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는 대구음식의 숨겨진 이야기를 재발견하고 지역음식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5월부터 9월까지 추진한  대구음식스토리텔링공모전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공모에는 참가자들이 에세이 35편, 동영상 9편, 만화 및 그림 등 총 53편을 응모했으며, 분야별 전문가 5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주제연관성(25점), 작품구성력(20점), 소재독창성(30점), 표현력(25점) 등의 심사기준에 따라 심사한 결과, 대상 1편, 최우수상 2편, 우수상 7편, 장려상 10편, 특별상 1편 등 총21편을 선정하였다.

이번 공모전의 가장 큰 수확은 대구10味를 포함한 대구음식이 대구시민뿐만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음은 물론, 대구를 알리는 스토리텔링마케팅의 중요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몇몇 작품들은 수필가 이상의 문장력을 보여주는 등 작품의 수준이 상당이 높았다는 평가이다.

당선작중

▲대상에는 30년 전 광주에서 대구로 시집와 힘든 타향살이를 겪으면서 위로가 된 납작만두에 얽힌 가슴 뭉클한 추억을 인상깊게 스토리텔링한 ‘나의 30년지기 친구 납작만두’ 작품이,

▲최우수상에는 어릴쩍 아빠의 사랑과 막창에 얽힌 그리움과 추억을  잔잔히 그려낸 “내가 언제 어른이 되었나하면, 막창이 도넛모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다”작품과, 타지에서 대구를 방문한 외지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대구음식이 매력  적인 이유를 잘 설명한  “대구음식 왜 매력적일까?‘‘ 작품이,

▲우수상에는 남자친구와 서문시장에서의 칼제비와 납작만두에 대한  추억을 그린 “내가 다른건 양보해도, 서문시장 칼제비랑 납작만두   만큼은 양보못해” 작품 외 6개 작품이,

▲장려상에는 학창시절 따로국밥과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운  마음을 담은 ‘따로국밥, 추억과 그리움의 맛’작품 외 9편이 선정됐다.

또한, 대구10味 음식의 이미지를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으로 표현한   10味스티커 작품을 특별상으로 추가 선정했다.

당선작에 대한 시상식은 10월 25일(수) 열릴 예정이며, 대상 1편에  70만원, 최우수상 2편에 각 50만원, 우수상 7편에 각 20만원과 대구  광역시장상이 수여되며, 장려상 10편에는 각 10만원과 (사)대구음식  문화포럼회장상이, 특별상 1편에게는 (사)대구음식문화포럼회장상이  주어진다.

대구시는 당선작품들을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친근하고 멋스러운 스토리북으로 제작하고, 대구푸드홈페이지, SNS 등을 통해 홍보할 예정이다.

대구시 이영옥 보건복지국장은 “앞으로도 대구음식에 대한 스토리텔링 공모전을 내실있게 개최하여 맛있는 대구음식을 특색있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지속적으로 발굴해 대구음식 홍보는 물론 다양한 문화 관광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 대구음식스토리텔링 대상수상작 >

                   제목 : “나의 30년지기 친구 납작만두” 

“아주머니! 참말로 너무 하지라! 아무리 그래도 애랑 같이 있는데 어떻게 이런 장난을 한당가요!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고 지금 무시하는 거 맞지라?”

식당에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등에 업고 음식을 기다리던 나는, 내 앞에 놓인 음식을 보고 순간 폭발했다. 사실 그것은 단순히 그 음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내가 겪어 왔던 설움의 발현이었던 것 같다.

나는 30여 년 전 광주에서 대구로 시집을 왔다. 가난 때문에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고등학교도 겨우 졸업한 나에게 대학교는 눈조차 돌리지 못하는 커다란 산이었다.

아버지는 한 사람의 입이라도 빨리 덜어내고자 했고 그런 아버지에게 떠밀리듯 난 단 한 번 선을 본 남자를 따라 대구로 시집을 왔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대구생활은 참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어렸을 적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 때문일까, 내가 말할 때 마다 사람들은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고, 말투가 이상하다며 손가락질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주눅이 들어갔다. 난 하루 빨리 경상도 사투리를 익히고자 되지도 않는 경상도 말을 열심히 연습했다.

 게다가 음식은 또 왜 그리 입에 맞지 않는지, 삼삼하고 담백한 전라도 음식과 달리 경상도 음식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맵고 짰다. 하지만 남편은 내 입맛과는 달라 내가 해 준 음식이 맛없다며 타박하기만 했고, 난 어쩔 수 없이 자극적인 음식을 차려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억양에서부터 음식까지 모든 면에서 경상도는 전라도와 전혀 달랐고, 이 커다란 대구 시내 안에서 내가 마음 둘 곳은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았다. 집 밖을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평생 내가 들어오던 말과는 다른 억세고 강한 말투가 내 귀에 박혔고, 내가 말 한마디 뱉을 때 마다 사람들은 날 쳐다보기 일쑤였다.

집 안에서도 다를 바가 없어, 음식을 비롯해 모든 생활양식은 남편을 중심으로 맞춰져 나는 꼭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광주가 그리웠다. 마치 향수병을 앓는 듯. 하지만 대구와 광주는 너무나 멀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딱 한 가지 위안을 받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떡볶이와 만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구로 시집을 와서인지 나에게 가장 좋았던 시절은 친구들과 함께 했던 학창시절이었고, 그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바로 만두와 떡볶이였다. 교복을 입은 채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먹었던 떡볶이와 그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는 만두는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웃음이 났다.

그래서 난 대구생활이 힘들어질 때면 집 근처 분식집으로 갔다. 그리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 떡볶이와 만두를 먹었다. 비록 광주에서 먹던 떡볶이 보다는 약간 매웠지만 그래도 참으로 맛있었다. 내게는 이 음식이 나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첫째 아이가 태어났다. 첫째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아이를 등에 업고 분식집에 갔다. 그러는 사이 분식집 아주머니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그 날은 부부싸움을 한 날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생각도 안 나는 사소한 이유였겠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고 그 속에서 남편이 내게 했던 한 마디는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니 이럴거면 광주 다시 가라!”

남편의 그 말에 난 멍해졌다. 고향에 가장 가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하지만 혼자서도 가기 어려웠던 그 먼 곳을, 애 까지 생긴 지금 어떻게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순간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리적 거리와 함께 그 동안 꾹꾹 눌러 담아두고 있었던 두 곳의 심리적 거리가 내 마음 속에 한꺼번에 와 닿으며,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나는 곧바로 집을 뛰쳐나왔다.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나는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문득 배가 고파졌다. 순간 분식집 생각이 났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집에서 나온 터라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아... 너무 힘든데... 그래, 분식집 아주머니에게 외상을 부탁해볼까?’

 난 분식집 아주머니에게 죄송스러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잠시 망설이다가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저... 아주머니! 저... 죄송한데 오늘은 외상 안 될까요?”

 “외상? 안되긴! 새댁이랑 내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당연히 되지”

 “그럼 항상 먹던 것처럼 떡볶이랑 만두 좀 주세요!”

 “그래요! 음... 오늘은 내가 특별한 만두를 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난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며 음식을 기다렸다. 부부싸움 때문에 화가 나서 인지 떡볶이와 만두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내 앞에 나온 음식들.

 하지만 그 음식들을 보자, 난 아주머니를 노려보며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참말로 너무 하지라! 아무리 그래도 애랑 같이 있는데 어떻게 이런 장난을 한당가요! 내가 전라도 사람이라고 지금 무시하는 거 맞지라?”

나의 고함에 아주머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무리 외상을 한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속이 비어 있는 만두를 줄 수 있냐고요!”

아주머니는 나의 말을 듣고는 나와 만두를 한참 번갈아 보더니, 뭔가 알았다는 듯 내 앞에 앉아 나를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새댁! 이 만두는 납작 만두라는 거야. 옛날 피난민들이 만두 안에 넣어 먹을 게 없어서 이렇게 먹었다던데, 요즘 대구 사람들은 별미처럼 먹어.”

 “.........”

 “오늘 옷차림을 보니 뭔가 사정이 있는 거 같아서 새댁 기운 내게 해주려고 평소와 다른 만두를 만든 건데 오해했나 보네. 내가 미처 생각 못했어. 광주에서는 못 봤을 수 있는데. 미안해요.”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 창피했다. 내가 너무 못나 보였다. 나 혼자 오해하고, 나 혼자 착각했던 것이다. 순간 그 동안의 일들이 스쳐지나갔다. 다른 사람들의 의미없는 행동을 가지고 난 여태껏 나 스스로를 몰아붙인 것은 아닐까! 단지 타지생활로 인한 고통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 그들을 미워했던 것은 아닐까! 눈물이 흘렀다. 짧은 타향살이 동안 난 못난 울보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오히려 나에게 미안해하는 아주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주머니. 그 동안 제가 힘들었나봐요. 그래서 자꾸 남 탓만 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못난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니야, 새댁! 나도 충청도에서 대구로 시집왔는데, 처음엔 적응이 안 되더라구. 드센 말투, 무뚝뚝한 표정, 맵고 짠 음식까지! 근데 지내고보니 대구 사람들 겉으로만 무뚝뚝하지, 속정이 참 깊어. 새댁도 금방 알게 될 거야. 그 사이 힘들면 언제든지 와! 그 때는 내가 납작만두 말고, 그냥 만두 줄께!”

 나를 위로하는 아주머니의 말씀에 내 시선은 그 납작만두로 향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납작만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군더더기 없고 담백하니 고향 음식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납작만두를 떡볶이 국물에 찍어 다시 한 번 베어 물었다. 만두 안에 떡볶이 국물이 금세 스며들어 떡볶이와 만두의 맛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납작만두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바뀐 환경에 스스로를 금방 적응시키는 그 모습은 다른 사람의 눈치만 보며 스스로를 잊었던 나, 다른 사람의 탓만 하며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나와는 너무 비교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도 노력할게요! 그리고 다음에 올 때도 이 납작만두 주세요! 너무 맛있어요!”

 

 30여 년이 지난 지금. 참 많은 것이 변했다. 내 등에 업혀 울던 그 어린 아이는 어느 새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고, 고향이 그리울 때 아들 녀석의 자동차를 타면 3시간 안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변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다. 광주에 갈 때 마다 만나는 동창들에게서는 더 이상 여고 시절의 그 앳된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수다를 떨다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오는 거친 경상도 말투 때문에 친구들은 흠칫 놀라기 일쑤이다.

 이렇게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즐겨먹는 이 납작만두. 이 납작만두를 볼 때면 난 그 날의 추억이 떠오르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젠 이 납작만두가 내게 새로운 추억을 또 하나 선사하려 하고 있다. 얼마 후 광주에서 대구로 놀러오는 여고 동창들의 안내를 맡게 된 나. 친구들은 나와의 전화통화에서 요즘 대구에서 유명하다는 납작만두를 먹으러 가고 싶다 아우성이었고, 우리는 납작만두가 맛있기로 소문 난 시내의 한 맛 집에서 납작만두를 먹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나의, 아니 우리들의 새로운 이야기는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에게 납작만두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이것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열쇠이자,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고마운 친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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