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소설가, 불교공뉴스 편집이사)

절에서 둥지를 틀던 때가 있었다. 빈 절에 공양주로 들어가 글을 쓰겠다고 오기를 부렸던 시절이 한 때 있었던 것이다. 절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열반한 비구니 스님의 남루한 승복 한 벌과 목탁뿐이었다. 공양 간에 남아있는 옹색한 세간들은 꼬질꼬질하니 얼룩져 있었다.

비구니 스님이 열반을 한지 2년이 흘러 온기라고는 찾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한 번도 본적 없는 비구니 스님을 떠올리며 청소를 시작했다. 불단 아래의 오래 묵은 짐들과 공양 간 잡동사니를 선별해 청소를 하는 게 소설 쓰는 작업보다 고통이 덜했다. 주인이 바뀌면 묵은 살림을 버리고 새 살림으로 채워야하는데도 그대로 물려받아 썼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세간들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성한 물건 하나 없었다. 다치고 아픈 그릇들과 세간들이 마치 내 몸처럼 느껴져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정성스럽게 청소를 했다.

부처님을 극진이 모셨던 아난다가 있었다. 아난다의 삶은 그 자체가 부처님의 그림자였다.

아난다는 아누룻다와 함께 석존의 최후를 지켜보았고, 석존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경전으로 옮긴 유일한 제자였다. 그는 철저하게 부처님의 그림자로 살았다. 아난다는 석존과 같은 연배였으며, 석존의 나이 55세 때 시종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25년간 그림자처럼 석존을 따라다니면서 모든 일을 뒷바라지했으며, 석존이 병석에 누우면 계를 범해 가면서 특별한 식사를 준비해 올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운 아난다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보는 게 전부가 아님을 깨우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다.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다. 점점 나는 아난다의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오기를 부렸다. 사실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려 바지가 헤지도록 대웅전과 도량 주위를 쓸고 닦아냈다. 불두(佛頭)에 앉은 오랜 먼지를 털어낼 때는 합장을 하고 잠시 기도를 올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두려웠던 시절이었으니 도량에 쌓인 먼지를 닦는 소지(掃地)는 곧 수행의 일환이었다.

겨울 밤, 문틈으로 바람이 우하고 들어왔다. 낡은 지붕이 언제 무너질지 모를 상황이었으며, 처마를 받치고 있는 기둥은 오래된 지팡이처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또 다시 깊은 밤, 잠이 오지 않으면 열반한 비구니 스님이 남기고간 텔레비전을 틀었다. 수십 년이 되었다는 데도 신통방통 잘도 나왔다. 도량을 휘감고 불어대는 바람소리와 풍경소리를 텔레비전이 밤새 파먹었다. 그래서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이제 그 둥지가 그립다. 그 절에 새 주인 비구스님이 오는 바람에 펼쳐놓았던 책과 노트북을 접고 하산을 했다. 추억 속 그 둥지가 가끔 내 가슴으로 밀려나와 애잔하다.

 나는 아난다를 종종 잊어버린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질이 전부인 양 살아가고 있다.

돈과 명예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다보면 정녕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부질없는 것을 쫒다가 일생을 마치게 된다.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생각을 깊이 하다보면

‘정말 그랬군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길을 돌아보는 지혜가 열린다.

그러하다가도,

‘아, 그게 아닙니다. 살아가자면 눈에 보이는 물질도 중요하지요!’

눈에 보이는 것은 확실하니까, 거짓된 것이 아닐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은 거짓투성이 오물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 또한 허상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 허상을 쫒다가 끝내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번뇌와 망상은 자성이 없어 마음을 따라 왔다가 마음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마음이 공(空)하고 공(空)하면 또 다시 그것마저 공(空)하면 그것이 곧 행복인 것이다.’

쨍쨍 내리꽂히는 햇살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순간에 비로소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된다. 이 세상을 마감하게 될 그날에 우리는 무슨 말로 인생의 일점을 찍을 것인가.

이것이 차면 저것이 부족하고, 이것이 좋다가도 저것이 좋아 보이는 게 욕심이라고 한다.

사람과의 인연도 욕심이 먼저이면 고통이 따른다.

한번 얽힌 인연을 다시 풀어버리고,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맺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자칫 악업을 지을 수 있다.

인연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물건과 물건에도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이 옷을 가지면 저 옷이 좋아 보이고, 이 집을 가지면 저 집이 좋아 보이니, 눈에 보이는 욕심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은 常 인가 無常 인가? 無常 이라면 苦 인가? 樂인가.

숨을 깊이 내쉬며, 다시 한 번 명상의 시간을 가져본다.

앙상한 나뭇가지 파르르 떨고 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았다. 지난 한 해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를 되새겨본다. 정신없이 바빴다는 생각, 가슴에서 무거운 징소리가 난다.

그래서 새해 첫날, 오늘은 조용히 연꽃 종이에 꼭꼭 싸매두었던 내 소망을 톡톡 두드려 볼 참이다.

꽃이 진다고, 낙엽이 떨어진다고 꽃과 나무를 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욕심을 버리고 오래된 인연들을 생각하며, 아난다가 보내온 꽃씨를 뿌릴 계획을 하니 재미지다.

[약력] 이경

대전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1997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오라의 땅’으로 등단

2002년, 동서문학상 단편소설 대상 당선 ‘청수동이의 꿈’

대전작가회의 회원

*저서: 장편소설 『는개』 단편소설집 『도깨비바늘』장편소설 『탈의 꽃』, 단편집 『아름다운 독』 출간

*불교공뉴스 편집이사

*메일 imk08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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