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응 스님, 몽골 –시베리아 불교기행-⓻
원응 스님, 몽골 –시베리아 불교기행-⓻
  • 원응 스님<논설위원>
  • 승인 2018.09.0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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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복드칸 왕은 티베트 출신 라마

몽골의 왕으로 재위했던
복드 칸 왕 부처(夫妻)

복드 칸 왕은 라마였기에 세속적 의미의 황제로서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았고, 섭정은 총리가 했다. 그가 울란바타르로 옮겨와서 복드 칸에 즉위하자 지역의 왕 족들 가운데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도 있었으나, 신정의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해 냈다. 이런 가운데 뜻하지 않게 1921년 러시아 군인 지도자인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1885년∼1921년)은 몽골을 침입하여 1년간 몽골을 통치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1921년 몽골을 정복하여 독재정치를 한 인물이다. 티베트 불교에 심취한 그는, 그러나 제멋대로 티베트 불교의 교리를 왜곡하여, 자신을 '살아있는 부처'로 여길 정도의 기행을 하고, 1년간의 몽골 통치기간 동안, 엄청난 수의 몽골인을 학살하여, 몽골의 미친 남작으로 통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몽골 역사상 유일하게 몽골을 직접 통치한 유럽계의 사람이다. 이런 상황아래서 복드 칸은 신정의 왕으로서 당분간 왕권이 중단되었다.

담딘 수흐바타르(Дамдин Сүхбаатар,1893년~1923년),

 

이런 정국의 혼미로 몽골은 혼란에 빠졌다. 이 때 담딘 수흐바타르(1893∼1923) 장군이 나타나서 혁명을 일으켜 인민정부를 세우고 스스로 국방장관에 취임하고 복드 칸의 왕정을 잠정 복구 시켰다. 복드 칸은 1924년 그가 열반할 때까지 제한된 왕권을 누렸다. 하지만, 그를 구원해 준 수흐바타르도 같은 해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가면 시내 중앙에 수흐바타르 광장에 동상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수흐바타르 장군이다. 그는 유목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1년, 몽골 독립 후 건군된 자치 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소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수흐바타르 동상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은 그는 1920년 6월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과 몽골인민당(인민혁명당)을 결성,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건설을 위한 전술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그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赤軍)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니슬렐 후레(울란바타르)에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복드칸 왕 부처가 앉았던 의자

이렇게 해서 몽골국의 마지막 칸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몽골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몽골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1990년 몽골이 소련의 위성 국가에서 독립할 때 까지 70여 년간,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되고, 불교를 탄압하고 몽골 고유문자를 없애고 키릴문자로 전환하는 문화말살 정책을 쓰게 된다. 90년대 초, 필자가 만난 몽골의 지식인들은 사상적으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불교를 중흥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70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불교가 워낙 뿌리가 깊게 스며있어서 곧 회복하는 찬스를 잡은 것이다.

복드 칸의 사후, 몽골 혁명정부는 더 이상의 환생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열반에 든 같은 해에 복드 칸(젭춘담바)이 몽골 북쪽 지역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1925년 복드 칸이 또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1926년 11월 몽골정부 제3차 대회에서 복드 칸의 환생을 찾는 의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마지막 금지령이 1928년 몽골인민혁명당 7차 회의와 5차 인민대회에서 결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드 칸의 환생인 한 소년이 1932년 티베트 라싸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1990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가 1990년 인도에서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공식 인정 하에 제9대 젭춘담바 쿠툭 투로 즉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999년에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달라이 라마가 임석한 가운데 거행됐고, 그 때 필자도 참석한 바 있다.

그는 1932년 11월 티베트의 라싸의 조캉 사원 근체에서 환생했는데, 그는 생후 6개 월 후에 부모 곁을 떠나서 13세 달라이 라마의 경호원이었던 삼촌 슬하에서 보호받았다. 1933년 13세 달라이 라마가 열반에 들고, 레팅 린포체가 14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 발견되어 즉위할 때 까지 티베트를 섭정했다. 1936년 그 당시 4세였던 잠팔 남돌 쵸기 걀첸(Jampal Namdol Chökyi Gyaltsen)이란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는 3단계의 시험을 거쳐 제8대 젭춘담바의 화신으로 인정되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그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는 7세 때, 티베트 겔룩빠의 3대 사원가운데 하나인 드레펑 사원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그는 일반 라마들처럼 보통 승려의 길을 걷다가 25세 때, 환속하여 결혼해서 자녀를 두기도 했는데, 1959년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인도로 망명하였는데,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선전용으로 이용되거나 희생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인도로 망명해서는 티베트어 방송국에서 일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고, 첫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하여 자녀들을 두는 등, 세속적인 삶을 살았으며, 1984년에는 라싸를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마디야 프라데시 주에서, 1992년에는 다람살라에서 제9대 젭춘담바 쿠툭 투로 공인되고, 1999년 7월 관광비자로 몽골에 입국하여 간덴 사원에서 즉위식을 갖고, 계속해서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2011년 11월 몽골로 와서 수장으로 즉위했으나 2012년 3월 1일 열반에 들었다. 필자도 1999년 그가 칭기즈칸 호텔에 체류했을 때 친견했으며, 2011년에는 그의 사저에서 친견한 바 있다. 당시 분위기로는 몽골불교지도자 급에서는 조용히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재가 지도자들과 일반 국민들에게는 큰 인기가 있었다.

몽골불교대학 총장과 필자, 옆은 활안 스님

 

몽골 울란바토로= 원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