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편찬원(구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원장: 김우철)에서는 한국연구재단 등재학술지 ≪서울과 역사≫ 제97호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서울과 역사》제97호에는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의 역사 관련 일반논문 7편이 실려 있는데, 고고학부터 현대사까지 여성사와 지역사 등 다양한 시기와 주제를 다룬 연구를 만날 수 있다.

 각각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서울 구석기유적 시론>(이정철), <19세기 중반 한 사족 여성의 경제활동과 고용 노동>(김현숙), <일제강점기 한양 도성 안 동북부 지역의 중상류층 지역화 과정>(유슬기, 김경민), <일제하 서울의 대단위 철도관사단지의 조성과 소멸>(이영남, 정재정), <해방후 미군정의 서울시 고문위원회 구성과 ‘자치도시’ 공표(1945~48)>(김수자)이다.

 특히 주목해 볼 만한 연구에는 <조선시대 정업원(淨業院)의 위치에 관한 재검토-영조의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 설치를 중심으로->(탁효정),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 경리부(經理部)의 한반도 내 활동과 그 의미>(조건)가 있다.

 <조선시대 정업원(淨業院)의 위치에 관한 재검토-영조의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 설치를 중심으로->는 새로 발굴된 고문서를 바탕으로 ‘정업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정업원’은 조선전기 왕실의 기도처이자 비빈들의 출가처로 이용된 비구니사찰로, 여러 차례 폐지되었다가 복설된 곳이다. 조선전기 실록에 등장하는 정업원은 창덕궁 인근에 있었는데, 조선후기 영조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기리면서 정업원구기비를 현재 서울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 옆에 세웠다. 따라서 ‘조선시대 정업원이 어디에 있었는지?’ ‘왜 영조는 정업원구기비를 숭인동에 세웠는지?’는 일찍부터 학계에서 논란이 되어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탁효정 연구원은 최근 장서각으로 이관된 <해주정씨 고문서>를 중심으로 정업원을 둘러싼 논란을 재검토 하였다. 그 내용에 따르면, 연산군~중종 때 정업원이 철폐되자 숭인동 일대에 정업원의 비구니들의 집단 거주지가 마련되었고, 당시 정업원의 주지가 정순왕후였다. 영조는 정순왕후가 숭인동 일대에 살았고 정업원 주지를 역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정순왕후의 옛 집터에 정업원구기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기존 여러 의견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문제점을 제시한 다음 새로 발견된 자료를 바탕으로 기존 정업원 관련 논의를 한 단계 높인 연구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 경리부의 한반도 내 활동과 그 의미>은 ‘용산 기지’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한국주차군 경리부를 깊이 있게 분석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도발한 직후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을 편성하고 그 사령부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한국주차군은 당시 전선부대의 지원과 후방의 안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한국을 군사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리부는 한국주차군 내에 군사행정을 총괄하기 위해 사령부 내 설치된 조직이었다. 상설기구로 존재하면서 군사적 강점을 위한 군용지 점탈, 병영 등의 군용 건축물 및 교통시설의 건설과 관리를 담당했다.

 러일전쟁기 한국주차군 경리부는 용산에 항구적인 주둔태세를 갖추기 위해 약 300만평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그 중 130만여 평의 토지에 거대한 병영과 군사 건축물, 교통시설을 설치하였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의 조건 교수는 일본 방위성 소장 자료들을 활용하면서, 일본군의 한국 군사침략・점령의 전환점이 되는 러일전쟁기 주차군의 편성을 ‘경리부’를 통해 밀도 있게 규명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은 일본군의 한국침략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었었지만, 그 구체적인 실체에 접근한 연구는 많지 않았다. 일본군의 한반도 내 침략적 토대를 마련하고 한반도 식민화를 준비하던 경리부의 활동을 분석한 이 연구는 학술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근현대사 속에서 용산의 장소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서울 신청사 지하 1층에 자리한 서울책방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itory.seoul.go.kr)에서 개별 논문을 다운로드 받거나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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