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뉴스-문화]하얀 화선지를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머리를 조아리자, 가위를 집어든 스님의 손이 정수리 위에 내려앉는 것이다. 점점 목 주위에서 뜨거운 기운이 몰아쳤다.
‘계를 받는 것은 삼보에 대한 믿음이요, 이 계를 지니면 어둔 곳에 불을 밝히는 일이요.’
스님의 나직한 음성과 함께 머리카락이 싹둑싹둑 잘려났다.
그때였다. 수행자의 길로 들어서기까지의 삶들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영국사에 지낸 유년이 생활과 일곱 남매들의 얼굴들이 보이고, 살아보겠다고 고생 고생하던 시간들, 아이들을 낳아 키우던 일, 수십 가지의 직업을 전전해본 경험들도 떠올랐다. 노점상에서 과일과 야채를 팔던 일, 튀김가게, 만화가게, 비디오가게, 택시운전사, 음반가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영상음반협회 지부장을 2년 동안 맡으며, 여한도 없이 누렸던 시간들이 잘려나가고 있었다.
염불을 하시던 어머니가 흐느껴 우시는 소리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자신의 대에서 모든 업을 끌어안고 가시겠다고 했는데,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아닙니다. 어머니! 업을 새로이 쌓는 일입니다. 너무 힘들어하지 마세요.’
그 말이 입안에서 모래알처럼 굴러다녔다.
화선지 위에 수북하게 쌓인 검은 머리카락이 물빛에 가려 흐릿했다.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느냐?”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님께 귀의 합니다.”
비우고 또 비우고 그 밑바닥까지 비워내면서, 속세의 무거운 짐도 내려놓기 시작했다.
 <혜철스님 자전 에세이> 『스님은 중매쟁이』는 2012년 봄날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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