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무쌍하지만 늘 같은 산이다”

논산 벌곡면 수락리 산 29번지, 대둔산 자락 경사진 산길을 숨이 턱에 차도록 걸어 올라갔다. 겨우 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샛길을 말없이 올라가는 길.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거 말고는 힘에 부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발목엔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고 걷는 한 가지만 생각했다. 그렇게 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나락으로 미끄러질 경사진 길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두 시간쯤 걸어 올라간 그곳에 석천암(石泉庵)이 있었다. 바위산 아래 아슬아슬 세워진 암자다. 봄볕이 따뜻했지만, 아직 겨울 그대로인 앞산이 가까운 듯 멀게 병풍처럼 둘러있다. 암자 한쪽 면은 바위 절벽이다. 절벽 한쪽 들어간 자리에 물길이 있는지 쉬지 않고 물방울이 세어 나왔고, 그 물을 모은 작은 옹달샘 하나가 있었다. 바위 사이 물길이 갑천의 발원지라고 했다. 산이 뱉어내는 물은 식수가 되고 생명을 살아있게 하는 원천이 됐다. 석천암은 조선시대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이었다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까 싶었으나 그곳에 천산 스님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온 지 20년째라고 했다.

천산스님은 작곡을 공부하던 고3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어머니를 여읜 스님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20세 되던 12월 24일 출가하고, 21세 강원선방에서 비구계를 받는다. 모든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 산 생활은 편안했다고 한다.

스님은 “역량이 부족한 자신에게 넘치는 조건을 갖게 되었다”며 “물질적 풍요로 30대 인과를 무시한 생활을 했고, 그로 인해 큰 병을 얻었다”고 전했다. 그는 “오롯이 내 죄로 병을 얻었다”며 “일체유심조의 잣대를 버리고 인과응보의 잣대로 생활하기 위해, 스스로 무기수가 되어 석천암에 들어온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스님이 처음 들어올 당시 그곳은 아무도 없고 다 무너져 가는 곳이었다. 스님은 불상을 지게로 져 날랐다. 숨이 가빠 느리고 오래 걸리는 행보였다. 무너져 가는 암자를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손을 댔다. 그렇게 20년이 지나간 시간이라고 했다.

스님은 “자신이 이미 산이 되어버렸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스님은 자신이 사는 인근 모든 지역에 아픈 사람이 생기지 않고, 다툼이 없기를 기원했다. 도를 편다는 건 타협할 수 없는 것으로 방법이 없으며, 도인이 됐다는 건 죽을 각오로 그 도를 펴던지 접던가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곡가 ‘야니와’, ‘베토벤’에 관해 얘기했고, 의술가 ‘화타’에 대한 대화도 곁들였다.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이 모여 옹달샘이 된 바위 절벽 아래서 나눈 스님과의 대화는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경계가 없는 대화였다. 석천암은 편안한 자리였고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장소였다. 암자 아래 작은 텃밭은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아서 빈 고랑이었다. 진돗개 2마리가 편안하게 어슬렁거리다가 봄볕 아래 잠들어 있었다. 이곳에선 개도 수행자의 모습처럼 편안해 보였다. 산을 닮아가는 것인지 산에 깃들어 수행하는 스님을 닮아가는 것인지 평온함, 자체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석천암 깊은 산중으로 들어온 천산 스님이 20년간 보고 들은 바람 소리가 궁금했다. 산을 향해 바라보고 있으면 봄빛에 만개하는 꽃잎 소리 들렸으리라. 추적추적 비 내리는 이 산중의 은밀한 소리는 어떠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눈 덮인 산의 적막은 또 어떤 색이었을까. 그 시간 산은 무엇을 보여주었을까 20년 세월 동안 사람의 발길 닿기가 이토록 어려운 자리에서 스님이 보고 듣고 느낀 그 시간의 무게는 가벼움이었을까. “이미 산이 되어버려 변화무쌍한 산”이라고 말하는 천산스님의 미소는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기자는 이미 산이 되어버린 천산 스님을 만나고 오면서, 가파른 산길 너머로 보이는 깊고 깊은 산맥에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도복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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