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을석(충청북도교육청 장학사)

 

라면을 끓일 때 면을 먼저 넣어야 할까? 아니면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할까? 라면 봉지에 적혀 있는 표준(?) 조리법에 따르면 …….

라면을 맛있게 끓이기 위해 라면 봉지의 지시법을 따르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라면의 종류보다 훨씬 다양한 조리법들이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을 떠돈다.

사람의 입맛이 저마다 다르고 얻고자 하는 바도 각기 다르다. 누구는 쫄깃한 면발, 누구는 진한 국물, 누구는 저나트륨, 누구는 곁들이는 채소를 선호한다. 그러니 순서도 다르고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데 정답은 없다. 자신이 원하는 라면을 먼저 정의 해보고 적당한 방법을 찾는 것이 정답이라면 정답이다.

라면을 맛있게 긇이는 일처럼 세상살이도 이렇다 할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의식중에 정답을 찾곤 한다. 우리 교육이 정답을 찾도록 길들여 온 탓일까?

정답은 두 종류가 있다. 정해진 답 정답(定答)과 옳은 답 정답(正答)이다. 단순한 계산 문제라면 정해진 답이 있기 마련이지만 응답자의 생각이나 느낌을 묻는 질문이라면 옳은 답을 찾는 게 마땅하다.

정해진 답이건 옳은 답이건 우리 교육이 정답을 찾도록 길들여 온 것은 사실이다. 한 시간을 배우고는 관련 문제를 풀어보느라 몇 배의 시간을 보낸다. 또 그 시간의 대부분을 정해진 답을 찾았느냐 옳은 답을 썼느냐를 확인하느라 허비한다.

이런 종류의 정답을 찾는 문제는 대개 ‘가장 옳은 것을 고르시오’ 또는 ‘올바르지 않은 것의 번호를 쓰시오’라는 지시문의 형태로 끝난다. 지시를 잘 따라야 한다.

정답 찾기 교육에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옳으냐 그르냐, 맞느냐 틀리냐만 따진다는 점이다. 여기엔 결과에 대한 판단만 있지, 정답에 이르는 사고과정은 없다. 오답을 제출했다면 왜 오답이 나왔느냐를 묻지 않는다. 또 정답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가, 창의적인가도 짚어 보지 않는다.

우리 교육은 이러한 정답 찾기 교육에 대한 반성 속에서 해답 찾기 교육으로 옮겨 오는 중이다. 해답이란 무엇인가? ‘질문이나 의문을 풀이함 또는 그런 것’(국어사전)이다. 아무래도 결과물인 답보다는 풀이 과정과 절차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낱말이다.

해답은 옳으냐 그르냐 맞느냐 틀리냐보다는 다양한 답을 창출할 수 있느냐, 그 답이 합당하냐, 받아들일 만하냐가 관건이 된다. 절대적으로 옳은 정답을 주장하고 나머지는 오답이라고 배척하지 않는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정답찾기인지 해답찾기인지는 따로 따져보지 않아도 될 법하다. 그러니 ‘정답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해답의 주인이 되라’는 주장에 자못 고개가 끄덕여진다.

물론 ‘해답의 주인’이 주어진 문제만 잘 푸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 답을 추구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배움은 질문에 기초해야 한다. 질문이 알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문을 따라가는 배움의 여정은 즐거울 수밖에 없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질문을 ‘인간이 세계에 탐구적으로 관계하는 원초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방법을 참고하면 된다. 해법이 없으면 해법을 만들면 된다.

질문이 새로운 발견을 가져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충북의 학교마다 질문이 넘치기를 바란다. 질문으로 학교가 새로워지기 바란다. 충북의 교실마다 질문이 가득하길 바란다. 질문이 배움의 문을 활짝 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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