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평화통일,고통받는 중생구원, 불교흥륭 불국토 구현 대원력

충담대종사는 열반 한 해 전인 1997년 평소 수지하던 정토삼부경을 역해한 역해본을 간행하며, 그 머리말에서 스님의 수행과정과 소신공양 발원에 대한 의지를 선명히 밝히고 있다. 그 일부를 발췌해 대종사의 수승한 면모를 엿보고자 한다.

“나는 구한말 나라를 빼앗긴 지 3년이 지난 계축년 경기도 가평 땅 솟틀이란 산골에서 가난하지만 엄격한 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 성균관 박사인 부친으로부터 출가 전까지 한학을 수업한다.)

열일곱 소년 시절 긴머리 칭칭 따고 짚세기 신고 걷고 걸어 먼저 스님이 되신 형님따라(故 廷秀堂 大禪師) 한양에 올라와 삼각산 승가사에서 중이 되었다.

한강 상류로부터 마포나루를 지나 임진강에 이르기까지 행각정진을 하였다.

젊은 시절 고국을 떠나 만주 벌판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조국광복을 기원하고 쏟아지는 밤하늘별을 바라보며 부처님 광명이 날로 더하고 법의 바퀴 항상 구르게 하여 만 중생이 행복하기를 기원하였다.

을유년 8월 나는 아리랑 고개를 넘으며 백중마지를 마치고 왕십리로 오는 길에 형사에게 붙들렸다가 해방을 맞았다.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때도 산더미 같은 시체 속에서 지금의 서울대 병원에서 염불독경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휴전이 되자 평화통일 염원과 만 중생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도량을 가평 호명산 감로암에 토굴로 마련했다.

당시만 해도 호랑이가 산신을 대신해서 간혹 나타나던 때이다. 그러나 감로암을 창건할 때 호랑이는 나를 지켜주는 옹호신장 바로 그것이었고 용신은 약수를 철철 넘치게 뚫어주었다.

4.19, 5.16을 모두 겪었다. 신군부의 10.27법난 때는 그들은 총칼을 장전하고 한밤중 나의 암자까지 수색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보다 마음이 더 아픈 일은 불교분규다. 어지 그럴 수가 있는가. 위정자들의 정쟁에 휩싸여 타의에 의해 흔들린 불교분규이다.

출가 비구나 출가 보살승 모두 한 부처님 제자가 아닌가. 이제 50이 넘는 종파가 우후죽순으로 널리어 어찌 승풍을 진작시키고 삼보를 호지하고 정재와 교권을 수호하겠는가.

하루속히 태고보우 원증국사의 단일문손으로 제종통합 원융회통의 정신이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부처님 말씀을 수없이 써내려 오던 중 나도 모르게 유서 아닌 유서를 쓴 일이 있다. 아니 나의 권속과 신도들에게 한 당부의 말이다.

그 내용은“이 몸을 불살라 여래께 공양하리라. (대종사는 이를 공개하는 이유 세 가지를 밝힌다.) 공개적으로 알리어 여법하게 소신공양 할 것이니 협조를 바라노라. 그리하여 이 나라 분단된 국토가 하나 되고, 사회가 안녕하며, 헐벗고 괴로운 이 없어지며, 불국토 앞당겨 이뤄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라고 쓴후 그해 오월단오날 소신공양하기로 마음을 굳히었다

원두막 같이 나무를 쌓은 후 산불을 방지하기 위하여 철그물을 덮어놓고 안에 들어가 불만 댕기면 소신할 준비를 다해 놓으셨다 스님에 상좌와 신도들이 나무를 모두치우고 아니 된다고 하니 역정을 내시며 나를 도와달라고 하신다.

억지로 서울 왕십리 승가사로 모시고 올라갔으나 그로부터 한 달 후 윤오월 초 나흔날 새벽 스님은 택시를 타고 홀로 호명산 감로사 미륵부처님이 굽어보고 있는 자리에서 소신공양을 감행 하였다.

이는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 일체중생희견보살이 현일체색신삼매를 증득한 이후 일월정명덕부처님께 소신공양한 것과 같이 순수한 불교의 신앙심으로 언어도단 심행처멸의 경지에서 한국불교1700년 역사에 최초로 이룩한 불속에서 연꽃을 피우고(화중생연)살아있는 육신으로 등공한 최초의 일이었다.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