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의 나라, 불심의 고향

 

울란바토르에서 1시간 정도가면 칭기즈칸 동상 박물관이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내부엔 있을 건 다 있다.     

몽골의 변화를 보면 적이 놀란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몽골이 개방된 이래, 지난 28년 사이에 몽골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깊은 공산권 문화에서 잠을 깨서 눈을 뜨는 데는 적어도 6∼7년이 소요됐다.

거리에 자동차 한 대가 없을 때부터 다녔으니까, 제법 일찍 울란바토르를 드나든 셈이다. 지금이야 시내가 주자창이 되었지만, ‘90년대 초반에는 한가한 소 도시 같은 초라한 풍경이었다. 한 도시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도시화와 산업화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절감한다.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는 초창기에 기독교 선교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선교사보다도 한국의 선교사들이 물밀 듯이 들어와서 둥지를 틀고 맹활약하는 것을 보고, 불교의 입장에서 초라한 불교지원이 아쉬웠는데, 아직도 우정국 주변에선 시끄럽다. 정교분리라고 하면서 이승만 정권이 불교에 개입, 지금도 연장선상에 있다. 각설하고, 몽골 이야기로 돌아가자.

몽골인들은 처음엔 칭기즈칸을 잘 몰랐다. 칼 마르크스-레닌이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어서였을까. 2천 년대에 와서야 칭기즈칸을 의식했다. 몽골 과학원과 대학에서 역사교수들이나 불교학자들이나 아는 불교와 칭기즈칸이었다. 철저하게 칭기즈칸을 지우는 교육을 시켰다고나 할까, 정말 역사를 이렇게 지워도 되는지 의문이 앞섰다. 영어원서로 칭기즈칸을 접할 정도였고, 나중에 내몽골에서 한문으로 출간된 몽골의 역사와 불교 그리고 칭기즈칸을 만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은 누구인가? 지금 세계는 다시 칭기즈칸을 주목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부상은 소련이 무너지고 외몽골이 자유 시장 경제체제에 의한 민주공화국이 되면서 부터라고 본다. 역사상의 인물로서 칭기즈칸은 사라진 적이 없지만, 20세기 초부터 말경에 이르기까지는 칭기즈칸의 존재는 아득한 먼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몽골제국의 황제(대칸 大汗) 정도의 인식이었다.

그 이유는 1920년대 전후, 중국 청조(淸朝)의 패망과 러시아 제국의 볼셰비키 공산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는 몽골까지 수출되고 그 영향을 받아 1924년 몽골은 공산혁명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다.

이에 영향 받아서 몽골은 외(外)몽골을 중심으로 1911년 12월 29일 일명 복드 칸국(Bogd Khaanate)인 대몽골국(몽골어:Олноо Өргөгдсөн Монгол улс)을 건국하여 1924년까지 존속한다.

복드 칸(Богд хаан,1869~1924)은 젭춘담바 쿠툭 투(몽골어: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를 말하는데, 티베트 불교에서 유래한 몽골불교의 겔룩빠 최고 수장이었던 지도자로서 활불(活佛)로서 칸의 지위를 부여한 티베트-몽골불교의 서열 3위의 위계를 말한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신정(神政)의 왕과 같은 존재였다. 달라이 라마가 독신 빅슈(비구)라면 제8대 젭춘담바 복드 칸은 대처 라마였다. 복드 칸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개드리기로 하고, 칭기즈칸의 이야기를 해보자.

칭기즈칸에 대해서는 많은 소개서나 자료들이 이미 나와 있기에, 대체적인 역사상의 소개는 피하고자 한다. 칭기즈칸에 대해서는《몽골비사(蒙古秘史》란 책이 있는데,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도 한다. 몽골인들에게는《몽고원류(蒙古源流)》,《황금사(黃金史)》와 함께 3대 역사서로 애지중지한다.

《몽골비사》는 칭기즈칸이 1227년에 죽은 다음 몽골 왕실 가족들이 저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위구르 문자로 쓰여 졌다가 나중에 몽골어 문자로 쓰여 졌고, 원대에는 한자로 번역된 것이다. 원대에 몽골어로 쓰여 졌으나 원본은 상실되고, 이 몽골어 본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한문본에서 다시 몽골어로 복원한 판본이 널리 퍼져있고, 영어로 번역되어있다.

몽골비사의 내용은 칭기즈칸의 22대 조상 부르테 치노와 코아이마랄로부터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를 기록한 것이지만, 칭기즈칸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2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테무진의 근원(조상)과 어린 시절에서부터 테무진의 죽음과 오고타이(칭기즈칸 3남)의 통치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몽골족의 3대역사서의 하나인《몽고원류(蒙古源流)》는 17세기 중기에 저작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몽골 민족의 연대기 중의 하나이다.《蒙古黄金史》는 명대의 몽고족의 역사문학 저작이다.《蒙古秘史》《蒙古黄金史》와《蒙古源流》는 몽고족의 3대 역사서로서 몽고연구의 기본 텍스트이다. 특히《蒙古源流》는 몽골불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몽골불교역사서이기도 하다.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매 사냥을 즐겼다. 흉노족시대부터 전해오는 풍습이다. 

칭기즈칸에 대해서는 독립국가인 외몽골보다 중국의 자치구가 된 내몽골에서 연구가 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사료가 거의 한문으로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난 70년간 공산 치하 위성국가였던 외몽골보다는 칭기즈칸 연구에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외몽골은 칭기즈칸을 받드는 숭모 사업을 내몽골보다 더 자유롭게 진행하고 있는 듯하기는 하다. 이제 자기 조상의 위대함에 눈을 떴다고 봐야할 것이다. 90년대 초, 필자가 체감했던 분위기하고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다.

내몽골은 외몽골보다는 몽골의 전통을 어떤 면에서는 더 잘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나, 광활한 내몽골 지역에 비해서 인구가 너무 적고, 도시에는 중국의 한족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초원 지역은 아직도 몽골족이 장악하고 있다.

유목은 아무 민족이나 하는 것이 아닌듯했다. 외몽골은 독립 자유국가이기 때문에 몽골족으로서의 긍지가 크고, 이제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듯했고, 몽골고문자를 습득하고 고전을 번역하는 등, 민족의식이 더욱더 강해지는 것을 체감했다.

70년간 세뇌된 공산사상도 이제 퇴색되어가는 듯했고,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족과 민족동질성 회복에 눈을 뜬 듯해서 지난 28년간 옆에서 지켜본 증인으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남북이 갈라져, 반세기 이상 대륙과의 접촉이 차단된 상황에서, 중국 만주 내몽골과 외몽골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베리아에 대한 인식이 점점 멀어져 이제는 먼 곳의 이야기가 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렇다 보니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종교가 우리 역사와 맞물려있음에도 먼 나라의 전설처럼 여기는 듯 한 한국 지성계의 몰인식은 참으로 안타깝다. 특히 몽골불교 하면 티베트와 가까운 종교로서 우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 한 불교계 식자들의 인식도 답답하다.

불교연구도 요금원청(遼金元淸)은 비중국계 민족이라고 하여 도외시하고 한수당송명(漢隋唐宋明)의 중국계 불교나 성리학에 관심을 집중하는 듯 한 분위기다. 요금원청은 북방계 한민족(韓民族)과는 종족이나 언어 면에서 사촌지간이 아니던가.

 

몽골 울란바토로 원응<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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