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전수조사 결과를 최초로 공개한다. 북한 전역에 걸친 3·1운동 사적지 전수조사 성과를 공개하고, 남북공동 현지 학술조사를 촉구하기 위해 2월 13일(수) 14시 서울 프레지던트 호텔 아이비홀에서 학술포럼을 개최한다.

독립기념관은 3·1운동 100주년을 대비하여 2016년부터 3개년 사업으로 북한 전역을 6개 권역으로 나누어 일제 탄압자료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3.1운동 참여자 판결문 등을 토대로 사적지 조사를 시행하여 작년 12월 사업을 마무리하였다. 그 결과 해서지방(황해도) 158개 소, 관서지방(평안도) 215개 소, 관북지방(함경도) 281개 소를 비롯하여 경기·강원 양도 북한 편입지역 158개 소(경기 75, 강원 83) 등 문헌상으로 적어도 812개 소의 3.1운동 사적지가 북한지역에 산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를 형태별로 나누면 만세시위 현장인 ‘거리’ 475개 소(교량 등 기타 5개 소 포함)와 ‘산야’ 16개 소를 비롯하여 시위군중의 파괴 대상인 면사무소, 경찰주재소, 우편소 등 일제의 탄압기관이 주가 되는 ‘건물’ 244개 소, 그리고 거사 주역들이 시위를 계획하던 거주 ‘가옥’ 77개 소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특히 그 중에는 사천(평남 강서군, 일명 모락장), 맹산(평남 맹산군), 성진읍(함북 성진군), 해주(황해도), 송도(경기도 개성군) 등 북한지역의 대표적, 특징적 만세시위 사적지도 포함되어 있어 적어도 문헌상으로나마 그 구체적 장소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별첨 ‘북한지역 3.1운동 대표 사적지’ 참조)

이번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전수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 남북공동 학술교류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지역 현지 남북공동조사를 관계 당국에 제의할 방침이며, 학술교류 차원에서 사적지 조사보고서를 북한 당국에 제공할 계획으로 있다.

계획, 추진하는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남북 공동 조사사업은 온 겨레가 함께 참여했던 독립운동의 상징적 거사인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 정신과 의의를 기리고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과 동질성 회복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뜻깊은 행사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번 학술포럼에서는 조사를 시행한 권역별로 각 지역의 사적지 조사범위와 기준, 분포 현황, 유형별 특징 등을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향후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독립기념관은 3.1운동에 이어 항일의병(2019년 시행) 사적지를 비롯해 계몽운동, 학생운동, 농민(노동자)운동 등 다른 독립운동 분야에 대해서도 북한지역 사적지 전수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남북 화합과 통일에 기여할 역사자산으로 축적할 계획이다.

<북한지역 3·1운동 대표 사적지>

평양 3·1운동 만세시위지-평양경찰서

3월 1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된 지역은 평양과 진남포, 안주 3곳이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기독교(장로교·감리교)와 천도교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2월 12일 이승훈은 평양 기독교서원에서 평양시위를 위한 준비모임을 했으며,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해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3월 1일, 장로교에서는 장대현교회(목사:길선주) 앞 마당인 숭덕학교 교정에서, 감리교에서는 남산현교회(목사:신홍식), 천도교에서는 시내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각각 광무황제 봉도식 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내로 진출해 합류했다. 천도교에서는 서울 천도교 총부에서 전달받은 독립선언서 중 7,500장을 기독교 측에 보내고 나머지는 각 지역의 만세시위를 독려하기 위해 지역 교구로 밀송했다.

3개 종교단체의 주도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평양 대로를 행진하고 평양경찰서 앞에서 혈성가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치했다. 일경은 군중 해산을 위해 소방대를 동원했고, 성난 군중의 투석으로 경찰서 유리창이 깨졌다. 이를 빌미로한 일경의 발포와 피체 과정에 더욱 분격한 군중들과의 난투극이 벌어지자 일경은 쇠갈고리로 시위대를 구타해 무수한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수백 명이 피체되었다.

강서군 사천 만세시위지-모락장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강서군 반석면 사천시위(모락장만세운동)로 이어진 만세시위로 평남 3.1운동의 가장 투쟁적이고 특징적인 만세시위로 평가된다.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의 주도로 일어난 원장~사천간 만세시위는 일군경과 군중들의 유혈투쟁으로 현장 사망자만 해도 19명, 부상자도 40여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검속된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헌병대의 제지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무차별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하자 격분한 시위대가 총격자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일제의 본격적인 시위 가담자 색출 과정에서 78명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조사과정에서 끔찍한 악형을 당했다. 이 만세시위로 조진탁, 송현근, 차정신, 최능현 등 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5명이 무기징역, 11명이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았다. 조진탁은 사형이 언도되어 평양감옥에서 순국했으며, 현장 순국자 이외에도 최승탁, 이혜준 등 12명이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고문여독으로 출옥 후 바로 순국했다. 이외에도 강서군에서는 3월 3일 기독교·천도교 연합 만세시위에서 일군경의 발포로 사망자 9명과 부상자 4명이 발생했으며, 4일 증산면 구읍에서는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공격해 헌병과 보조원 4명을 처단하는 등 격렬한 유혈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중화군 상원면 만세시위지-상원신읍주재소

중화군 상원 신읍에서는 3월 2일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경찰관 주재소의 철거를 요구하며 총기와 탄약을 탈취하고 중화경찰서장을 포박하며 대치하고, 오후에는 기독교·천도교, 주민 수천 명이 구금된 사람들을 탈환하기 위한 격렬한 시위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평양 경무부와 중화경찰서에서는 매일 각 동네를 수색하며 주동인물을 검거하고 종교인들의 가택을 수색했다.

맹산군 3·1운동 만세시위지-맹산헌병분견대

맹산군에서는 일제의 야만성이 민낯으로 드러난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맹산군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6일과 10일에 걸쳐 비교적 큰 충돌없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헌병분견소에서 기독교계 교사를 피체·고문하자 격분한 군중들이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헌병분견소장이 평화로운 해결을 제의하며 주민 56명을 분견소 내로 불러들이고는 무차별 난사를 자행해 50여 명이 그 자리에서 학살당했다. 3.1운동 역사상 단일 장소에서 최단시간 최다의 피살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선천군 만세시위-선천군청 3·1운동 만세시위지, 선천읍 3·1운동 만세시위지, 신미도 3·1운동 만세시위지

선천에서는 이승훈의 지도에 따라 신성중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신성학교와 보성학교 학생을 포함한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선천수비대와 충돌해 부상자가 발생하고 1백여 명이 피체되었다. 선천 읍내에서는 3월 4일 장날을 기해 1만명의 시위대가 일경과 충돌해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월 5일에는 평북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면서 이날 하루만해도 9개군에서 총 14건의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선천에서는 4개면 5개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신미도(身彌島)에서는 불과 30명의 시위대가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20일간 점거하고 자치적인 행정사무를 집행하기도 했다.

삭주군 만세시위-삭주읍 3·1운동만세시위지, 삭주헌병분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외남면 3·1운동 만세시위지

삭주에서는 3월 5일 청사까지 가두행진하던 시위대와 헌병대의 충돌로 4명이 현장순국하고 20여 명이 피체되었다. 3월 31일과 4월 1일에는 2천여 명의 대규모 시위대가 헌병분견소를 공격했다. 삭주군 외남·대관면에서는 4월 6일 6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2백여 명의 결사대를 선별해 일본군의 탄압에 맞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40명이 피체되었다.

정주면 3·1운동 만세시위지

3월 31일 정주 천도교구에서도 장날을 이용해 정주읍내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각 지역에서 몰려든 시위대가 정주우편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일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이날 희생된 사람만 92명에 달하고 72명이 피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원산리 시장 만세시위지

원산 3.1운동은 이가순과 이순영 등이 주도하였다. 李可順은 2월 21일경 원산부 남촌동 남감리교회 목사 정춘수로부터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원산에서의 3월 1일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는 전도사인 李順榮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서울의 독립선언서가 수량이 부족할 것을 대비하여 2월 26일경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별도로 작성하였다. 이순영은 이가순이 작성한 원산 독립선언서를 2월 28일 밤에 차광은 집에서 약 2,000매를 인쇄하였다. 한편 서울서 작성한 독립선언서도 郭明理를 통하여 100매 정도 도착하였다. 이가순은 3월 1일 오후 2시경 원산리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어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원산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만세 행진을 전개하였다. 주도 인물을 포함하여 50여명이 체포되었다. 3월 18일에도 1천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4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천도교 원산교구당이 폐쇄되었다.

정평군 만세시위-정평 신상리 시장, 정평 풍송리 헌병주재소 등

정평군에서는 3월 7일부터 20일까지 부내면, 주이면, 춘류면, 선덕면, 고산면, 장원면 등에서 24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고산면에서는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풍송리·구창리, 흥봉리, 신경리 등에서 11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만세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군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한동리에서는 독립만세에 참가한 인원이 무력 5,000명에 이르렀다 한다.

함흥군 만세시위-함흥 정차장, 함흥 우시장, 함흥 중하리, 함흥 하동리 등

함흥군에서는 3월 3일부터 시작하여 4월 8일까지 함흥면 등 12개면에서 20회에 걸쳐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외 독립만세운동의 권유 활동, 학생들의 동맹 휴업, 유인물 배포, 방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함흥 읍내에서는 3차례에 걸친 철시운동이 있었다. 일제는 함흥에서 만세운동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월 2일 이래 함흥 시내 각처에서 십여 차례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인사들이 검사국으로 이송되어 3월 31일까지 수감된 인사들이 150~160명에 이르렀다. 이 중에 41명이 기소되었다.

북청군 만세시위-북청 가회면사무소, 북청 읍내 남문, 북청 속후학교 등

북청군에서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3월 8일부터 4월 9일까지 노덕면·신창면·양천면·양화면·상거서면·거산면·속후면 등에서 16차례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외에 유인물 제작과 배포, 2개 면사무소에 방화 활동, 학생들의 동맹 휴업 시도가 있었다. 또한 일제의 사전 탐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것이 3차례가 확인된다. 북청군에서 3월 중순까지 만세운동으로 헌병들에게 체포된 이들은 3월 25일 60명, 3월 31일 36명이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흥군 만세시위-신흥 읍내, 신흥헌병분견소, 신흥공립보통학교 등

신흥군에서는 3월 9일부터 17일까지, 그리고 3월 31일에 동고천면, 가평면, 원평면, 영고면, 동상면, 상원천면 등에서 16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0일에 있었던 만세운동은 신흥보통학교 4학년 학생(유춘갑)이 주도한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는 3월 10일 학교 구내에서 약 170명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고 선두에 서서 구한국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흥경리 일대에서 행진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길주군 만세시위-길주읍 3·1운동 만세시위지, 용원시장 3·1운동만세시위지 등

길주군은 함북의 남단에 위치한 관계로 비교적 일찍 3·1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 議事員인 이태인은 교주 손병희 등이 3월 1일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의 취지에 찬성하여 길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9일 밤 길주군 장백면 도화동에 위치한 이용서 집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12일 길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12일 길주 우시장에서의 만세운동에 1,000여명이 참석하여 길주시내에서 시위하였다. 길주에서의 3.1운동은 이후에도 10여 차례나 일어났는데, 특히 3월 13일은 덕산면과 동해면 등지에서 5회나 일어났다. 동해면에서의 시위는 14일까지 이어졌는데, 주민 1,500여명이 참여하였다. 길주헌병대에서는 총을 난사하여 이날 현장에서 3명이 즉사하였다.

명천군 만세시위-화대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명천군의 시위는 길주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하가면에서는 3월 14일 5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여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시위는 15일까지 이어져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으며, 주도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3월 하순부터는 시위의 규모는 적어졌지만 4월 중순까지 시위는 계속되었다.

성진군 만세시위-성진읍 3·1운동 만세시위지

성진지역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시위는 그리어슨(Robert Grierson, 具禮善) 목사가 운영하는 욱정교회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 3월 10일 오전 10시 그리어슨 목사가 운영하는 제동병원 앞에 5,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고, 시위 군중은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했다. 사태가 확대되자 성진경찰서는 나남기병대에 지원을 요청하다. 나남 보병 제37여단은 장교 1명과 사병 20명을 성진에 파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그러나 성진 읍내의 시위는 인접 지역으로 번져 3월 12일부터 14일에 걸쳐 학동면(鶴東面)으로, 15일에는 학성면으로 파급되어 전개되었다.

해주군 만세시위-해주읍 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남본정예배당 3·1운동 만세시위지

황해도 대표 만세시위는 해주군 해주읍의 시위를 꼽을 수 있다. 이곳은 3월 1일에 이미 만세운동 시도가 있었던 곳이고, 실제 그 다음날인 3월 2일 시위가 일어나 황해도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 중 하나이다. 더욱이 해주읍 시장까지 포함한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시위만 6회에 달하기 때문에 단일 사적지로는 황해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시위가 일어난 공간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황해도 3.1운동의 중심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해주읍 시장은 해주읍 시위의 절반에 해당하는 3회의 시위가 일어난 곳이며, 그 자체로 황해도 지역의 3.1운동 사적지에 있어 ‘시장’ 유형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해주읍과 해주읍 시장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주읍 시장이 자료에서 시위장소로 특정되고 있는 만큼 황해도 지역 3.1운동 관련 ‘시장’ 사적지인 것은 사실이다. 또 이 같은 사실은 그만큼 해주군과 해주읍이 황해도 지역의 3.1운동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해주읍에 대해서는 ‘시장’ 이외에도 황해도 지역 3.1운동을 대표하는 사적지를 한 곳 더 언급할 수 있다. 해주읍에 위치한 남본정예배당이 그것이다. 이곳은 기독교 교회로 3.1운동이 일어난 대표적 사적지로 손색이 없다. 3월 2일 기독교인들이 회집하여 만세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황해도 최초의 시위가 일어난 장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해도지역은 기독교도의 활약이 많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에서도 상징성이 있는 것이다.

수안군 만세시위-수안급천도교구실 3·1운동 만세시위지

시위의 상징성이란 측면에서는 3월 3일 수안군 수안읍 시위가 일어난 수안읍내 천도교교구실도 중요한 사적지이다. 시위 참여인원이 200여 명에 그쳤다는 점에서는 대규모 시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서 촉발된 시위가 전개되면서 시위대가 일제 헌병의 퇴거를 요구하는 등 시위의 목적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까지 발생하여 시위의 상징성이 커졌고, 자연히 이 시위가 계획되고 촉발된 수안읍내 천도교교구실의 중요성 역시 같이 배가된 것이다.

서흥군-녹안리 헌병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4월 9일 시위가 일어난 서흥군 매양면 녹안리 헌병주재소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날 시위에는 약 500명이 참여했는데, 일제의 대탄압으로 6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 가운데 무려 61명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피해 측면에서는 3월 3일 수안군 수안읍시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헌병주재소’가 일제의 시위대 탄압의 전초기지라는 점에 걸맞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성군 만세시위- 개성읍내 3·1운동 만세시위지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는 1919년 3월 3, 4, 5, 23일, 4월 1, 2, 7일까지 지속적으로 3·1운동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3일에는 약 1,500여명 군중이, 같은 날 호수돈여학교 학생 35명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펼쳤다. 3월 4일에는 한영서원 생도들이, 오후에는 600명의 시위대가, 오후 8시경에는 약 2,000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5일에는 약 600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관헌에게 투석, 순사보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3월 7일에는 약 700명의 군중이, 3월 23일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주위 2리 내지 3리의 12개소에서 200~400의 군중이 봉기하여 오후 11시경까지 만세시위를 하고 해산하였다. 4월 1일에도 100~300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헌병이 발포하여 쌍방에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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