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암 이두 대종사님께 삼가 계수정례하옵니다.

일주향을 사르옵고 합장 삼배하옵나니, 저의 인사를 받아 주옵소서!

대종사님의 원적 소식을 듣고 청주 우암산 관음사로 달려가 영전에 참배하였습니다. 부득이 인도행을 하게 되어서, 영결식에는 참례하지 못했고, 49재일에도 결례를 하였습니다. 용서하옵소서!

조계종의 원로의원을 역임하시고 금오문도의 문장을 역임하시는 등, 종단의 원로로서 대종사님의 위치에 계셔서 자주 뵙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속리산 법주사 주지 소임을 마치시고 불교교육포교에 매진하실 때, 소납은 스님을 모시고 10여 년 간 함께 활동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대종사님께서는 이제 이승의 몸이 아니라, 저 극락세계 상품상생(上品上生) 연화대(蓮花臺)에 앉으셔서 해탈열반의 자유 각령으로 계시옵기를 간절히 기원하옵니다.

해동불교대학 설립 때부터 참여하시어 처음엔 통신대학장을 하시고, 다음엔 학장을 맡으셨습니다. 초대학장은 동경대 문학박사였던 김지견 박사님이, 제2대학장은 이법성 큰 스님(영산교단 교주, 당시는 조계종)께서, 월암 이두 큰 스님께서는 3대 학장으로 취임하셨습니다. 이후, 저에게 학장을 물려 주셔서 제가 제4대 5대 학장으로서, 현재까지 봉직해 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해동불교대학은 이름만 유지하고 있음을 보고 드리옵니다.

월암 이두 대종사님과 교육포교활동을 하던 때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3천 여 명의 포교사 법사 선법사 등을 양성하여, 포교전선으로 내 보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습니다. 또 해동불교신문 발행에도 참여하시고 논설위원으로서 《금강경》 《유마경》을 번역하여 연재하셨으며, 금오스님을 모시고 두타행을 하시던 1950년대의 수행일기를 연재해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 기록은 금오선사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인도 등지의 해외성지순례도 함께 했고, 몽골, 러시아 바이칼 호수와 모스크바 등지도 함께 다니면서 여행했던 때가 그립습니다. 일일이 다 여기서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종사님과는 속가의 아버지처럼 너무나 친밀하게 격의 없이 함께 교육포교에 정진했던 때가 저의 생애에서는 가장 보람 있었던 때가 아니었을까 생각되옵니다. 대종사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들었던 저로서는 친(親) 은법상좌(恩法上座) 보다도 그 이상의 사제(師弟)나 도반(道伴) 같은 관계였습니다.

평소에 격의 없는 다언(多言)으로 친화적(親和的)인 성격이셨지만, 한마디도 공허(空虛)한 말씀은 없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는 그대로가 법문이었고, 수행의 내공에서 묻어 나온 진솔하고 여운이 남는 주옥같은 금언(金言)이었습니다.

말년에는 한동안 몸이 불편하시었지만, 90세까지 장수하셨음은 대종사님께서는 천수를 누리는 복을 가지신 대강백이셨고, 대선사님이셨습니다. 많은 제자들과 후학들에게 크나큰 족적을 남기시고, 이 세상에서 출가사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시고, 본래의 자리로 환처(還處)하셨습니다. 한 개의 일주향이 재가 되어 사라지듯이, 일체만상은 생주이멸(生住異滅)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는 무상의 도리를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연화대의 주인공으로 법신 상주 하옵시기를 삼가 절하옵니다.

해동불교대학장

원응(보검 이치란 박사) 합장 분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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