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활용 가능한 불교의 자비심

 

동아시아 불교의 주역인 한중일은 붓다의 자비사상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당위성에 대한 일체감은 변함없다고 본다. 붓다의 자비사상이란 무엇인가? 인도에서는 자비란 말을 ‘메따-카루나(Metta-Karuṇā)’라고 한다. 불교의 자비를 기독교적 유태교적 동정(同情)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의 자비에 대한 정의와 개념의 오역이라고 본다. 동정은 타인의 감정에 대해 공감하는 감정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공감과는 다르다. 연민의 일반적인 용법으로 불행한 상황과 고난에 대해 감정을 공유할 때 이용되는 것이 많다. 그러나 긍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사용되는 일도 있다. 동정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와주고 싶은 단계까지 나아가지만 연민은 그렇지 않다.

불교의 자비는 사랑과 동정과 연민을 합친 용어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발고여락(抜苦与楽)이다. 《大智度論27》에는 ’일체중생과 함께 큰 자비를 즐기고, 일체중생의 고통을 큰 자비로 뽑아 버린다(大慈与一切衆生楽、大悲抜一切衆生苦).‘라고 했다. 동정이나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모든 타인(일체중생)과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또 즐거운 일은 모든 이와 함께 즐긴다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의 자비는 바로 일체중생의 즐거움이나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데에 초점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사상은 사무량심(四無量心,apramāṇya)으로 구체화 된다. 사무량심이란 무엇인가. 사무량심(四無量心)이란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말하는 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대할 때 그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 또는 어떻게 쓰느냐 하는 마음가짐, 마음 씀씀이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용심(用心)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마음 씀의 구체적 실천이 바로 사무량심으로 구체화되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사상 실천은 하나의 수행방편이다. 방편으로서 실천적으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일체 중생들에게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는 것은 바로 하나의 수행과정이다.

자무량심(慈無量心). 한량없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비무량심(悲無量心). 한량없는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 주려는 마음.

희무량심(喜無量心). 한량없는 중생이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으면 기뻐 하려는 마음.

사무량심(捨無量心). 한량없는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려는 마음.

자무량심은 행복감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비무량심은 연민을 느껴 고통을 제거해 주고, 희무량심은 기쁨을 주고, 희무량심은 동요의 마음을 진정시켜 평정(平静)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사무량심을 기반으로 한 자비의 실천에서 우리는 삼연(三緣)을 생각해야 한다. 중생연(衆生縁), 법연(法緣),무연(無緣)이 그것이다. 중생연은 중생들의 고통을 보고 동정과 연민을 느껴 함께 즐거워 해주고 고통을 제거해 주는 자비이다. 다음은 법연이다. 법연은 적어도 동정 연민 정도를 넘어서서 중생들의 번뇌(정신적)를 단절시켜 줄 정도의 자비를 말한다. 이 단계는 성인이 베푸는 자비이다. 적어도 아라한이나 보살의 자비를 말한다. 다음은 무연자비이다. 무연자비는 부처님만이 할 수 있는 대자대비(mahā-karunā)이다. 자연 그대로의 자비로서 일체만상에까지 확대되는 부처님만이 간직하고 베풀 수 있는 대자대비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교의 자비를 가볍게 해석하고 쉽게 말하지만, 불교의 자비는 이처럼 낮은 단계의 사랑에서 부터 부처님의 한량없는 무연의 대자대비에 이르기 까지 한량이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본론: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대승보살정신의 구현

자비란 말은 쉽지만 실천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중생연(衆生緣) 정도의 동정과 연민만 있다면 전쟁과 분쟁은 종식될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랑마저 없기 때문에 서로 다투고 죽이고 모함하여 타인을 헤치는 것이다. 우리 불교에서는 법연(法緣)이나 무연(無緣) 자비라는 거창한 자비만을 생각하고 중생연이라는 낮은 단계이면서 가장 기본적인 자비실천을 도외시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보다도 대사회적 봉사나 평화운동 등의 활동에서 뒤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 간의 분쟁이나 인종차별 같은 인권문제에 대한 해결은 결코 세속적 정치적 해법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종교적 사랑과 자비가 힘을 보태야 한다고 보는데, 우리 불교는 이 분야에서 소극적이다.

아라한이나 보살의 자비는 중생들의 번뇌를 단절 시켜 주는 것이라고 했다. 번뇌란 왜 생기는가이다. 개인적인 번뇌는 한 개인의 정신적 고통과 불만에서 비롯된다. 국가적 전 지구적인 번뇌는 세상의 이법(理法)을 모르고 둥근 지구촌은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공동운명체적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지도자들은 대승보살의 자비를 실천하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보며, 오늘 동아시아의 3국 불교가 논의하고자 하는 ‘현대에 활용 가능한 불교의 자비심-3국 불교의 역할’은 매우 적절한 주제이면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대안적 주제라고 공감한다.

보살(菩薩)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고, 또는 여러 생을 거치며 선업을 닦아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위대한 사람을 뜻한다는 뜻도 좋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의미를 강조하고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초기불교의 보살의 의미가 변화되었음 또한 인정한다. 종래의 부파불교가 출가수행자의 독점물이었던 것을 대승보살은 불교를 널리 전 불교도의 것으로 변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불교의 수행자 모두가 부처의 후보자로서 보살이라고 칭해지게 되었다는 데에 방점이 있다고 본다.

불교의 3승의 교의의 관점에서 보살은 보살승의 수행자 즉 대승불교의 수행자를 뜻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취지에서 2승의 수행자인 성문·연각과 비교하여, 대승불교 경전인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미세하고 아주 깊고 통달하기 어려워 범부나 2승은 이해할 수 없는 승의제(勝義諦:위없는 진리로 진제 (眞諦)와 제일의제 (第一義諦)와 같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살행(菩薩行)은 부처의 후보자로서의 보살의 수행, 또는, 높은 깨달음을 성취한 위대한 사람으로서의 보살이라는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수행을 뜻하지만, 보살행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 6바라밀(六婆羅蜜)은 바로 이 시대 우리 삼국 불교지도자들이 적극 실천해야할 덕목이라고 본다.

결론: 세계평화를 위한 붓다의 대자대비의 실천

나는 ‘-국가와 인종의 경계를 넘는 붓다의 자비 실현을 위하여-’란 소주제를 가지고 오늘 이 자리에 나서서 몇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한 이념의 구현과 실천방안으로서의 대안적인 결론으로 부처님의 대자대비 정신을 그 결론적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무연자비(無緣慈悲)이다. 동정이나 연민의 자비나 성인의 지위인 아라한이나 보살의 자비보다도 더 차원이 높고 깊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인 자비이므로 대자대비라고 표현했다. 보살의 자비도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방편으로서의 자비이지만, 부처님의 대자대비는 어떤 목적과 조건도 없이 자연 그대로의 자비인 것이다.

이제 세계평화에 대해서 담론하면서 불교적 실천방안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평화(平和,peace)는 좁은 의미로는 '전쟁을 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현대 평화학에서는 평화를 '분쟁과 다툼이 없이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한다. 평화란 이 지구상에서 인류가 목표로 하는 가장 완전한 이상상태이다. 평화학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인 요한 갈퉁(Johan Galtung, 1930년~ )은 그의 저서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에서 평화를 직접적인 폭력이 없는 상태인 소극적 평화와 갈등을 비폭력적 방식으로 해결하는 적극적 평화로 구분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를 말하고 있다. 소극적 평화는 강자가 폭력으로 약자를 억누름으로써 유지되는 평화, 비판적으로 말한다면 평화유지를 명분으로 약자의 저항을 억누르는 폭력이 소극적 평화라고 정의하고 있다. ‘간디’는 평화를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황이 아니라, 정의가 구현된 상황으로 보았다. 같은 맥락에서 마틴 루서 킹 목사는 ‘진정한 평화는 단지 긴장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했다. 스위스의 진보적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도 테러리스트들의 대부분이 가난과 좌절로 인해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빈민출신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평화는 테러와의 전쟁이 아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가 건설될 때에 실현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평화는 적극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목표이다. 모든 종교는 다 평화를 추구하고 실천운동을 벌이고 있다. 불교에서도 두 말할 필요도 없이 평화운동에 적극적이야 하고 세계평화를 위한 실천이념으로서 붓다의 대자대비 사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세계불교계의 다양한 전통에서 는 불교라는 이름으로 평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동아시아 3국에서도 세계평화에 대한 관심과 운동을 보다 활발하게 전개해야함은 당연하고, 보다 구체적인 계획과 실천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한중일 불교우호교류회의 산하에 가칭 ‘세계불교평화위원회’같은 소위원회를 두고 보다 전문적인 연구와 실천운동을 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세계불교평화위원회’의 설치를 적극 제안하고자 한다.

붓다의 대자대비 사상은 세계평화를 실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철학이요 이념이며, 대자대비 사상의 실천은 바로 세계평화를 구현하는 방법이라고 확신하며, 3국 불교는 적절한 실천기구를 통해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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