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면서, 어느 날 일을 잘 해 오다가도 몸이 아프거나 일이 안 풀리거나 주변 사람 때문에 정신 쪽이든 일의 쪽이든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대체로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마치 뭔가 끊기는 것 같고 뒤처지는 것처럼 느낀다.

그런 뒤처짐의 느낌은 자기 자신만 늦어지는 것 같은 생각을 한다. 사실은 정반대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곤 한다. 정신 쪽은 마음과 동일한 뜻으로 마음이 정서적이며 주관적으로 개인의 내면에 머무는 것이다. 또 이념적으로 직관이나 사고의 지적 능력이 고차적인 마음의 움직임으로 개인을 초월하는 의미를 가지게 만든다.

살다보면 멀쩡히 일을 잘하고 있다가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어느 날 스스로가 작아 보이는 그런 날이 있다.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그런 기분 말이다. 예를 들면 국제전화 대화중에 핸드폰 밧데리가 부족하거나 고장이 나면 강제로 멈춰 선다. 사람도 큰 병이 나면 일을 멈추고 쉬어야 되듯이 말이다.

이 ‘멈춤’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자존감이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의 경우에 힘이 있을 때 멈추어야 더 큰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도 목표를 이루지 못 할 때면 화가 나고 속상하고 이따금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아마도 자기의 만족이 안 돼 그런 것 같다. 일의 성공과 내 안에서 스스로 평가되는 자존감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늘 어떤 하나의 일에만 빠져 있을 때 바로 그것이 필자에게는 진짜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누구나 이따금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 있다. 자신의 인생에 볼륨과 삶의 부피가 작아지는 기분이고 마음의 밭에 또 바닥까지 메말라가는 자신을 발견된다. 완벽하지 않은 조건이 오히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가 시들지 않고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되어야 하고.. 바로 멈출 수 없는 그 이유가 강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옥주 박사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써 온지도 벌써 10년째가 되었다. 필자가 불교공뉴스 기사를 쓰는 동안 “절에 다니 냐? 또는 불자냐? 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필자는 카톨릭 신자이다. 성당에서 결혼을 했고 세레 명은 세라피나이다. 법무부 소년교도소 교정교육위원으로 활동하다 보면 교정위원 중에는 스님, 신부님, 목사님, 원불교 성직자 와 대학교수 들이 계신다.

교정 교육위원으로 만나 15년 전부터 알게 된 불교공뉴스․TV 대표 혜철 스님과 인연이 되어 10년 동안 글을 써오게 되었다. 어느새 글을 쓰는 일은 필자에게는 명상과 같다. 세상을 그저 흐르는 물처럼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현실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완벽하지 않은 조건이 오히려 자기 안에서 스스로가 시들지 않고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반근착절(盤根錯節)’ 이라는 말 있다. 구부러진 나무부리와 울퉁불퉁한 나무의 마디라는, 즉 비틀어져서 꾸불꾸불한 뿌리와 헝클어진 뜻으로 어떤 것에 부딪혀 보지 않고서는 날카로운 칼도 그 진가를 알 수 없다. 라는 식으로 쓰인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반근착절 같은 곤란한 일을 겪어봐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마음과 몸이 바라는 올바른 것으로 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 좀 더 객관적인 태도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이든 이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불행이 49%인 저울과 행복이 51%인 저울이 있으면 행복조건의 저울은 단 1%가 더 많은 행복 51%의 저울 쪽으로 간다고 하는 말이 있다.

내 안의 나를 시들게 하는 것들이 있다면 ‘행복조건의 저울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야 한다.

okjoojeon@naver.com 전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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