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난한 이들 옆에 서있는 것이 행복

나눠줌으로써 채워지는 마음

너와 나의 분간이 없다

 

초파일이 끝난 뒤 해정(국사암 주지 / 태고종 충북교구 남부분원장 )스님은 향수공원 맞은편에 연등을 떼어내고 있었다. 사다리를 놓고 일일이 등을 떼어내며 스님은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해정 스님은 옥천불교사암연합회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7년 동안 이 일을 해왔다고 했다. 표나지않게 봉사하면서 ‘노동이 기쁨이 되는’ 것은 어떤 경지일까 궁금했다. 비닐 한 장을 바닥에 깔고 앉아 나무그늘을 지붕삼아 스님의 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5월의 바람 한줄기처럼 영혼을 청량하게 만드는 욕심을 버린 한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편집자 주

△사회에 등불 같은 사람

해정 스님(국사암)은 이웃에게 나눠줘야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봉사가 천직인 스님은 물질을 위해서라면 상식을 벗어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이 사회에 등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국가에 충성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어떤 유언은 마음 밭에 떨어져 큰 나무가 되기도 한다. 한국불교 태고종 국사암(옥천군 군북면 소정리 317-5) 해정스님은 자비를 어려운 이들에게 행하며 스스로 옥천 지역의 등불이 되고 있다. 그의 봉사는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길이 된 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봉사활동에 동참하고 함께하며 지역 곳곳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빛이 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을 걸어놓고 항상 반성하고 산다”며 “어른을 공경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국가에 충성하는 자세는 국민으로서, 인간으로서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충남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에서 아버지 공영규씨와 어머니 이옥길씨의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수난의 길을 걷는다. 그의 할아버지 공소성은 독립운동가의 일원이 독립자금책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논산의 그 많던 땅을 팔아서 독립자금을 대준다. 그런 연유로 작은 할아버지 두 분은 중국에서 죽게 된다. 당시 마을에 거주하는 일본 앞잡이에게 설움과 고초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심했다.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어 많은 고생을 한다. 그는 힘들게 살면서도 대전역과 논산역을 배회하는 거지들을 데려다 씻기고 먹인다.

△속가의 궁핍한 생활

스님은 서른 살에 행자승이 된다. 하지만 집안에서 형이 죽자 아버지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환속하게 된다. 속가에서 생활하는 동안 100만원을 벌면 70만원을 불우이웃돕기에 써버린다. 당연이 생활은 궁핍해지고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회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웃을 돕는 일이 가장 행복했다.

1997년 해정스님은 옥천에 와서 국사암을 열었다. 본격적으로 이웃을 돕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누군가를 돕는다는 사실조차 부끄러웠다. 부활원, 영생원, 행복한 집에 쌀과 과일 등을 몰래 놓고 돌아서곤 했다. 결손 가정에 짜장면을 만들어 대접하기도 했다. 독거노인, 새터민, 조손가정, 한 부모 가정 등 이웃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그들을 위한 위로잔치도 10년째 해오고 있다. 불전함에 가득 모아진 동전으로 떡국 떡을 만들어 불우이웃에게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다. 독거노인 도시락을 10년째 배달하고 있는 스님은 좋은 차 좋은 옷이 거추장스럽다 말한다. 그는 자신을 위해선 무엇이든 아끼고 모아 이웃에게 내놓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독거노인에게 연탄을 전해주려고 한 겨울 스님의 방은 냉골이다.

△세상 아픔 있는 곳에 손길 내밀고 싶어

옥천군 고엽제 전우회와는 11년 전 결연을 맺어 설·추석 등 연중 특별한 날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장학사업으로 1년에 1천여만 원이 넘게 지원한다. 옥천중학교와 죽향초 등에 장학금 과 학교발전기금을 선뜻 내놓기도 했다. 대전 법동· 용운동 복지관에는 오래전부터 장학금과 성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스님의 이웃사랑 실천은 이외에도 끝이 없다. 하나하나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해정스님은 “차별없는 세상, 장애인, 비장애인 남녀노소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며 “이 세상의 등불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하루에 밥 3끼만 먹으면 된다”고 담담하게 말하며 “세상 아픔 있는 곳에 손길을 내밀어 그 아픔이 조금이라도 치유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전했다.

△“베푸는데 무슨 조건이 있는가”

스님은 종파를 가리지 않고 도움을 준다. 이러한 여파로 종교가 다른데 왜 도움을 주느냐며 오해도 많이 받는다. 투서도 여러 번 들어왔고, 사이비가 아니냐는 오해도 많았다. 이에 대해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바라고 주는 게 아니다”며 “오해를 많이 받았지만 15~20년 간 꾸준히 이 일을 해오니 이제야 마음을 열고 이해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인연의 소중함을 말하면서 “베푸는데 무슨 조건이 있는가, 좋은 옷 좋은 집 살면 좋은가”라고 반문했다.

“설 명절 날 가가호호 홀로 사는 분들을 방문해 선물을 나눠주고, 손이라도 잡아주면 행복해하시더라.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게 마음이 편하다”며 “돈을 많이 갖고 있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최소한의 먹을 것만 있는 것이 편안하다”고 했다.

△극락정토가 되는 길

공기남(10) 스님의 둘째 아들은 용돈을 주면 시주함에 넣는다. 왜 그러느냐 물으니 “스님 아버지가 봉사를 통해 TV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나오니 나도 맘이 우러나 하게 된다”고 수줍어하며 말했다. 이에 대해 스님은 “공부 열심히 하지 말고 남을 돕는 사람이 되라”고 말했다. 남을 돕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말하는 스님은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밀 수 있을 때 세상은 극락정토가 되지 않겠는가. 내가 곧 너임을, 우리는 결국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고 전하며 초파일 등을 떼어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도복희기자

저작권자 © 불교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