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를 조직, 청산리대첩 승리를 일궈낸 대종교 지도자 김 교 헌

[金敎獻, 1867.7.5.〜1923.11.18. 경기 화성.]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김교헌을 2018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〇 기 간 : 2018. 8. 1. ~ 8. 31. (한 달간)

〇 장 소 :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

〇 내 용 : 김교헌 사진 등 7점

김교헌은 1867년 7월 경기도 수원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할 당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의 모함으로 해직되었는데, 이는 김교헌의 항일의식이 고취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총본사의 요직을 맡으며, 민족종교로서 대종교 이론을 체계화하는데 기여하였다. 1914년에는 『신단실기神檀實記』와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여 단군과 대종교의 근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1916년 김교헌은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취임하였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和龍縣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하였다. 이후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고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또한 1919년 2월 만주 길림에서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다.

김교헌은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무장독립단체 북로군정서의 결성과 활동을 지도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대종교도를 무차별 학살하였고, 이로 인해 대종교의 독립운동 기반이 약화되었다. 김교헌은 본부를 영안현永安縣으로 옮겨 재건을 준비하였으나, 1923년 11월 18일 병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교헌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주요 공적

○ 1916 대종교 제2대 교주 취임

○ 1919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서명

○ 1977 건국훈장 독립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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