이라 불렀었다.
회덕의 송시열과 니성의 윤증이 벌린 논쟁 '회니시비(懷尼是非)'가 유명하다. 
사랑채 누마루 위에 '이은시사(離隱時舍)' 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속세를 떠나 은거하며 때를 기다리는 집'이란 뜻이다

사진가라면 한번쯤 와 봤을 사진촬영 명소로서 유명한 곳이다.

오랜만에 이곳 사진을 찍어본다

연못에서 바라본 고택 전경이다.

연못에는 개구리밥이 잔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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