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사회]한국종교인평화회의 (kcrp)는 30일 오후2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전통문화공연장에서 이웃종교화합주간 심포지엄을 가졌다.

변진홍 사무총장의 사회로 김희중 대표회장의 개회사에 이어 발제자로는 김윤열 UN 종교간 평화추진 한국대표, 법현 열린선원원장이 나섰다.

지정 토론자는 박경조 성공회 주교, 박명규 서울대교수 /통일연구소장, 이상기 아시아뉴스N 대표, 김진화 전 KBS 해외특파원 등이 참여했다.

토의 내용은 이웃종교 화합주간의 의의와 현안, 앞으로의 과제 등을 짚어보며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법현(승려. KCRP 종교간대화위원. 열린선원 원장)
한국의 종교 대화운동 바라보기
1.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2. 어떤 길을 걸어왔나(종교대화의 어제와 오늘)?
3. 어떤 과제가 있나?
1)종교간 대화인가 종교대화인가 대화를 위한(이끄는) 종교인 모임인가
2)교리 개념의 같은 느낌과 다른 이해
3)구체적 목표와 종교 교리의 관련문제
4)7개 종단인가, 종교인가, 교단인가?
5)기독교도들의 이웃 종교 배척과 불교 등의 적은 노력
6)참여자와 재원의 문제
4.부족해서 필요한 쓰임새를 위해

1.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같은 종류끼리 잡아당기는 힘을 응집력(凝集力.cohesion)이라고 한다. 응집력을 크게 하는데도 필요한 것들이 있다. 다른 종류 사이에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것을 부착력(附着力.adhesion)이라고 한다. 모든 것들이 잡아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자연과학에서 인력(引力.gravitation)이라고 한다. 지구가 중심으로 당기는 힘을 중력이라고 한다. 반대로 밀어내는 힘은 척력(斥力.repulsion)이라고 한다. 이러한 힘들이 잘 균형을 이루어서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정상상태(steady state)라고 한다. 항성, 행성, 위성 등과 이런 저런 물질들과 공간들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그리고 지금도 커가고 있는 우주자연의 현장에서 같고 다른 존재와 존재들 사이에서 밀고 당기는 힘들이 균형을 이루어 자연스러운 것을 정상상태(steady state)라고 한다. 그것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안정이요, 평화다. 그것을 이룩하는 선행행동이 에너지의 교류를 통한 동화(同化)이고 사회적인 모습은 이해라고 한다. 소통이라고도 한다. 이해와 소통을 위해 대화가 필요하다.
둘 이상이 모여서 집단을 이루고 집단이 모여서 사회와 국가를 이룬다면 하나 이상의 모임이 제대로 된,아니 그것 비슷한 일이라도 하려면 반드시 의사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것이 대화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표현을 빌자면 말을 흩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고 나서 의사를 모으는 것이 여간 어려워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지만 다시 모으는 노력 즉 대화가 필요한 것이리라.
파니카의 말마따나 종교간의 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한국종교대화의 실질적 선두주자인 강 원룡목사 등이 말한 오래된 새 길은 “하늘땅이 오래되었지만(雖久) 생명을 냄이(生生) 끊이지 않고, 해달이 늘 비추지만(雖久)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日新). 책에 실린 뜻이 비록 넓다하나(雖博) 그 뜻은 제 각기 다르다(各殊).”는 연암 박 지원이 초정 박제가의 문집인 초정집(楚亭集)의 서문을 쓰면서 칭찬하는 글을 모티브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모로 정서가 닮은 분의 닮은 이야기에서 찾아내었다는 읽는 이의 재미가 있다. 살펴 보건데 그 모양은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길이라는 뜻도 되고, 새로운 길이지만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옛 성인들이 스스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것은 바로 오래된 옛 길을 걸은 뒤에 한 일들이며, 그 길이 반드시 옛 길을 파 버리고 새 길을 연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모든 종교지도자(교주)가 스스로의 종교를 개척하고 교단을 연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종교와 교단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오래된 종교와 교단을 겪어 본 뒤에 한 것이니 그 안에 이미 종교 대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길이 나서 사람이 다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모여서 함께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같아지는 것이 늘어나고 같아지는 것이 늘어날수록 우리들 사이에 평화와 행복이 지속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사회의 대화를 이끄는 종교인 모임의 지도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2. 어떤 길을 걸어왔나(종교대화의 어제와 오늘)?
이 사회에 종교가 하나뿐이라면 종교 안의 대화만 모색하면 될 것이다. 하나여도 종교 안의 대화는 필요하다. 모였다는 것 자체가 소통이 필요한 것이며 소통의 방법으로 말(표정과 동작을 포함한)이나 문자를 사용한 대화가 요구된다. 하지만 종교가 여럿이라면 더욱 필수적으로 대화가 쓰이게 된다. 대화가 잘 되면 소통이 잘 되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고, 대화가 잘 되지 않으면 그만큼 소통도 되지 않고 평화는 요원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한국 사회는 삼국시대부터 다종교 사회였고 종교간 대화의 한 틀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 안에서 이루어진 종교 대화의 한 면을 간단하게 살펴본다면 현상과 상황에 적응하여 널리 교화하는 응동보화(應同普化)의 정신과 익혀서 닮아가는 습합(習合)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찰에 흔히 있는 산신각은 한국고유의 종교사상을 불교 안에 받아들인 것이며, 칠성각은 도교를 받아들이고, 제사의 많은 형태가 유교의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민족의 종교였던 불교가 순교자를 내면서 시작한 전법과정을 거치고 한 민족과 쉽게 동화가 되었다.
근래에는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고 한 폴 니터와 진제스님의 대화도 있었지만 예수천당불신지옥의 입장에서 본 “부처님은 사탄의 대장이요, 대웅전은 마귀들의 종합청사”이기에 ‘00사 무너져라...’고 하는 기독교 청년단체의 대형집회도 있었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한 시장이 나중에는 대통령이 되어 여러 가지로 특정종교편향의 인사와 정책이 이어지고 있는데 일부의 표현으로는 그 때문에 특정 종교도 힘들다고 한다.
아다시피 200여년 전에 가톨릭을 시작으로 유일신교가 본격적인 상륙을 해서 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다종교사회를 구성했다.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는 시각과 방법론의 차이가 조금은 있었지만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 인사들이 연대해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여러 종교인들이 연대해서 조국의 광복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종교들이 서로 대화를 시작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등 각 정권들이 자기 정권의 유지를 최고의 목적으로 하는 종교정책을 이어가면서 크기와 정보력의 한계가 있는 종교들은 어쩔 수 없이 자파의 이익과 견해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도 종교간의 갈등이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는 종교간 대화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능가스님 등 불교인들과 유교, 천도교 등 정서적으로 동양종교라 일컫는 종교들이 기독교 등 서양 종교라 일컫는 종교를 대할 때 느끼는 반감은 어쩌면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이 아니라 교단의 지도부가 가지고 있는 선교대책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더욱 특성화되고 모나게 되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대화와 교류는 힘을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이에게 도움과 대화의 손길을 내미느냐, 덜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이가 더 자진 것으로 느껴지는 이에게 손길을 펼치느냐가 꽤 중요한데 한국의 종교대화는 강도와 밀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양측에서 시작하여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최근 한 기독교계 매체에 청와대 기독교 신우회 회장을 역임한 주 대준장로 인터뷰가 실렸는데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에 의하면 아주 열심히 크리스천으로서 살면 되지 기독교인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단체이름을 일반적인 명칭인 ‘기독교신우회’‘가톨릭 교우회’‘불자 신행회’라는 이름 대신에 ‘한국기독교공직자 선교연합회’,‘기독교 공직자 선교센터’를 통해 확보하고 선교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유일신교 단체가 갖는 특징이다. 그에 따른 반감이 확산되어 종교차별금지법과 공직자종교차별신고센터를 정부에 관철시켜 개신교의 선교를 방어했다고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웃 종교(불교)에서는 불교신자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것이 그 단체의 역할인데 유일신교에서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 다른 전통과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청와대 등 정부기관에 모임을 가지는 것과 군전법사(군전도사: 군승법사, 군목, 군신부)를 파송하는 것을 부러워하는 이웃종교가 있고 정치적인 역량을 발휘해서 파송권을 얻어낸 종교가 있다. 한편, 그런 것들 즉 기득권을 버려야만 진정한 전도=전법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60년대의 3교 또는 5교간의 대화시작과 1970년대의 반 유신독재 투쟁연대 그리고 80년대의 민주화운동과 세계종교평화회의 아시아회의 개최를 계기로 구성한 한국종교인평화회(KCRP)의를 기점으로 본격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종교간 대화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불교 등 동양종교 종교라 일컬어지는 종교들은 넓은 마음을 가진 교리와 지도자들의 성향만 믿고 교단적으로, 교학적으로 그리고 단체적으로 대화를 준비하고 이끌어가는 움직임은 미약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종교간 갈등을 조장하는데 가장 큰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개신교는 이웃종교에 대한 이해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물론, 신학교 안에서 신학의 범위 안에서 하고 있으며 에큐메니컬 선교의 일환이다. 종교라는 이름이 본디 살았던 신과의 공동주거 공간이었던 에덴에서 쫓겨났던 사람들이 다시 신의 품으로 돌아가 신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서구적 의미의 종교이다. 그와 같이 교회들이 구교, 신교, 성공회 등으로 나뉘는 것은 교단 구성원들의 삶이 예수의 삶으로부터 유리된 것이 그 원인이므로 그리스도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 목표이다. 그래서 교회일치 운동을 펼치는데 ‘예수를 구원의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 자신인 그리스도’라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참여하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한기총의 명분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킨다는데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서로 합의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종교인평화회의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참여하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는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김 대중정부시절 국가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하는데 종교계의 정신적 지도가 필요한데 개신교가 에큐메니컬, 반에큐메니컬(진보, 보수)단체로 나뉘어 한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진보의 흐름에 들었다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보수로 재편된 당시 조계종총무원장 송 월주스님을 중심으로 한기총이 참여했다. 나머지 5개종교의 수장이 동참하는 형태로 대표자들만의 모임이지만 정부의 지원 아래 모임이 이루어져 큰 행사를 가지면서 정체성을 확보해가고 있다.
종교간 대화, 환경생태운동, 남북대화, 반핵운동 등 여러 분야에서 한기협과 한기총의 견해가 다름에 따라 기독교 자체 내의 분열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지만 현상적으로는 그런 우려와 관계없이 여러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정부에서 특정한 정권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에 재정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오히려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정권유지에 이용하는 것이라는 볼멘소리가 있지만 불만의 소리를 내는 쪽에서도 한국종교인평화회의를 통해 지원을 받으면서 소리가 잦아들고 있으나 뜻있는 이들의 걱정은 높아가고 있다.
기독교계가 이렇게 이념적 ,교리적 성향에 따라 아예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비해 불교계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불교는 대한불교조계종이 두 기구 모두 참여자로 되어 있고 불교계 이웃종단들은 조계종의 묵시적 양해아래 행사 등의 참여자로만 역할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통일된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조계종만이 아닌 불교 종단 전체의 자발적 의사를 가지기 어렵다는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 사회평화를 이루는데 더 적극적으로 기여하기 위해서는 조계종에서 판단하고 이웃종단에서 의사를 모아 참여의 형태를 보다 더 나은 상태로 진전시켜야 참여의 기회도 늘리고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기독교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다투고 불교는 한국이와 대한이가 다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으로 다툰다는 의미가 숨어있는 유머라고 생각한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종교간 대화를 이끈 강원룡 목사의 6주기가 다가오는데 강 목사는 이단으로 몰리면서까지 종교화합을 주제로 많은 일을 벌였다. 그는 1963년에 세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를 1965년에 한국 기독교학술원으로, 다시 크리스천아카데미로 바꾸었고 2005년에는 아예 대화문화아카데미로 바꿀 정도로 대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명동의 일로 인연을 짓기 시작한 가톨릭의 김 수환신부(추기경)와 법정스님 등이 함께하면서 한국사회의 진보적 지성들이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들의 활동이 한국종교협의회,한국종교인평화회의,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한국종교연합선도기구(URI)등의 종교간 대화기구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그들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명망가 중심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으나 차츰 풀뿌리 대중들의 대화참여에 관한 의식이 요구되고 있는 한편 정부의 지원이 오히려 풀뿌리 대중들의 참여를 어렵게 하고 활동의 성격이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지적은 마음에 새겨야할 것으로 보인다.

3. 어떤 과제가 있나?
1)종교간 대화인가 종교대화인가 대화를 위한(이끄는) 종교인 모임인가
종교의 목적이 개인의 구원(구제, 제도, 깨달음)을 통해 사회를 평화롭게 ,구성원을 행복하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현재 진행하고 있는 종교인들의 대화 모임에 관한 이름을 조금 신중히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회에 빛을 주고 평화를 주는 종교인들이 모여서 대화한다는 느낌을 주기에 모자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2)교리 개념의 같은 느낌과 다른 이해
(장로, 영성, 성당, 사원, 수도, 수행, 하나님, 하느님, 한울님, 스님 등)
『로미오와 줄리엣』의 번역서에 ‘사원’에서 ‘스님’을 만나는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이는 물론, 수도원(성당)의 신부를 뜻한다. 기독교에서 많이 쓰고 있는 장로(長老)는 불교에서는 어른스님(Tera)이라는 뜻이다. 영성은 기독교나 가톨릭의 개념이라는 느낌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시작은 이미 1천여 년 전 불교에서부터이다. 이렇게 현재는 다른 개념으로 특정 종교의 개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실상 알아보면 이웃 종교의 개념이기도 하고 다른 사상의 공유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느낌만 가지고 외면하거나 소유권(?)을 주장하기 보다는
함께 공유하는 개념, 달라진 개념, 어원과 배경 등을 살펴서 함께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시작부터 지금까지 오는 동안 시행하고 있는 각 종교의 의례, 수행, 기도, 강학(교리공부) 등을 함께하는 방법도 매우 소중한 체험이라 생각한다.
3)구체적 목표와 종교 교리의 관련문제
지금까지 적지 않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종교계가 연대하여 벌인 일들 가운데 입장에 따라서는 그러한 일들이 과연 내 종교의 교학적 기반과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내부의 여러 의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미독립운동, 반독재민주화항거, 환경생태운동, 남북통일운동 , 한강과 청계천, 새만금, 사패산과 천성산 터널 , 줄기세포와 4대강 그리고 핵문제와 강정마을, 한국 중공업과 쌍용사태 등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확연하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4)7개 종단인가, 종교인가, 교단인가?
대화의 주체이며 상대들인 참여자들의 성격 규정이 모호한 경우가 꽤 있다. 그것은 바로 종교, 교단, 종단, 종파 등의 개념 규정이 각 종교마다 다르기도 하고 쓰임 자체가 없는 종교도 있어서 그런지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고 사용하여 혼란스럽다.
5)기독교도들의 이웃 종교 배척과 불교 등의 적은 노력
많은 기독교도들의 이웃종교 이해노력도 배가중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반드시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가톨릭의 선교, 기독교의 선교전략에 관한 교단 차원의 책자를 보면 이웃 종교의 입장에서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 정배교수의 지적과 같이 불교는 마음 넓음을 자랑하나 근본주의적인 경향도 생겨나고 있다. 한 세미나에서 개신교의 목사가 주제발표를 하면서 “이웃종교를 이해해야 한다”는 주제를 발표하자 불교계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사가 “저렇게 등치고 배 만지는 것이 수법인가?”하고 물어 “내 발표문 어디에도 그런 내용이 없는데 왜 다른 곳에서 겪은 것을 일반화 하는가” 라고 호소하며 발표자를 마음 쓰게 하는 일도 있었다. 작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의 준비와 발표과정의 세련되지 못한 방법론과 표현 및 대중공의를 모으는 과정상의 문제 등으로 일정이 미루어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조계종 내의 상당수가 “ 무엇 때문에 이웃종교를 받아들이며 내 종교인 불교의 정체성을 흐리는 일을 하느냐?”는 의견을 발표하며 추진자의 정체성을 크게 의심하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6)참여자와 재원의 문제
①기독교-한기총과 한기협이 이념적 문제로 함께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②불교-조계종과 종단협의회의 소속종단 등이 정확하게 참여의 틀을 확정하지 않고 있다.
③민족종교(천도교)-민족종교협의회와 여러 종단이 있지만 대표자들의 단독참여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천도교 일부가 민족종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중복참여하고 있다. ④이슬람과 통일교-이슬람교와 통일교 모두 기독교 측에서 대화 참여를 꺼리고 있음
⑤참여자 발굴과 재원마련-대표자, 대표단체의 활동도 필요하지만 보다 더 활발하고 지속 가능한 활동을 위해서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활동과 회원들의 자발적 재정 및 행사 참여가 필수요건이다. 또한 대화가 필요 없는 이들 즉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만 계속 대화하고 꼭 대화가 필요한 사람들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또 정부지원 행사는 크고
다른 행사는 작거나 없어지고 있다.
⑥행사와 이벤트 위주의 활동
재원마련의 어려움이라는 현실적 여건이 있기는 하지만 행사와 이벤트 위주의 활동을 하다보니 전체적인 조감과 참여자의 만족도를 높이기보다는 실적 위주의 흐르는 경향이 있다.
유엔에서 2010년 11월 13일에 선포한 세계종교간 화합을 위한 행사총회 선포문을 발표했다. 매년 2월 첫째주를 “세계종교화합주간”으로 선포하여 각 종교의 전통이나 신념에 다라 각 종교의 성소(성당, 교회, 모스크, 시나고그, 사찰 등)에서 종교간 화합과 친선의 메시지를 전파할 것을 권장한다는 내용이다. 한국의 종교간 대화 기구들은 이 사실을 늦게 알았다. 한국은 초기불교(테라와다불교)의 전통을 따르는 상좌불교한국명상원 관계자들이 2010년엔 유엔본부를 방문하고 ,2011년에는 이슬람교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본인도 인터넷까페활동을 하기에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해결하기 위한 문제점들을 드러내 보였지만 다양한 문제점이 있기에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고 노력을 기울이면 종교가 앞장서서 사회의 평화를 이룩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4.부족해서 필요한 쓰임새를 위해 예전에는 서로 다른 민족(異民族)들이 한 자리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을 보면 흔히 틀린(誤) 사람들이 모였다는 잘못된 표현을 하였다. 살갗의 색깔이 다르고, 눈동자의 빛깔이 다르며, 코의 높이가 다르게 생긴 것을 틀리게 생겼다고 보았다. 보는 자인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에서 형성된 의식이며 그 의식의 표현이었다. 틀린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다 보니 생각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틀린(誤) 사람이 아니라 다른(異)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 깨달음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라는 뜻에서 같은(同)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과학적으로는 105종 원소의 유기적 결합을 나름대로 한 모습이 각각의 존재이므로 구성요소가 거시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사람임을 알게 되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틀린 것이 아니라 맞는(正) 것임을 알게 되었다. 각자의 처지와 시각에서 다르게 보였던 것이 틀리게 느껴졌었으나 이제는 맞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어떤 것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다름의 존재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평화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주의 가장 작은 물질 또는 최초의 원인을 원(元)이라 한다. 당연히 가장 작고, 최초 원인이므로 그것을 하나라고 보는 것이 일원론(一元論)이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가 아닌 두 개가 아닌가 하는 사고가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이원론(二元論)이다. 예를 들면 물질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인도를 중심으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불일불이론(不一不二論)이 나타났다. 이는 줄여서 불이론(不二論=non-dualism)이라 하기도 한다.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상당히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쓰임도 많다. 하지만 둘이 아님이라는 말은 둘은 아니어도 셋이나 넷 또는 그 이상이라는 추론도 가능한 것이어서 단어 자체에 문제를 가지고 있다. 불이(不二)라는 말도 불이(不異)라는 단어로 대체되어 ‘하나도 아니며 많은 것도 아니다’ 또는 ‘하나로 같지도 않고 많아서 다르지도 않다’는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다양한 근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등장했다. 이를 다원론(多元論)이라 한다. 이는 다민족, 다종교, 다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는 효용성이 큰 이론으로 생각하고 있다.
필자는 이미 여러 곳에서 원(元) 자체를 가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주장한 바 있다. 어떤 근원을 가정하면 근본주의에 빠져서 다른 사상들과 다투기 쉽고 근원이 없다고 하는 무원(無元)이라야 평화로운 생태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필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새로운 사상으로서 무원론(無元論)에 입각한 무원주의(無元主義)-amonism(無元主義) based on amonitheory(無元論)-를 진지하게 생각하고자 한다.
무엇인가 쓰임새가 있다는 말은 필요하다는 뜻이다. 필요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부족하기에 필요한 것이다. 목이 마렵다면 몸 안에 수분이 모자라다는 것을 감각기관이 느껴서 몸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대화가 쓰임새가 있다면 화합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화합이 필요하다면 이 사회에, 종교단체들 간에도 화합이 부족하다는 현상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부족한 것들을 메워서 필요한 것을 없애고 충만해 넘치는 상태가 되겠는가?
화합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이 참 많으니 아마도 불교교단에도 화합이 필요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도 살펴보게 된다. 불교교단만이 아니라 조직을 이룬 곳은 어디나 그럴 것이다. 불교교단의 조직인 승가(samgha)는 1천 5백여 년 뒤 유럽의 이익분배조직인 길드(guild)와 비슷한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승가를 유지하는 좋은 원칙 가운데 하나가 육화경(六和敬)이라는 것이다.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를 화합시켜야 하는데 1)몸을 화합하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야 하고(身和同住) 2)입을 화합하기 위해서는 다투지 말아야 하고(口和無諍) 3)뜻을 화합하기 위해는 함께 기뻐해야 하고(意和同悅) 4)계를 화합하기 위해서는 같이 닦아야 하고(戒和同修),5)견해를 화합하기 위해서는 함께 이해해야 하며(見和同解),6)이익을 화합하기 위해서는 같이 나눠야 한다(利和同均)는 것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마하박가(Mahavagga)』라는 불교계율서적에 꼬삼비 지역의 비구들이 이견을 해소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부처님의 지도를 받고도 무려 2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다른 여러 가지 과정과 교훈이 있으나 여기서는 그 과정이 매우 어려웠다는 정황만을 전하고자 한다.
이는 비단 불교만의 문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각 종교교단 내에서도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전통과 신념과 교리체계가 다른 종교들 간의 대화와 화합이 어찌 쉬울 것인가? 그만큼 어려운 것이 화합이요 평화라는 것을 생각하고 겸손하고 진지하게 작은 것이라도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 종교 아닌 어느 종교라도 한국에 들어오면 한국적인 종교가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명과 무교의 영향이다. 근본적 의미에서의 기독교(가톨릭),불교가 어디 있느냐? 모두 한국화된 기독교와 불교가 있을 뿐이다. 다른 표현으로 보면 습합(習合.acculturation)과 통섭(通涉.consilience)이라고 볼 수 있다. 습합은 ‘익숙해져 하나되다 ,익혀서 닮아가다, 익숙하고 하나되다’의 뜻이다. 통섭은 ‘통해서 건너다(사귀다), 통하고 건너다(사귀다)’의 뜻이다. 문화와 학문 또는 현상의 닮음과 교류를 나타내는 말이다.
한 종교의 근본사상에서 보면 문제일 수 있으나 종교간 대화와 사회통합 또는 평화유지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자연스럽고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참고>
개인적인 이웃종교체험

대학시절 통일교 장로의 집에서 세 들어 살면서 원리에 관한 이야기를 다소 들은 바 있고
불교학생회에서 공부한 정도를 가지고 좋아서 기차, 지하철,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불교 전단이나 잡지를 나누어 주고 불교의 중도와 연기법을 설파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대순진리회 지도자를 만나서 중곡동 본당을 견학하고, 감리교 목사를 만나서 감리교목사수련회에 동참하고 가톨릭인과 기독교인간의 싸움에 끼어들어 군포성당에서 진행하는 피정에 동참하여 낙태방지 비디오를 보고 느낌이 있었으며 뒤에 천주교 단체에서 진행하는 부부사랑 증진 프로그램인 M.E.에 승복을 입은 채 동참한 경험이 있다. “나는 왜 10년간이나 승려생활을 하다가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가?(명진홍, 김진규)”라고 하면서 문제의 간증집회를 하는 교회들의 움직임을 제지하기도 하고,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 등 행진 때 도로를 한 차선만 내주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경우와 비교하면서 실력행사를 한 적도 있다. YMCA에서 레크리에이션도 배우고 평택 YMCA의 소그룹 진행자 역할도 맡는 등 나름의 이웃종교 이해 활동이 이어졌으며, 이명박장로의 서울시 봉헌발언에 항의집회를 하기도 하고, 이명박정부의 특정종교편향 규탄 범불교도대회 대표연설을 한 바도 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활동을 통해 KCRP와 URI 그리고 지금은 거의 활동이 끊긴 한국종교협의회 활동을 한 바 있다. 대학생 때 감리교목사 수련회 때 나를 보았던 목사님이 6.15행사로 금강산에서 만났을 때 원로목사가 되어 만남의 기쁨을 가지기도 하였다. KBS 기자였던 김 수연목사를 비롯하여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과 가톨릭 신부, 수녀님 그리고 원불교 교무님들과 천도교 동덕님 유교와 민족종교협의회의의 어르신들과도 교유하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포교원에 이웃종교의 어른들을 모셔서 설교를 듣기도 하고, 이웃하고 있는 이웃종교의 성직자와 어려운 속내를 드러내 놓고 상담을 하기도 하며 이웃과 함께 하려고 자그마한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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