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편찬원(원장 이상배)은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서울과 역사≫ 제101호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서울과 역사≫ 제101호에는 총 9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다. 고고학 분야를 포함하여 조선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다양한 시대의 서울 역사를 주재로 한 연구이다.

게재된 논문은 <서울 은평뉴타운 ‘청담사’ 명문 기와 출토 건물지의 성격 검토>(배재훈), <조선후기 도성문 관리 방식의 변동>(홍순민), <‘전동(典洞) 큰길’ 주변의 근대와 조선 벌열가문의 후예들>(배우성), <1928년 경성의 장티푸스 유행과 상수도 수질 논쟁>(백선례), <일제강점기 경성부 교파신도(敎派神道)의 현황과 활동양상>(문혜진), <식민지 조선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두 가지 방식>(정일영),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미곡 유통정책 변화와 서울특별시 양곡시장조합의 성격>(김민석), <1960년대 서울의 확장과 시영(市營)버스의 등장>(최인영), <서울, 자본의 도시와 교회의 비대화>(이정연)이다.
    
아시아문화원 배재훈 연구원은 <서울 은평뉴타운 ‘청담사’ 명문 기와 출토 건물지의 성격 검토>를 통해 2007년 은평뉴타운 도시 개발 사업 과정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대형 건물지를 사찰로 보는 기존의견에 문제를 제기하고, 고려시대 덕수원(德水院)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은평 뉴타운 ‘청담사(靑覃寺)’ 명문 기와 출토 유적은 대로변에 위치한 특수한 성격의 건물지이다. 이곳에서는 지난 2007~2008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삼각산 청담사 삼보초(三角山 靑覃寺 三宝草)’라고 쓰여 있는 기와가 발견되었다. 

‘삼각산 청담사’는 ‘부아산 청담사(負兒山 靑覃寺)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청담사는 최치원이 해동 화엄의 큰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10산 중의 하나로 언급된 곳으로, 신라 불교사에서 매주 중요한 장소였다. 하지만 위치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침 은평 뉴타운 일대에서 기와가 발견된 것이었다. 

이후 학계 논의는 해당 건물(터)에 대해 청담사로서 나말여초 창건 이후 고려 말과 조선초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는 의견, 청담사로 볼 수 없다는 의견으로 나뉘어졌다. 

배재훈은 이 은평구 뉴타운 ‘청담사’ 명문 기와 출토 유적인 고려와 조선시대 개경과 남경, 한성과 개성을 잇는 중요 교통망의 거점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때문에 이 유적은 수행 공간으로서 사찰이 아닌 관용 건물 혹은 원(院) 시설일 가능성이 있고, 그 원이 바로 문헌 기록에 보이는 덕수원(德水院)이라고 주장했다.  
   
명지대학교 홍순민 교수는 <조선후기 도성문 관리 방식의 변동>을 통해, 한양도성의 도성문이 어떻게 관리되어 왔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하였다.     

한양도성의 구성 요소 가운데 도성문은 다른 요소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군사적 방어 기능 외에 국가권력의 구현과 각종 의례에 실행을 위한 장치이자 도성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한양도성에는 8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에 숭례문과 흥인문 2개의 문만 대문이다. 소의문과 혜화문 두 문만이 소문으로 불렸고, 나머지 문들은 대문과 소문사이거나 소문보다 격이 낮은 위상을 갖고 있었다. 

조선후기 도성을 수축하고 도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도성과 도성문을 관리하는 방식도 정비되었다. 조선초기에서 조선말기까지 국가 기관에서 관리하였는데, 큰 방향은 한성부에서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세군문으로 이동하였다. 

도성문은 단순한 출입 시설을 넘어서 도성민과 나아가 온 나라 백성들을 통재하는 장치였다. 따라서 도성문을 관리하는 방식의 정비와 그 변동은 수도 한성부의 관리와 더 나아가 국가 경영의 변동과 맞물려 있었다. 

그 밖에도 서울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공간성격을 바라본 연구가 함께 실려있다. 서울시립대 배우성 교수의 <‘전동 큰 길’ 주변의 근대와 조선 벌열가문의 후예들>과 서강대 인문학연구소 정일영 HK연구교수의 〈식민지 조선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배우성 교수는 현재의 우정국로와 그 주변을 대상지역으로 하여 이곳이 경험한 근대를 조선시대 장서성과 인간집단이라는 연속성 위에서 그려보았다. 조선 지배엘리트가 근대적 변화에 그들 나름의 방식대로 대응하고 있는 모습을 조명했다. 

정일영 HK연구교수는 이태원 공동묘지를 포함 용산일대에 형성된 죽은 사람들의 공간에 주목했다. 뿌리 없는 자들 혹은 가지지 못한 자들이 매장되었던 이태원 공통묘지는 20세기 초 도시의 확대와 함께 외곽으로 밀려났다. 이때 공동묘지를 밀어내는 주된 힘은 돈이었지만,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식민지적 상황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한편 식민지 군국주의 체제 하에서 용산은 전쟁과 관련된 죽은 자의 공간, 즉 숭배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죽음의 공간을 터부시하면서도 숭배하던 현상은 당시 정치가 반영된 결과였다고 분석하였다. 
  
한편 1960년대 이후 서울의 역사를 다룬 연구도 있다. 충북대 김민석 박사의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미곡 유통정책 변화와 서울특별시 양곡시장조합의 성격〉,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최인영 연구교수의 〈1960년 서울의 확장과 시영(市營)버스의 등장〉, 서울여대 이정연 초빙강의교수의 〈서울, 자본의 도시와 교회의 비대화〉이다. 

김민석 박사는 1968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양곡시장조합에 주목했다. 1960년대 미곡상인들이 유통 단계와 곡가의 계절변동을 이용하여 부당이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서울지역 미곡유통을 일원화하는 조치로 조합을 설립하고 해체하는 과정은 자세히 살펴보았다.

최인영 연구교수와 이정연 초빙강의교수의 연구는 2018년 서울역사편찬원과 도시사학회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20세기 서울의 공간이 팽창하면서 발생했던 사회변동 양상을 각각 교통과 종교 주제로 접근한 것이다. 

최인영 연구교수는 1960년대 서울의 행정구역 확장 이후에 등장한 시영버스는 전차교통을 중심으로 했던 기존 서울 교통체계가 변화하고, 서울생활권으로 미개발지였던 신편입지가 포함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정연 초빙강의교수는 1970년대 도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이 거대한 자본의 도시로 변모했고 이 과정에서 교회 역시 크게 변화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교회는 공동체가 해체됨으로써 촉진되는 지대 상승과 중산층의 밀집, 아파트값의 상승을 통해 공간자본을 획득하면서 비대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서울시청 시민청 지하1층 ‘서울책방’에서 구매(10,000원)할 수 있으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tory.seoul.go.kr)에서 개별 논문을 다운로드 받거나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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