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은 봄부터 쳐들어 온 코로나19와 긴 장마, 태풍으로 요란했다. 그렇게 일그러진 채로 여름이 떠나고 가을이 시작되는 요즘 선운사는 빨갛게 물들어 가고 있다. 그렇게 선운사의 가을은 꽃무릇(석산石蒜)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푸르던 나뭇잎이 색깔을 바꿀 무렵, 태양이 제 빛을 여위어 갈 때 쯤, 여름을 활활 태우던 가슴이 시려 올 때쯤 위로하듯 꽃무릇은 피어난다.

꽃무릇도 상사화처럼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상사화는 꽃을 피우고 월동을 한 후에 잎이 나와 봄내 있다가 꽃필 때 쯤 사라지지만 꽃무릇은 꽃이 지고 나면 바로 잎이 나온 채로 월동을 한다. 겨우내 봄내 무성하던 잎은 여름이 되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이렇게 상사화와 꽃무릇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꽃 모양도 색깔도 자세히 보면 다르다. 꽃무릇은 빨간색이지만 상사화는 흰색, 노란색, 붉은 색 등 다양하다. 피는 시기도 상사화는 8~9월로 꽃무릇보다 한 달가량 빠르다.

꽃무릇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랑하는 이가 떠난 듯한 그 텅 빈 자리에 불현듯 그리움의 꽃대 하나 기다랗게 올린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슬픈 추억처럼, 잃어버린 기억처럼, 빨갛게 서러움으로 꽃을 피운다. 그래서 꽃무릇을 보면 화려함 속에서도 슬픈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슬픈 노래가 듣고 싶어 매년 선운사를 찾는다. 올해도 지난 17일 가을비가 추적거리던 날 선운사를 찾았다. 이제 막 피어나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상사화는 더욱 애처로워 보인다.

올해는 코로나19의 습격으로 축제도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워낙 유명한 곳이라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다. 나는 선운사의 꽃무릇을 보러 갈 때는 아침 일찍 간다. 해 뜨기 전 그곳에 도착하면 꽃술 끝에 맺혀있는 아침 햇살의 영롱한 빨간 이슬방울을 볼 수 있다. 아침 안개라도 끼어 있으면 금상첨화다. 그러나 오늘은 비 때문에 그런 호사는 다음으로 미룬다. 그렇지만 어떠랴. 꽃술 끝에 이슬 대신 빨간 빗물이 송알송알 슬픈 듯 아름답지 않은가? 꽃무릇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선운사의 꽃무릇은 고목들이 우거진 숲속에서 피어난다. 그래서 고목과의 어우러짐이 또한 좋다. 유난히 길었던 지난여름 장마의 흔적들이 이끼로 피어나 고목은 더욱 고풍스럽다. 그 고목을 가운데 두고 피어난 꽃무릇은 강강수월래 놀이를 하며 함께 춤을 추고 있다. 또 개울가에는 물살이 할퀴고 간 자리에 앙상하게 엉켜있는 뿌리들 사이에도 피어나 고목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있다. 어떤 나무는 그 상처가 커서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시들어 가고 있는데 그 밑에서도 꽃무릇은 피어나 빨간 선혈처럼 안타깝게 한다.

 

선운사의 가을 절정은 단풍이다. 꽃무릇이 질 때쯤이면 노을에 물든 저녁 하늘처럼 온통 붉다. 울긋불긋 단풍. 그걸 바라보면 나마져 단풍이 들어 얼굴이 불콰해진다. 사진을 처음 배우고 첫 번째 사진을 찍으러 왔던 곳. 그 빛깔에 반해 가을이 오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하는 곳이다. 그러나 부지런한 나뭇잎들은 벌써 떨어져 냇가 이끼 핀 돌 위에서 가을비를 맞고 있다.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다가 작은 여울이라도 만날라치면 뱅글뱅글 놀기도 하며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이 가을 선운사에 가서 빨간 슬픔의 노래를 듣고 얼굴이 불콰해져 봄도 가을을 멋지게 보내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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