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1년(885년) 조구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창건 당시 사찰 앞산에서 캐낸 금으로 부처님을 조성했다고 해 ‘보석사(寶石寺)’라고 불린 이 사찰은 지역민들에게 보석과도 같은 부처님의 말씀과 따뜻한 자비심을 전하는데 진력을 다하고 있다.

장곡스님은 논산 관촉사, 부여 고란사, 공주 갑사 주지를 역임하며 지역 포교에 앞장서 온 스님이다.

2000년 초 대전 서구노인복지관장 소임을 맡아 지역 노인복지에 헌신하는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원력보살이다.

2020년 6월 서구노인복지관장 정년퇴임과 함께 금산 보석사 주지 소임을 맡아 매일 새벽예불을 올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사찰 입구부터 인근 암자까지 직접 예초기를 들고 풀을 베고 쓰레기를 줍는다.

부전 스님 한 명 없이 스님 홀로 사중에 머물며 종무원 몇 명과 사찰을 운영하고 있다 보니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장곡스님은 올해로 출가한지 40년이 훌쩍 넘은 종단 중진이다. 스님은 1973년 17세 나이에 고향인 부여 소재 무량사에 입산해 진경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동국대를 졸업한 스님은 1981년 논산 관촉사에서 첫 주지 소임을 맡았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제25회 대신제>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 대신제가 2020년 10월24일 열려보석사 은행나무대신제 보존회가 주관한 이 행사는 코로나19 극복 및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진행됐다.

주지 장곡스님은 보석사가 창건되면서 은행나무도 함께 심어졌고 온갖 풍상과 재해를 겪으면서 1135년을 지역민들과 평화를 보장하는 신목으로 지내왔다고 말했다.

문정우 금산군수는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소리를 내 울음으로써 재난에 대비하도록 알려주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석사 역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885년(헌강왕 11)에 조구(祖丘)가 창건하였으며, 창건 당시 절 앞산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고종 때 명성황후가 중창하여 원당(願堂)으로 삼았으며, 1912년부터는 31본산의 하나로서, 전라북도 일원의 33개 말사를 통괄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진영각·심검당(尋劒堂)·산신각·응향각(凝香閣)·체실(體室)·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다포집 맞배지붕이며, 법당 내부에는 석가모니불·관세음보살·문수보살의 좌상(坐像)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섬세하며, 상호가 원만하고 자비로워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는 극치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진영각은 휴정(休靜)·유정(惟政)·영규(靈圭)의 영정을 모셨던 곳이나 최근에 영정을 도난당하였다. 또한 이 절의 의병승장비(義兵僧將碑)는 공주의 청련암(靑蓮庵)과 보석사에서 무예를 익힌 뒤 임진왜란 때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한 승병장 영규의 순절비로서, 1839년 5월에 금산 군수가 절 입구에 세운 것이다. 영규가 순국한 내용을 적은 이 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서 자획이 뭉개지고 땅에 묻혔던 것을 1945년 정요신(鄭堯臣)이 찾아서 다시 세웠으며, 높이는 약 4m이다.

이 밖에도 절 입구에는 둘레 11m의 큰 은행나무가 있다. 이 나무는 창건주 조구가 제자 5인과 더불어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상징하는 뜻에서 둥글게 여섯 그루를 심은 것이 하나로 합해졌다고 하며, 나라에 이변이 있을 때는 24시간을 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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