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불교 부흥과 라마승의 활약

몽골의 라마승들이 미륵대불 점안낙성법회를 앞두고 독송을 하고 있다.   

몽골 불교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지만, 불교를 수용할 때 아주 강하게 받아들였기에 몽골의 구석구석에 깊이 박혀서 쉽게 뿌리가 뽑히지 않는 불교가 되었다. 비록 지난 공산치하에서 불교가 탄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1990년 소련 연방의 공산체제가 붕괴하고 몽골이 종교의 자유를 찾게 되었을 때, 불교는 지하에서 움츠리고 있던 용천이 솟아나오듯 갑자기 분출했다.

필자는 지난 25년간 몰골불교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누구보다도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1천여 개의 크고 작은 사원과 4천여 명의 라마들이 수도 울란바토를 비롯해서 시골마을마다의 사원에서 포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실 몽골 인구라고 해봐야 3백만 정도이다. 내몽골에 3백만 명 부랴트 공화국에 50만 등 순수 몽골족은 650만 명에서 7백만 명 수준이다.

불교가 아무리 뿌리 깊다고 해도 종교지형은 변할 수가 있다. 한국불교의 지형을 보라. 불과 50여년사이에 종교지형이 바뀌고 있다. 깊이 생각하고 생각해서 불교의 생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모두들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이다. 몽골로 돌아가 보자.

오늘의 몽골 불교를 보면서, 지난 공산치하에서의 몽골불교가 얼마나 박해를 받고 처참하게 파괴당하고 핍박받았는지를 한번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러면서 우리 스스로 한국불교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반성이 있었으면 한다.

몽골불교는 1924년 공산화 되면서 시련을 겪기 시작했다.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몽골 사회는 불교이념에 의한 통치와 삶의 방식에서 차츰차츰 공산이념으로의 전이가 시작됐다. 혁명이란 기치아래 정치 사회 변혁이 시작되었다, 가장 걸림돌은 당연히 불교였다. 정치근대화와 사회혁명을 위한 정책은 바로 불교라는 큰 장벽이 앞을 가로 막고 있었다. 불교란 종교를 떠나서는 몽골이란 나라 자체의 구조를 생각할 수 없었다. 불교란 종교는 공산 이념과도 조화를 이룰 수도 없었지만, 어떤 정치 사회 개혁이나 혁명과도 어울릴 수 없는 전통을 중시 여기는 종교였다. 또한 몽골 그 자체는 바로 불교적이었다. 불교를 떠나서 몽골을 생각한다는 것은 딴 세상을 사는 것이지, 불교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닐 정도로 몽골 즉 불교였다.

몽골사회에 공산혁명 바람이 분지 10여년이 지나면서 몽골 공산당은 소련의 지도이념 아래  몽골의 근대화와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불교를 노골적으로 파괴하려는 음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1934년대만 해도 당에서는 843개의 불교센터가 있었다고 파악했다. 여기서 센터란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갖춘 불교단체들을 말한다.

크고 작은 사원만도 3천여 개에 이르렀다. 6천여 개의 천막집들이 불교건물과 연계되어 있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려면 복잡하긴 하나 아무튼 불교와 관련된 단체와 사원의 예산이 국가 예산보다도 더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가장 특이한 점은 1935년 통계에 따르면, 성인 남자의 48%가 라마승이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런 추세로 갔다면 전 국민의 라마화가 이루어 졌을 것이다.   

공산당은 세금으로 압박하기 시작했고, 사원과 라마들은 반발하면서 봉기하기 시작했다. 당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불교교육을 금지시켰고, 더 이상 라마가 될 수 없도록 하고, 사원건립도 중단시켰다. 요셉 스탈린의 러시아 정교회 박해 국면과 일치하고 있다. 1920년 몽골불교의 라마는 12만 명이었다고 한다. 몽골 전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1940년에 이르면 라마들이 죽거나 환속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라마가 씨가 마를 정도였다. 1937년 같은 해에는 엄청난 수의 라마들이 희생당했다고 하며 그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심지어 간단사원의 26.5m의 관음보살 입상은 1937년에 파괴되었다가 1996년에야 복원되었다. 

1940년대 이래 간단 사원에는 단 100명의 라마승만이 기거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관제불교요 전시용이었다. 사원은 단순한 살아있는 박물관 정도의 기능만 할 뿐이었다. 긴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몽골불교는 이런 현대사의 비극을 안고 있으며, 현재도 몽골승가에는 복잡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잠재되어 있다. 과거청산이라고 한다면 이상하지만 그런 움직임 또한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인 스토리는 잠시 접어두고라도 공산혁명 이전의 몽골불교 전통을 회복하는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몽골불교의 현실이다.  

지난 7월1일 2일 미륵불 낙성점안 대법회가 열린 다시쵸일링 사원도 공산혁명 이전에는 울란바토르 시내에선 두 번째로 큰 중심사찰이었다고 한다. 1937년 문을 닫고 사원은 서커스 공연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해버린 초이진 사원도 한때는 이름난 절이었지만, 현재는 박물관이 되어 버렸다.   

티베트 불교에는 정신적 서열이 있다. 달라이 라마가 제 1서열이고, 판첸라마가 제 2서열이다 또한 4개 종파에는 그 종파를 대표하는 법통 서열이 있다. 몽골불교에도 정신적 서열이 있다. 젭춘담바 쿠투쿠인데, 전세영동(轉世靈童)의 전통에 따라서 운명적으로 정해진다. 옹도르 게겐 자나바자르(1635~1723)는 제16대 젭춘담바 쿠투쿠이면서 몽골불교 서열 1위 지위인 초대 복드 칸(僧王)이다.

티베트-몽골계 금강승 전통에서는 달라이 라마-판첸라마-복드칸의 서열이다. 서열 3위에 해당하면서 몽골 불교에서는 서열 1위로서 승가의 최고위 직인  승왕의 지위를 갖는다. 자나바자르는 투쉿 칸의 아들로서 4세 때인 1639년에  티베트 제5세 달라이 라마(1617~1682)에 의해서 점지되었다. 나중에는 정치적 권력까지도 부여 되었고, 그 자신은 네팔 풍의 불교조각가이기도 했다. 그의 정신적 예술적 영향은 근대 몽골 불교에 크게 미치고 있다.   

그러면 몽골의 불교사를 좀 일별해 보고, 현대 몽골불교를 탐사해 보자.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지 1천년도 훨씬 지나서, 중국 중원(中原)에는 대격변의 시대가 도래(到來)하고 있었다. 북방민족인 몽골족이 중국천하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중국에 역사가 시작되면서 한족은 항상 이 북방민족 때문에 시달려왔다. 진(秦)나라 때부터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한 한족은 한나라 때 흉노족에게 크게 당하는 형국이었다.

한나라 왕실에서는 공주를 흉노의 두목에게 시집보내서 화친(和親)을 맺어야 했고, 가기 싫어한 환관 중항열(中行 說)을 보내서, 한(漢) 왕실은 큰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 한나라 이후에는 위진 남북조의 5호16국 시대에는 북방민족 나라가 들어서는 등, 그야말로 중원은 한족과 북방민족의 투쟁의 장(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나라 시대에도 안록산 같은 이민족의 장수 출신의 난(亂) 등, 비(非) 한족들에게 시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에 이어 송나라가 들어서고 요나라 금나라가 중원 땅을 나눠먹는 형국에서, 칭기즈칸이라는 몽골족의 영웅이 출현하여 여러 지역의 몽골족을 통일하고 중원을 차지하게 된다.

몽골 울란바토로= 원응<주필>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